다시는

하윤이 그 문장을 일기장에 쓴 것은 이별 후 열흘째 되는 밤이었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겠다.

글씨는 단정했다. 단정하게 써야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밑줄을 그었고, 날짜를 적었고, 펜을 뚜껑에 끼운 다음에도 한동안 페이지를 덮지 않았다. 문장이 종이에 앉아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입 밖으로 낸 말은 사라지지만, 쓰인 말은 남아 자신을 감시한다. 하윤은 감시가 필요했다. 누구의 감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낮에는 일을 했다. 번역 원고를 넘기고, 메일에 답하고, 회의 시간에 카메라를 켜 놓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조금 야윈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알아채더라도 말하지 않았다. 하윤은 그게 고마웠다. 설명이 필요한 얼굴로 살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일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노트북을 덮으면 방이 너무 조용했다. 조용함 속에서 몸은 예전 규칙을 찾았다. 무릎을 모으는 버릇, 목소리를 낮추는 버릇, 상대가 말하기 전에 먼저 고개를 숙이는 버릇. 하윤은 그 버릇들을 하나하나 붙잡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려놓는 행위 자체가 일이 되었다.

서연이 다시 전화했다.

"얼굴 좀 보자. 밥만 먹자. 다른 얘기 안 할게."

"아직은."

"아직은이 벌써 열흘이야."

하윤은 창밖을 보았다. 골목의 전봇대에 전선이 엉켜 있었다.

"나, 결정했어. 다시는 안 할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연의 숨소리가 들렸다.

"세션을 말하는거야, 사람을 말하는 거야."

"둘 다. 무릎을. 그거."

서연은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그게 서연이었다. 서연은 커뮤니티에서 오래 있었고, 오래 있는 사람은 충고를 급하게 던지지 않는다.

"그 문장, 지금 너한테 필요한 문장일 수 있어. 나도 알아. 다만 그게 너를 가두는 문장이 되면 그때는 말할게."

"가두는 게 아니야. 지키는 거야."

전화를 끊고 하윤은 싱크대에 물을 받았다.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따뜻함이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 온기를 아주 의식적으로 느꼈다. 감각을 스스로 고르는 연습이었다. 예전에는 감각을 고를 수 없었다. 주어지는 대로 받아야 했고, 받을 수 없을 때도 받았다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하윤은 거실 한가운데 서서 천천히 무릎을 굽혀 보았다. 바닥이 가까워지자 숨이 먼저 얕아졌다. 허벅지 안쪽이 떨렸고, 시선이 자동으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는 굽히던 무릎을 도로 폈다. 심장이 턱 밑까지 올라와 있었다.

"봐. 아직이야."

혼잣말은 다정하지 않았다. 확인에 가까웠다. 아직 이 자세는 선택이 아니다. 아직은 기억이 먼저 온다. 기억이 먼저 오는 자세를 다시 취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반복이다. 하윤은 그 차이를 혼동하고 싶지 않았다.

밤늦게 그녀는 예전에 쓰던 채팅 앱을 열었다. 프로필 사진을 지웠다. 소개란을 비웠다. 상태 메시지를 지웠다. 마지막에 남은 문장은 닉네임뿐이었다. 하윤은 그것마저 바꿨다. 더는 그 이름으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그 이름은 무릎과 함께 쓰이던 이름이었다.

삭제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하윤은 대화 목록을 내려보았다. 오래된 말들. 착한 아이. 잘 참았다. 오늘은 조금 더. 그 문장들이 한때 달콤하게 들렸다는 사실이 가장 잔인했다. 달콤함과 위험은 같은 목소리로 올 수 있다. 하윤은 그걸 몸으로 배웠고, 배운 것을 잊지 않기로 했다.

앱을 지웠다. 빈 화면이 남았다.

그녀는 일기장을 다시 열어 문장 아래에 한 줄을 더 썼다.

지키는 것부터 한다. 원하는 것은 나중이다.

그 밤, 하윤은 무릎을 꿇지 않은 채로 잠들었다. 잠든 것도 하나의 승리처럼 느껴져서, 그녀는 이상하게도 조금 울었다. 울음은 짧았다. 짧은 울음이 끝난 자리에, 다시는, 이라는 말이 조용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