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여섯의 사전
금요일 저녁, 혜수는 식탁에 공책을 올려놓았다. 수아 중학교 때 쓰다 남은 스프링 노트였다. 표지에 만화 캐릭터가 있었는데 이제는 색이 바랬다. 정민이 수저를 놓으며 그 노트를 보았다.
"숙제야." 혜수가 말했다. "나 혼자 하면 빼먹는 게 생길 것 같아서. 같이 하자."
정민의 귀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맞은편에 앉았다. 식탁등 아래의 두 사람은 수아 성적을 보던 날과 비슷한 자세였다. 내용만 달랐다.
혜수는 볼펜을 잡고 첫 줄을 썼다.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아직 모르겠는 것. 세 칸이었다. 도서관에서 분류 기호를 붙이듯, 그녀는 이 일도 칸이 있어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부터." 혜수가 노트를 밀었다. 평소라면 '당신'이었다. 오늘은 그 호칭이 입 안에서 무거워 다른 글자가 나왔다. 정민은 그 한 글자를 받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천천히 썼다. 하고 싶은 것—무릎. 목. 쓰다듬김. 허락을 구하고 받는 일. 당신이 나를 가지는 말. 몸. 하기 싫은 것—다른 사람 앞에서. 사진. 상처 남을 만큼의 아픔. 강아지 소리. 아직 모르겠는 것—줄. 바닥을 기는 것. 입 안의 일.
마지막 줄에서 펜이 멈췄다. 혜수가 그 줄을 읽었다. 읽은 눈을 들지 않은 채로 물었다.
"입 안의 일이 뭐야."
"당신이 시키는 대로 입으로. 내 입을 쓰는 거. 아니면 당신 입을 내가 받는 거. 어느 쪽이든. 그건 하고 싶은 쪽에 가까운데,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혜수는 볼펜을 받아 자기 칸을 채웠다. 하고 싶은 것—아직 비워 두었다. 하기 싫은 것—수아가 알게 되는 것. 물건이 과한 것. 나 혼자만 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 아직 모르겠는 것—주인, 이라는 단어. 내 것이라는 말. 내가 그걸 말할 수 있는지.
정민이 그 칸을 읽고 오래 말이 없었다.
"혼자만 시키는 사람이 되기 싫다는 게 무슨 뜻이야."
"나는 당신의 아내야. 그게 먼저야." 혜수는 볼펜 끝을 노트 스프링에 톡톡 쳤다. "위에서 시키는 사람만 되면, 이 식탁이 이상해질 것 같아. 아침에는 김치를 나눠 먹고, 저녁에는 무릎을 꿇리고. 그 전환이 가능한 사람인지 내가 아직 모르겠어."
"전환이 안 되면 안 하면 돼." 정민이 말했다. "매일 하라는 게 아니야. 나는 매일 못 해. 무릎이 예전이랑 달라. 당신은 사서 일을 하고. 나는 그 경계를 존중하고 싶어. 존중하는 게 이 일의 일부야. 글에서 그렇게 읽었어. 나도 읽어봤어."
혜수는 그를 보았다.
"언제."
"당신이 시크릿 탭을 열고 난 다음부터. 컴퓨터 검색 기록은 안 봤어. 그냥, 당신이 공부하면 나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 말이 혜수의 어깨를 조금 내렸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 이상한 공부를 덜 이상하게 만들었다.
"단어는 어떻게 할래." 혜수가 물었다. "주인. 노예. 그런 거. 나는 그 단어들이 우리 입에 안 붙을 것 같아. 드라마에서 나온 말 같아."
"나도 노예는 싫어. 주인이라는 말도, 처음엔 민망했어." 정민이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런데 민망한 거랑 싫은 거랑은 다른 것 같아. 당신이 한 번만 그렇게 불러주면, 민망해도 그 민망함이 맞을 것 같아. 안 불러도 돼. 부르면 좋겠다는 거지."
혜수는 공책에 '호칭—보류'라고 적었다.
"목줄은?"
"사기 싫어." 두 사람의 입이 거의 동시에 그 말을 꺼냈다. 정민이 먼저 웃었고, 혜수도 따라 웃었다. 십오 년 만에 이런 종류의 동시 발화가 웃음을 불렀다. 웃음이 식탁을 한 바퀴 돌고 가라앉았다.
"목걸이면 어떨까." 혜수가 말했다. "밖에서 봐도 이상하지 않은 거. 은으로 된 거. 당신이 매일 차고 다녀도 회사 사람들이 목줄이라고 생각 안 하는 거."
정민의 목구멍이 다시 움직였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쓸었다. 쓸어내리는 동작이 무의식적이었다.
"그거면 좋겠어. 그게 더 우리 같아."
혜수는 공책 아래쪽에 은목걸이, 라고 적었다. 글씨가 다른 줄보다 조금 진했다.
"세이프워드라는 게 있더라. 멈추는 말."
"알아. 빨간색이면 즉시 정지. 노란색이면 천천히. 그런 식으로."
"우리는 한글로 하자." 혜수가 펜을 멈췄다. "수박. 멈추는 말. 수박이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다 멈춰. 이유는 나중에 묻고."
"왜 수박."
"냉장고에 있어서. 지금 생각난 단어 중에 가장 우리 집 단어라서."
정민이 웃었다. 이번에는 부끄러운 웃음이 아니었다.
"수박. 알겠어."
노트 한 페이지가 그렇게 찼다. 혜수는 그 페이지를 오래 보았다. 마흔여섯의 사전이었다. 단어 수가 적었고, 빈칸이 많았고, 빈칸이 있는 채로도 이미 하나의 합의였다.
잠들기 전, 혜수는 정민의 손목을 잡았다. 붙잡는 힘이 세지 않았다.
"내일은 그냥 토요일이야. 노트는 서랍에 넣어둘게. 꺼내자고 하면 그때 다시 꺼내."
"응."
그녀는 그의 손목 안쪽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 맥박이 손끝에 걸렸다. 그 맥박 위에, 아직 물건은 없었고, 단어만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