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보리차
토요일 오후, 두 사람은 호수공원을 걸었다. 동탄의 주말은 유모차와 자전거와 강아지 목줄로 가득했다. 정민은 혜수의 왼쪽에서 반 걸음 뒤에 붙는 버릇이 있었다. 처음 연애할 때도 그랬고, 지금은 더 그랬다. 혜수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척했다. 알아채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이온음료를 나눠 마실 때, 앞을 지나는 젊은 여자가 남자의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장난처럼, 가볍게. 남자는 그 손에 끌려 몸을 숙였다. 숙이는 모습이 자발적이었다. 정민의 시선이 그 목덜미에 오래 머물렀다. 혜수는 그 시선을 보았다.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다. 모른 채로 페트병 뚜껑을 닫았다.
저녁은 밖에서 먹지 않았다. 혜수가 삼치구이를 했고, 정민이 밥을 지었다. 밥은 그가 더 잘했다. 물 맞추는 감각이 있었다. 혜수는 그것을 인정한 지 오래였고, 인정하는 일에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상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것은 삼십 대의 일이었다.
식후에 수아가 문자를 보냈다. 조모임이 길어져 내일도 안 내려온다는 내용이었다. 혜수는 "알겠어, 건강 챙겨" 하고 답했다. 정민은 그 문자를 옆에서 읽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 시가 넘자 집이 조용해졌다. 식기세척기가 없는 집이라 싱크대에서 물소리가 잠깐 났다가 그쳤다. 정민이 행주를 개어 놓고 거실로 나왔다. 혜수는 소파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 표지가 옅은 파란색이었다. 그는 그녀 맞은편 단 소파에 앉았다. 앉는 위치가 평소와 달랐다. 혜수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왜 거기 앉아."
"얘기 좀 하려고."
혜수가 책을 덮었다. 손가락이 책갈피 대신 페이지 사이에 들어갔다. 정민의 얼굴이 평소보다 하얘 보였다. 안경을 만지는 버릇이 나왔다. 중요한 말을 하기 전에 그는 늘 안경테를 집게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무슨 얘기."
정민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닫은 채로 삼 초를 쉬고, 다시 열었다.
"이상한 말일 거야. 이상해도 끝까지 들어줬으면 좋겠어. 거절해도 돼. 거절하면 나는 이 얘기를 다시 안 꺼낼게. 진짜로."
혜수는 책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파란색 표지가 불빛 아래서 조금 번져 보였다.
"말해."
"나는." 정민이 자신의 무릎을 보았다. "당신 것이 되고 싶어."
거실의 벽시계가 초를 쳤다. 혜수는 그 소리를 세지 않았다. 셀 겨를이 없었다.
"……뭐?"
"당신 것. 소유물. 그런 거." 그는 웃지 않았다. 웃으면 이 말이 농담이 될 것 같아서 웃지 않았다. "개나 고양이 말하는 거 아니야. 그런 거랑은 다른데, 비슷한 데도 있어. 나는 당신이 나를 가지는 쪽이 됐으면 좋겠어. 내가 당신 아래에 있었으면 좋겠어. 무릎을 꿇는 쪽이."
혜수는 그를 보았다. 마흔일곱의 남편. 구매팀장. 설거지할 때 고무장갑을 끼는 사람. 수아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교복을 가방에 넣고 온 것을 잊지 않아 차를 돌려 갔던 사람. 그 사람이 지금 무릎이라는 단어를 말하고 있었다.
"지금 술 마셨어?"
"안 마셨어."
"아프거나."
"안 아파."
혜수는 소파 팔걸이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앉았다. 일어날 곳이 없었다.
"십오 년 동안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하고 싶었어. 오래." 정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줄 알았어. 남자라면 반대여야 하는 줄 알았고. 그러다 아닌 것 같아졌고. 아닌 것 같아지고 나니까 더 말하기가 어려웠어. 당신이 역겨워할까 봐."
"역겹진 않아." 혜수가 먼저 말하고, 그 말이 사실인지 스스로 확인했다. 역겹지는 않았다. 다만 발이 바닥에 붙는 느낌이 있었다. "이해가 안 돼. 그게 더 커."
"알아."
"당신이 내 아래에 있고 싶다고. 그게 성적으로? 아니면 그냥 성격적으로? 나는 그런 거 해본 적 없어. 책에서도 별로 안 봤고."
"둘 다야. 아니, 구분할 수가 없어." 정민이 안경을 벗었다. 벗은 안경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맨눈이 작아 보였다. "당신이 나를 만지고, 시키고, 이름을 정하고. 나는 그걸 받으면 좋겠어. 받는 쪽이 되고 싶어. 매일은 아니어도. 이 집에서. 당신만."
혜수는 손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테이블 위 보리차 컵이 이미 식어 있었다. 그녀는 그 컵을 집어 한 모금 마셨다. 맛이 없었다. 없는 맛이 목을 적셨다.
"지금은 대답 못 해."
"괜찮아."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다만." 혜수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결혼반지. 십오 년 전 종로에서 맞춘 것. 안쪽이 닳아 글자가 흐렸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모르겠어. 당신은 나를 아는 것 같은데, 나는 그 나를 아직 모르겠어."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임의 각도가 평소보다 깊었다.
"생각할 시간 줄게. 얼마나 걸려도.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물어보고. 내가 답할 수 있는 건 다 답할게."
혜수는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읽히지 않았다. 파란색 표지가 손에서 미끄러울 뿐이었다.
"오늘은 각자 자자. 수아 방에서 자."
"응."
정민은 안경을 집어 일어섰다. 수아 방 불을 켜는 소리가 복도에서 났다. 혜수는 소파에 남아 식은 보리차를 마저 마셨다. 컵 바닥에 찻잎 가루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불을 끄지 않은 채로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는 넓었다. 넓어진 쪽이 그의 자리였다. 혜수는 그 자리에 손을 올려보았다. 이불이 차가웠다. 차가움 위에서 그녀는 눈을 감지 못했다.
당신 것. 그 세 글자가 천장 스프링클러 옆에서 떠 있었다. 혜수는 그 글자를 밀어내지 않았다. 밀어낼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밀어내면 더 선명해질 것 같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