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안의 휴대전화
태양에게.
대전을 지나기 전에 터널이 시작되었습니다. 창이 검어지고, 내 얼굴이 유리에 희미하게 떠올랐어요. 노란 머리끈, 조금 상기된 눈.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보지 못했습니다. 보는 것이 민망했거든요. 반년 동안 글만 쓰던 입이, 지금 이렇게 실재하고 있다는 게.
신호가 끊겼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문장은 「천안 지났어?」였고, 내 답은 전송 중 표시에서 멈췄어요. 터널 안의 휴대전화는 무력했습니다. 무력한 기계 앞에서 나는 비로소 혼자라는 걸 느꼈습니다.
혼자가 싫지 않았어요. 이 혼자에는 당신이 들어 있었거든요. 신호가 없어도 나는 여기 있어, 라고 당신이 미리 말했으니까.
나는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았습니다. 눈꺼풀 안에서 당신의 사진이 재생됐어요. 바다가 보이는 카페. 진한 눈썹. 단정한 입매. 그 입이 실제로 내 이름을 부를 상상을 했습니다. 유진. 쪽지 속의 유진이 아니라, 공기가 떨리는 유진.
허벅지가 스스로 오므라들었어요. 열차의 진동이 골반을 지나갔습니다. 무궁화호의 진동은 거칠어요. KTX처럼 매끈하지 않습니다. 그 거침이 손가락 같았습니다. 허락 없는 손가락. 나는 눈을 뜬 채로 그 상상을 밀어내지 않았어요. 밀어내면 거짓이 되니까.
아주머니는 이미 졸고 있었습니다. 김밥 봉지 끝이 무릎에서 바스락거렸어요. 나는 그 소리 사이에서 쪽지 창을 열어, 보내지지 않은 문장을 적었습니다.
태양.
터널이에요.
당신이 안 보여요.
안 보이니까 더 선명합니다.
첫날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지금은 아쉽고, 지금은 고마워요.
아쉬움이 다리 사이에 있습니다.
고마움이 목에 있습니다.
둘 다 당신 것이에요.
전송은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글을 지우지 않고 두었어요. 터널이 끝나면 보내질 문장. 보내져도 되고, 안 보내져도 되는 문장. 쓰는 일이 이미 도착이었습니다.
영동 쪽인지, 김천 쪽인지, 지명이 방송으로 흘렀습니다. 졸음이 왔다가 공포처럼 달아났어요. 잠들면 부산을 지나칠 것 같아서. 지나칠 리 없는데, 지나칠 리 없는데도 나는 눈을 크게 떴습니다.
신호가 잠깐 돌아왔습니다. 쌓여 있던 문장이 한꺼번에 나갔어요. 당신의 답이 연달아 떨어졌습니다.
「천안 지났어?」
「신호 없네.」
「있어도 없어도 나는 여기.」
「물 따뜻해졌어. 다시 샀어.」
「유진아.」
유진아. 호격 조사 하나가 가슴을 쳤습니다. 쪽지에서 「유진」은 많이 봤어요. 「유진아」는 처음이었습니다. 부르는 입이 이미 가까워진 호칭.
「터널이었어요. 지금 나왔습니다. 심장이 또 빨라요.」
「세지 마. 그냥 빨라도 돼. 열차 위에선 네가 주인이야. 나는 역에서 기다려.」
네가 주인이야. 돔이 서브에게 건네는 주인. 그 문장이 반전의 맛이 아니라 존중의 맛이었습니다. 나는 그 맛을 혀로 굴리듯 읽었어요.
자정이 넘었습니다. 객차 불이 조금 어두워졌어요. 누군가 코를 골았고, 누군가 이어폰에서 새어 나온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 나는 가방 안 지퍼를 열어 부치지 않을 편지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종이의 모서리가 손가락을 살짝 베었어요. 작은 아픔. 그 아픔이 내가 실제라는 증거 같았습니다.
「태양. 지금 만지고 싶어요. 나 자신을. 해도 될까요.」
답이 삼십 초 만에 왔습니다. 삼십 초가 터널보다 길었어요.
「해도 돼. 다만 오지 마. 열차 안에서 오면 네가 혼자 되는 느낌일 거야. 여운만. 손가락은 옷 위로. 나는 세지 않아. 네가 멈춰.」
나는 무릎 위에 올려둔 외투 밑으로 손을 넣었습니다. 스커트 위로, 스타킹 위로. 열기가 손바닥에 바로 닿았어요. 축축함이 이미 스타킹을 조금 적시고 있었습니다. 진동과 손이 겹쳤습니다. 음핵이 옷 너머로 뚜렷했습니다. 원을 두 번 그리다가 나는 멈췄어요. 멈춘 자리에서 속이 작게 수축했습니다.
오지 않았습니다. 오지 않은 채로 손이 젖었어요.
「멈췄습니다. 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더 또렷해요.」
「그 또렷함을 들고 와. 내가 받아줄게. 손으로 받는 건 아니야. 눈으로.」
눈으로 받아줄게. 그 문장이 수치심을 깨끗하게 만들었습니다. 수치심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수치심이 존중이 되는 감각이었어요.
동대구를 지날 때 나는 물을 마셨습니다. 편의점에서 산 물이 미지근했어요. 당신의 물은 다시 샀다고 했지. 차가운 물이 부산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갈증과 욕망을 한 컵에 담았습니다.
태양. 터널 안의 휴대전화는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전달하지 못한 동안 나는 더 많이 당신 것이 되었어요. 신호가 끊기는 곳이 오히려 진짜 연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