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로 남는 밤

은호는 세션이 끝나면 항상 같은 순서로 움직였다. 옷을 입고, 물을 마시고, 택시를 타고, 집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부엌 불을 켜지 않은 채로 수첩을 꺼냈다. 검은 양장 표지, 손바닥만 한 크기. 날짜, 도구, 점수. 그 세 칸만 채우면 밤은 종료됐다.

오늘 날짜. 패들, 클립, 손. 7점.

그는 펜을 멈췄다. 7은 정확한 숫자였다. 6은 너무 멀고 8은 과장이다. 허벅지 안쪽이 아직 뜨거웠고, 젖꼭지에 물린 클립의 잔상이 맥박처럼 남았고, 사정은 허용되지 않은 채로 끝났다. 그 모든 것을 한 자리 숫자로 눌러 담는 일이, 은호에게는 숨 고르기와 같았다.

상대는 잘했다. 합의된 선을 넘지 않았고, 세이프워드를 확인했고, 끝난 뒤 담요를 건넸다. 은호가 괜찮다고 하자 더 묻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 지점에서 멈췄다. 괜찮다는 말은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수첩을 덮기 전에 그는 한 줄을 더 쓰지 않았다. 예전에 한동안, 점수 옆에 짧은 단어를 적던 시기가 있었다. 『멍함』 『배신감』 『허기』. 그 단어들이 페이지를 더럽히는 것처럼 느껴져 지워버렸다. 숫자는 지워지지 않는다. 숫자는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숫자는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아도 스스로 완결된다.

습관이 시작된 밤은 구체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삼 년 전, 강남 어딘가의 렌탈 룸. 상대는 경험 많은 사디스트라고 소개된 남자였고, 채찍을 아주 정확하게 다뤘다. 은호의 등 위에 열을 쌓는 방식이 거의 설계도면 같았다. 스무 대, 서른 대, 마흔 대. 매번 같은 질문을 던졌다.

"더 받을 수 있어?"

은호는 매번 그렇다고 했다. 그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마조히스트는 견디는 사람이다. 견딤의 한계를 숫자로 밀어 올리는 사람이 사디스트고, 그 숫자를 받아내는 사람이 은호였다. 그날 그는 한계를 지나쳐 버렸다. 통증은 어느 순간 감각이 아니라 소음이 되었고, 사정은 통제 밖으로 터져 나왔으며, 사후 케어 시간에 그는 화장실에서 구토를 했다. 남자는 문밖에서 물었다. 몇 점이었냐고.

은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말했다.

"팔 요."

그 뒤로 그는 모든 세션을 점수로 남겼다. 점수는 통제였다. 몸이 무너져도 수첩의 칸은 무너지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을 이해했는지 아닌지는 점수 밖에 있는 문제였고, 은호는 그 칸을 비워 두기로 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커뮤니티 쪽지였다. 프로필 이름은 리안. 첨부된 사진은 얼굴이 아니라 플레이룸의 한쪽 벽이었다. 가죽 스트랩이 걸린 후크, 접힌 담요, 바닥에 깔린 검은 매트. 강남. 프라이빗. 경력 팔 년. 메시지 본문은 짧았다.

"당신의 목록을 읽었습니다. 통증의 종류를 구분해서 적어 놓으셨더군요. 만나고 싶습니다. 먼저 커피가 아니라 룸에서. 합의부터 하고 싶습니다."

은호는 수첩의 빈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다음 칸은 아직 비어 있었다. 그는 답장을 쓰기 전에 오늘 점수 7을 다시 한번 보았다. 7은 충분했다. 7은 안전했다. 7은 아무도 그 뒤를 묻지 않는 숫자였다.

그는 답장을 보냈다.

"목요일. 밤 아홉 시. 리밋은 미리 보내 드리겠습니다."

보낸 뒤에 그는 수첩을 서랍에 넣었다. 서랍을 닫는 소리가 부엌의 어둠 속에서 유난히 짧았다. 허벅지의 열이 식어 가는 동안, 은호는 자신이 왜 그 쪽지를 거절하지 않았는지 분석하지 않기로 했다. 분석은 수첩의 일이었다. 지금은 점수만 있으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