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목소리가 돌아오는 밤
도발의 다음 만남은 따로 예고되지 않았다.
예린이 먼저 연락했다. 짧은 문장. 가도 돼요. 도현의 답도 짧았다. 오세요. 그 오세요가 따뜻하지 않아서 예린은 오히려 안심했다. 안심을 가지고 현관에 섰을 때, 그녀는 아직 자신이 무너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무너진 것은 중반이었다.
도현이 예린을 바닥에 눕히고 무릎을 벌린 채 입으로 내려갔을 때였다. 혀가 음핵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넓게 핥았다. 예린의 손이 도현의 머리에 얹혔다. 밀어내지 못하는 손. 도현이 입을 떼고 말했다. 그 축축한 입술로.
"여기, 잘 열고 있어. 혀 받는 거 예뻐. 잘했어."
잘했어.
그 단어가 들어오는 순간, 다른 목소리가 겹쳤다.
창녀. 더러운 입. 그런 데나 잘하지.
전 사람의 말이 혀의 온기 위에 덮였다. 예린의 허벅지가 닫히려 했다. 도현의 손이 허벅지 안쪽을 잡아 열어둠을 유지했다. 그 열어둠이 예전의 손과 겹쳤다. 예전의 손은 더 거칠었고, 머리채를 잡았고, 얼굴을 그 사이에 눌렀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런데 몸이 구분하지 못했다.
예린의 숨이 깨졌다. 깨진 숨이 울음이 되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레드."
도현의 입이 즉시 떨어졌다. 손이 허벅지에서 풀렸다. 거리가 생겼다. 예린은 그 거리가 생기는 속도에 더 울었다. 전 사람은 레드를 한 번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듣긴 들었다. 다만 웃었다. 예린은 그 웃음이 지금 방 안에 있는 것처럼 무릎을 감쌌다.
도현은 일어나지 않고, 예린의 발끝에서 한 뼘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닿지 않았다. 수건을 가져와 예린의 허벅지 옆에 두었다. 덮지 않고 두었다. 예린이 원할 때 쓰라는 거리.
"여기 있어요. 안 만져요. 숨 쉬어요."
예린은 숨을 쉬지 못하고 어깨를 떨었다. 도현은 반복하지 않았다. 시계가 부엌에서 흘렀다. 예린의 울음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소리가 나자 더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팔에 묻었다.
오래 지나 예린이 말했다. 팔 밑에서.
"그 말 때문에요. 잘했어. 그거 듣는데 다른 말이 같이 들렸어요."
"어떤 말."
예린은 그 단어들을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았다. 꺼내면 방이 더러워질 것 같았다. 그러나 도현의 침묵이 기다려서, 결국 꺼냈다. 창녀. 더러운 것. 네가 할 줄 아는 건 이것뿐이야. 단어들이 마루에 떨어졌다. 도현은 주워 담지 않았다. 듣기만 했다.
"그 말들이 혀랑 같이 왔어요. 몸이 그 때예요. 여기가 아니에요."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임이 보였는지 예린은 팔 사이로 그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 연민이 없었다. 연민이 없어서 견딜 만했다.
"오늘은 손도 입도 안 쓸게요. 옷 입혀줄까요. 아니면 예린 씨가."
"내가 입을게요."
예린은 일어나 앉으며 손이 떨렸다. 블라우스 단추가 맞물리지 않았다. 도현이 물었다.
"도와줄까요."
"...손목만요. 단추는 내가."
도현이 예린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안정시켰다. 맥박이 손 안에서 뛰었다. 예린은 그 뜀을 느끼며 단추를 채웠다. 속옷을 입고 치마를 올렸다. 입는 동안 도현은 손목만 잡고 있었다. 시선은 예린의 손이 하는 일에 두었다. 벗기는 시선이 아니었다.
다 입자 예린은 소파에 앉았다. 도현은 바닥에 남았다. 높낮이가 뒤집혔다. 예린은 그 뒤집힘이 이상해서 무릎을 모았다.
"저 망친 거죠."
"세이프워드를 말한 건 망친 게 아니에요. 제일 잘한 일에 가까워요."
예린이 고개를 저었다.
"전 사람은 레드 해도 조금 더 했어요. 웃으면서. 그래서 오늘은 내가 먼저 말했어요. 말하기 전에 몸이 그 웃음이 올 자리를 만들었어요."
도현이 바닥에 앉은 채로, 손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 보였다. 빈 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손.
"나는 안 웃어요. 레드면 끝이에요. 예린 씨가 다시 그린이라고 하기 전까지는 손도 말도 그 방향으로 안 가요. 오늘은 그린이 아니에요. 알아요."
예린의 눈이 다시 뜨거워졌다. 그녀는 소파 팔걸이를 쥐었다.
"그 말, 잘했어. 그게 왜 그 사람들이랑 붙는지 모르겠어요. 반대잖아요."
"반대라서요. 반대가 같은 깊이로 들어가요. 깎는 말도, 올리는 말도, 예린 씨를 그 자리에 고정하거든요. 몸이 고정의 감각만 먼저 기억해요. 내용은 늦게 따라와요."
예린은 그 설명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보다 먼저 온 것은, 도현이 자신의 혼란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안도였다. 안도가 또 울음을 불렀다. 그녀는 이번엔 소리를 죽이고 울었다. 도현은 다가오지 않았다. 수건이 허벅지 옆에 그대로 있었다.
울음이 잦아들었을 때 예린이 물었다.
"집에 가는 게 나아요?"
"예린 씨가 정해요. 가도 되고, 여기 앉아 있어도 되고. 차 끓일까요."
"...차요."
도현이 부엌으로 갔다. 물이 끓는 소리가 멀었다. 예린은 소파에 앉아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보았다. 입의 물기가 말라 있었다. 그 마름이 허전했다. 허전함을 성욕으로 번역하지 않으려 손을 무릎 위에 겹쳤다.
차가 앞에 놓였다. 도현은 다시 바닥에,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예린이 잔을 들었다. 따뜻했다. 목으로 내려가는 열이 뱃속까지 갔다. 그 열이 아래까지 가지는 않았다. 가지 않아서 예린은 한 모금 더 마셨다.
"다음에요."
예린이 말했다.
"다음엔 그 말 천천히 다시 해볼게요. 오늘은 아닌 거 알아요. 근데 다음에 안 하면, 그 목소리가 이긴 것 같아요."
도현이 잔을 내려놓으며 보았다.
"다음에 해도 돼요. 안 해도 돼요. 이기는 문제는 아니에요. 예린 씨 속도예요."
예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끄덕인 다음 작게 웃었다. 웃음이 쓰았다.
"속도. 그 말 이제 좀 지겨워요."
"지겨워도 그게 내 방식이에요."
현관까지 가는 길은 평소보다 길었다. 도현이 이번에는 따라왔다. 배웅이 아니라, 예린이 신발을 신을 때 벽이 되어 주는 거리. 예린이 구두 굽을 꺾으며 말했다.
"오늘 잘했다는 말, 하지 마세요. 들으면 또 그 사람들이 와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할게요. 대신 하나만. 레드라고 한 거, 내가 기억할게요. 예린 씨는 그걸 기억하지 않아도 돼요."
예린은 그 문장을 들고 문을 나섰다. 복도 센서등이 켜졌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에 아직 자신의 맛 같은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입은 씻겨 있었다. 씻겨 있는데 옛 목소리는 귀에 남아 있었다.
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다가 예린은 멈춰 섰다. 손가락이 숫자 위에서 떨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고, 감싼 채로 문을 열었다. 어두운 집. 불을 켜지 않고 벽에 등을 기대며, 그녀는 도현의 빈 손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손. 그 손이 전 사람의 웃는 입보다 더 오래, 눈뒤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