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이름
예린은 모욕이 손보다 먼저 닿는 관계에 오래 있었다.
그 말은 언제나 짧았다. 창녀. 더러운 것. 네가 할 줄 아는 건 이것뿐이야. 거실 불을 끄지 않은 채로, 소파 팔걸이에 배를 걸친 채로, 혹은 현관에서 신발도 벗기 전에. 말이 몸을 열었다. 몸이 열리면 그다음이 왔다. 밀었다. 들어갔다. 빠르게 움직였다. 끝날 때까지 그 짧은 이름들이 귓바퀴를 스쳤고, 예린은 그 이름들 안에서만 자신이 선명해진다고 믿었다.
전 파트너는 나쁜 사람이라는 말로 정리되지 않았다. 합의는 있었다. 사전에 정한 단어도 있었다. 예린이 먼저 원했던 적도 있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 말들만이 남았다. 손길이 거칠어진 게 아니라, 손길이 말 뒤로 숨었다. 몸이 닿기 전에 이미 깎여 있었고, 깎인 자리에서만 젖었다.
관계가 끝난 날도 극적이지 않았다.
"이제 안 되겠다."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은 가을이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그녀는 마지막으로 기대한 문장이 하나 있었다. 네가 별로였다는 말. 쓸모없었다는 말. 그 말이 와야 몸이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문을 열고, 예린을 내보내고, 아무 이름도 붙여주지 않았다.
그 공백이 더 오래 남았다.
이후의 몇 달은 조용했다. 회사와 집. 주말의 세탁. 밤이면 예전의 말들이 허벅지 안쪽에서 먼저 깨어났다. 손가락을 넣으면 몸이 대답했지만, 머릿속의 문장은 늘 타인의 것이었다. 잘했다는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떠올려 본 적도 없었다.
도현을 만난 것은 지인의 소개였다. 카페가 아니라 메시지로 먼저 이야기가 오갔다. 한계, 단어, 원하지 않는 것. 예린은 익숙한 목록을 적어 보냈다. 모욕. 이름 부르기. 거칠게 다루는 말. 보낸 다음 화면을 내려보다가, 자신이 그 목록을 욕망처럼 적었는지 습관처럼 적었는지 구분하지 못했다.
답은 하루 뒤에 왔다.
"나는 그런 말을 쓰지 않습니다. 칭찬만 합니다. 그게 어려우실 수도 있어요. 만나서 이야기할까요."
예린은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칭찬만. 어려울 수도. 단정하지 않은 어미가 오히려 단호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문지르다, 결국 오케이라고 보냈다. 오케이 뒤에는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이유를 붙이면 자신이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첫 만남은 그의 아파트였다. 초저녁, 복도 센서등이 늦게 켜지는 오래된 주거동. 초인종 대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낮았다. 문이 열리자 도현은 예린보다 반 뼘 정도 컸고, 실내화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회색 니트.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은 팔. 예린이 코트를 벗는 동안 그는 현관 벽에 어깨를 기대고 그녀를 보았다. 훑는 시선이 아니었다.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예린 씨."
이름을 그렇게 부르니 낯설었다. 비하의 이름이 아니라, 그냥 이름이었다.
"들어오세요.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이야기만."
예린은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들었다. 거실 조명은 간접등이었고, 창밖 골목의 가로등이 커튼 사이로 얇게 들어왔다. 코트 냄새가 나지 않는 집. 책과 음식물 쓰레기와 세탁 세제가 섞이지 않은, 정돈된 공기.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에 그녀는 앉았고, 도현은 맞은편 낮은 의자에 앉았다. 같은 소파를 쓰지 않는 거리가 먼저 합의처럼 놓였다.
"물을 드릴까요."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이 거절이면 거절로 들을게요. 원하면 말해 주세요."
예린은 컵을 만지작거릴 자리를 잃었다. 목구멍이 근질거렸다. 전 관계에서는 거절도 말의 일부였다. 싫다는 말이 더 세게 다루어지는 신호이기도 했다. 도현의 목소리는 그 회로를 건드리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예린은 무릎을 모았다. 치마 밑단이 허벅지를 덮었다. 도현은 그 무릎을 보지 않았다. 얼굴을 보았다.
"적어 보내신 것들, 읽었습니다. 나는 모욕적인 단어를 쓰지 않아요. 못 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기로 한 겁니다. 예린 씨가 익숙한 방식이 아닐 수 있어요."
"그럼 뭘 하시는데요."
질문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날이 서야 자신이 안전해 보였다.
"잘했다고 말합니다. 예쁘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 모습이 좋다고 말합니다. 몸이 열리면 그걸 숨기지 않고 이릅니다. 그게 다예요."
예린은 웃고 말았다. 짧은, 설득되지 않은 웃음.
"그거 가지고 돼요?"
"될지는 예린 씨가 압니다. 나는 속도만 정합니다."
속도. 그 단어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전 파트너는 속도를 자신의 것으로만 썼다. 도현은 속도를 두 사람 사이에 올려놓는 사람처럼 말했다.
예린은 손가락으로 소파 천을 문질렀다. 실밥이 약간 일어나 있었다.
"칭찬이 뭐가 어려운데요."
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동안 예린의 귀는 예전의 문장들을 자동으로 재생했다. 입을 벌려. 더 깊게. 너는 이런 것만 잘해. 그 말들이 오면 몸은 길을 알았다. 칭찬은 길이 아니었다. 길이 없으면 어디에 무릎을 꿇어야 할지 몰랐다.
"어려운 사람은 있습니다."
도현이 마침내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고, 위로가 아니었다. 관찰이었다.
"특히 오랫동안 깎여서 열린 사람은. 칭찬이 들어오면 숨을 곳이 없어집니다. 모욕은 역할이 있거든요. 저 말이 나라고 숨을 수 있어요. 잘했다는 말은 그 역할을 벗깁니다. 알몸으로 남는 쪽이 예린 씨예요."
예린의 목 안이 건조해졌다. 그가 너무 정확히 말해서, 화가 났다. 화가 나는데 동시에, 그 정확함이 아랫배에서 천천히 열렸다. 원하지 않은 열림이었다. 그녀는 다리를 꼬았다. 치마 안에서 살갗이 맞닿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다음을 원하면 말해 주세요. 원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린은 일어서며 가방 끈을 쥐었다. 현관까지 가는 몇 걸음이 길었다. 신발을 신는데 도현이 뒤에서 말했다.
"오늘, 여기까지 온 거. 잘했어요."
예린의 손이 멈췄다.
신발끈을 묶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잠깐 멈췄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등 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명령의 억양도 없었다. 그런데 그 짧은 문장이 현관 바닥에 떨어져 예린의 발등을 적셨다. 귀가 아니라 발등부터.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신발을 신고,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야 숨을 쉬었다.
잘했어. 그 말은 아직 몸 안에 있었다. 모욕보다 얕게, 그러나 더 깊게. 예린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중얼거렸다. 혼잣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뭐야."
문이 열렸다. 내려가는 동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붉었다. 부끄러워서인지, 화가 나서인지, 그 한 마디가 명령보다 무거워서인지. 구분은 다음 주까지 미뤄졌다.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집에 들어와 불을 켜지 않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섰을 때, 예린은 자신의 속옷이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현은 만지지도 않았다. 잘했다는 말만 했다. 그런데 몸은, 오래 들어본 적 없는 그 문장 때문에, 이미 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