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자리
월요일 오전 아홉 시 십오 분. 나연은 회의실 창가에 앉아 있다. 노트북이 열려 있고, 커서가 조항 한가운데에서 깜박인다. 깜박임을 보지 않는다. 보고 있는 것은 창 너머 건물 유리에 비친 자기 목이다. 아무것도 없다. 없는 자리를 손가락이 먼저 찾는다. 찾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린다.
"나연 변호사."
이름이 한 번 불린다. 나연은 듣는다. 듣고도 입이 바로 열리지 않는다. 반 박자. 그 반 박자 안에 금요일 식탁이 들어 있다. 원해, 라고 했던 입. 월요일의 나도 말해, 라고 했던 남자. 그 입이 지금 이 이름에 붙어 있어야 한다.
"네. 삼 조입니다. 수정본 반영했습니다."
문장은 정확하다. 정확한데 늦다. 늦은 것을 이 방의 사람들은 아직 문장의 무게로 듣는다. 민우만 보지 않는다. 민우는 듣는다.
회의가 파하면 복도가 좁다. 민우가 나연의 옆을 맞춘다. 커피는 내밀지 않는다. 오늘은 손이 비어 있다.
"너 방금."
"뭐."
"이름. 반 박자 늦었어. 너 안 늦는 사람이거든."
나연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누른 손가락이 목 앞으로 올라가려 한다. 손가락을 주먹으로 접는다.
"주말 길었어. 잔 거."
"한남동."
민우가 그 세 글자를 이름으로 쓰지 않는다. 쓰지 않는 것이 오 년의 매너다. 나연은 그 매너를 지금은 고맙게 받지 못한다. 받으면 울 자리가 생긴다. 월요일 복도에는 울 자리가 없다.
"그래. 한남동."
민우가 눈을 가늘게 뜬다. 가늘게 뜨고 더 묻지 않는다. 더 묻지 않는 입이 동기라는 말의 전부다. 엘리베이터가 열린다. 나연이 탄다. 민우는 다음 것을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것이 오늘은 자비처럼 보인다.
오후, 나연은 자기 방에서 문을 닫는다. 계약서 세 건. 모두 해지 조항이 있다. 당사자는 상호 합의에 따라. 어느 일방의 통지로. 즉시 효력을 상실한다. 그녀는 이 문장들을 고친다. 고치는 손이 능숙하다. 능숙한 손이 자기 목을 한 번 쓸고 키보드로 돌아온다.
원해. 금요일에 그 두 글자를 떨어뜨렸다. 떨어뜨린 사람은 목줄이 있는 나연이었다. 목줄이 있는 나연의 원함은 증거가 되지 않는다. 강우가 그렇게 말했다. 월요일 나연이 다시 말하게 해. 그 문장이 하루 종일 커서를 따라다닌다.
원하는가. 원한다. 무서운가. 무섭다. 두 개가 싸우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 앉는다. 같은 자리에 앉은 것들이 목을 무겁게 한다. 목줄이 없는데 무겁다. 없는 무게가 있는 무게보다 크다.
여섯 시 사십 분, 나연은 합정에서 내린다. 오피스텔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이 한남동의 손을 흉내 낸다. 흉내를 알아채고 숫자를 다시 누른다. 자기 집의 숫자로.
문을 열면 공기가 얇다. 한남동의 난방은 정확했고, 이곳의 난방은 그녀가 조절한다. 조절하는 손이 있다는 것이 오늘은 증거가 되어야 한다. 그녀는 모든 불을 켠다. 거실, 주방, 화장실, 침대 머리. 큰 불. 화요일의 의식인데 월요일이 빌려 간다. 빌려 가는 이유가 같다. 나연이라는 사람이 아직 여기에 있다는 것. 스물넷 곱하기 일곱을 받기 전에, 받을 사람이 남아 있어야 한다.
텔레비전을 켠다. 소리는 크게. 배달 앱을 연다. 주문자 이름. 나연. 두 글자. 냉면, 곱배기, 진동. 겨울이 지나도 냉면인 입이 자기 입이다. 자기 입을 확인하려고 시킨 음식이다.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소파에 앉지 않는다. 서서 목을 만진다. 만지는 버릇이 월요일에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알면서 만진다. 만지는 손가락 밑에 금요일이 남아 있다. 버클의 작은 소리. 내 것, 이라는 두 글자. 네, 주인님. 그 네 글자가 월요일의 목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음식이 온다. 나연은 자기 이름으로 서명한다. 서명이 변호사 도장처럼 찍힌다. 식탁에 앉는다. 면을 풀고, 식초를 넣고, 고명을 한쪽으로 민다. 미는 순서가 오 년 동안 같다. 같은 순서가 나연이다. 한남동에서는 그가 먹인다. 여기서는 그녀가 먹는다. 먹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면이 차갑게 알려 준다.
한 젓가락. 두 젓가락. 맛이 있다. 있는 맛이 오늘은 과하다. 과한 맛 위로 금요일의 식탁이 겹친다. 주말이 모자라. 네가 여기 살고. 목줄이 훅에서 내려와 네 목에 있고. 월요일이 일요일의 다음이 되는 것. 그 문장들이 냉면 국물에 풀린다.
몸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허벅지가 붙는다. 무릎이 모인다. 모이는 것이 수치다. 혼자의 식탁에서 무릎이 모이는 수치. 그 수치가 원함의 다른 이름이다. 머리는 아직 조항을 찾는다. 남는 자리. 전부 주면 무엇이 남느냐. 남는 것이 없으면 소유할 대상도 없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 빈 집은 이미 있어. 일요일 밤마다.
나연은 면을 더 넘긴다. 넘기는 일이 월요일의 노동이다. 텔레비전 소리가 웃음을 낸다. 웃음이 이 집에 닿지 않는다. 닿지 않는 소리를 일부러 켜 둔다. 켜 두는 것이 고립을 막는 서툰 방법이다.
열 시. 그릇을 씻는다. 불을 끄지 않는다. 큰 불이 켜진 채로 침대에 앉는다. 휴대폰을 연다. 강우. 주중 문자는 드물다. 오 년의 규칙. 오늘은 규칙의 밖에 앉아 있다. 밖에 앉아 규칙을 움직이려 한다.
입력창에 커서가 뜬다. 나연은 오래 그 빈칸을 본다. 빈칸이 식탁의 빈 노트와 닮았다. 쓰면 제안이 된다. 금요일의 그는 그래서 미리 쓰지 않았다. 월요일의 그녀는 써야 한다. 쓰라고 한 사람이 그다.
월요일의 나도 원해.
일곱 글자가 아니다. 더 길다. 길고 짧은 문장 사이에서 그녀는 지운다. 지우고 다시 쓴다. 원해요, 를 원해, 로 고친다. 주중의 반말. 목줄 없는 입. 그 입으로 말해야 증거가 된다.
금요일의 원함은 몸이 먼저 대답한 것이었다. 무릎이 모이고, 안쪽이 뜨거워지고, 목이 버클을 기다렸다. 오늘의 원함은 냉면을 자기 이름으로 시킨 사람의 것이다. 불을 다 켠 사람의 것이다. 이름에 반 박자 늦은 사람의 것이다. 늦은 사람이 원한다고 하면, 그 원함은 무릎의 원함과 겹치되 무릎만은 아니다.
나연은 화면을 가까이 가져간다. 가져가도 글자는 늘지 않는다. 월요일의 나도 원해. 그 한 줄 뒤에 무서운 채로, 를 붙였다가 지운다. 무섭다는 말은 금요일에 이미 했다. 오늘은 원함만 보낸다. 원함만 보내는 것이 정직하다. 무서움을 같이 실으면 그가 무게를 덜어 주려 할 것이다. 덜어 주는 것은 월요일의 일이 아니다.
열한 시 십칠 분. 엄지가 전송 위에 머문다. 머무는 시간이 길다. 긴 시간이 이 하루의 결정이다. 보내면 수요일의 식탁이 열린다. 식탁이 열리면 조항이 시작된다. 조항이 시작되면 오 년의 선이 정말로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은 척할 수 있는 마지막 몇 초.
나연은 목을 한 번 더 만진다. 없는 가죽. 없는 은 고리. 없는 것이 보내는 손을 눌러 준다.
보낸다.
화면이 위로 밀린다. 밀린 문장이 그의 쪽으로 간다. 합정에서 한남까지. 지하철 두 개와 버스 하나가 필요 없는 거리. 나연은 휴대폰을 뒤집는다. 뒤집어도 불이 크다. 큰 불 아래에서 자기 이름이 아직 배달 앱 주문 내역에 남아 있다. 나연. 두 글자. 보낸 문장 속의 나도 그 두 글자다.
답이 오는 데는 사 분이 걸린다. 강우의 문장은 짧다. 짧아서 그의 것이다.
수요일. 일곱 시. 식탁. 목줄은 훅에.
나연은 그 네 토막을 읽는다. 목줄은 훅에. 그 다섯 글자가 안도다. 안도인 동시에 기다림이다. 수요일의 눈은 같은 높이에 있을 것이다. 같은 높이에서 남는 자리를 셈해야 한다. 셈하는 사람이 변호사다. 변호사가 남아 있어야 전부를 줄 수 있다. 그 역설을 나연은 큰 불 아래에서 삼킨다.
삼킨 뒤에 냉면 그릇의 물이 싱크대에서 아직 흐린 것을 본다. 흐린 물이 월요일의 증거로 남아 있다. 증거는 맛과 불과 이름이다. 이름은 보냈고, 불은 켜져 있고, 맛은 이미 지나갔다. 지나간 맛 위에 수요일의 식탁이 미리 놓인다. 미리 놓인 식탁이 현관 타일과 겹치지 않기를, 그녀는 잠시 빈다. 겹치면 결정이 무릎의 것이 된다. 무릎의 결정을 그는 받지 않기로 했다. 받지 않기로 한 사람이 목줄을 훅에 남겨 두라고 했다. 남겨 둔 훅이 한남동에 있고, 남겨 둔 불이 합정에 있다. 두 개의 남김이 오 년의 선 위에 수요일을 연다.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텔레비전을 끈다. 불은 남긴다. 남긴 불이 합정의 남은 자리다. 나연은 그 불 옆에서 눈을 감는다. 감은 눈 뒤로 현관 타일이 보인다. 타일 위의 무릎이 월요일에도 남아 있다. 남아 있는 무릎을 밀어내지 않는다. 밀어내지 않은 채로 그녀는 월요일의 나연으로 잠든다.
잠들기 직전, 민우가 복도에서 남겨 둔 문장이 한 번 더 온다. 너 안 늦는 사람이거든. 나연은 그 문장을 부정하지 않는다. 늦은 것이 맞다. 늦은 자리에 원함이 앉아 있다. 원함이 앉은 자리가 오늘 그녀가 지킨 유일한 남은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