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의 잔
둘레길은 우천에도 열렸으나, 모임은 결국 취소되었다. 총무의 문자는 정오 직전이었다. '고령 회원 무릎 고려하여 다음 주로.' 남우는 이미 배낭을 메고 현관에 서 있었다. 미경의 메시지는 그 문자보다 오 분 늦게 왔다.
'나오셨어요?'
'현관입니다.'
'저도요. 양재 홈플러스 앞인데, 산은 글렀네요.'
커서가 잠시 멈췄다. 남우는 신발 끈을 묶은 채로 화면을 보았다. 예순둘의 남자가 현관에서 할 수 있는 용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쳤다.
'커피라도.'
'어디요.'
'과천 쪽, 조용한 데 있습니다. 비 그치면 산책도 되고.'
오 분 뒤 미경은 '가는 길'이라고만 보냈다. 남우는 배낭을 내려놓고 겉옷만 갈아입었다. 등산복 바지는 그대로였다. 무늬 없는 회색. 거울 속의 얼굴은 산보다 실내에 더 어색했다.
카페는 과천 서울대공원을 조금 못 미친, 오래된 2층이었다. 창이 컸고, 비 그친 뒤의 빛이 탁자를 희미하게 적셨다. 미경은 모자 없이 왔다. 머리가 짧았다. 귀밑에서 멈추는 길이, 정돈된 사람의 길이였다. 남우는 주문을 받으러 온 직원에게 아메리카노 둘이라고 했다가, 미경의 얼굴을 보고 하나를 빼었다.
"저는 따뜻한 유자차요."
"유자차로."
두 사람은 창가에 앉았다. 유리 너머로 젖은 은행나무가 아직 새잎만 달고 있었다. 미경이 컵을 감쌌다. 손등의 힘줄이 따뜻함에 조금 느슨해 보였다.
"모임 취소될 줄 알고도 나오셨네요."
"배낭까지 맸습니다."
"저도요. 김밥도 싸고."
미경이 에코백에서 은박지 두 개를 꺼냈다. 단무지 김밥이었다. 남우는 웃었다. 웃음이 목까지 올라오는 것이 오래간만이라, 그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미경이 그 손을 보았다. 반지 없는 손가락.
"남우 씨, 여쭤봐도 돼요? 너무 빠르면 말해요."
"괜찮습니다."
"혼자 오시잖아요. 산에도, 오늘도."
남우는 유자차의 김이 아닌 자신의 잔을 내려다보았다. 아메리카노는 이미 식고 있었다.
"이혼한 지 사 년입니다. 딸은 인천에 있고요. 결혼했습니다. 손주도 하나."
"저는 삼 년. 아들은 분당. 아직 미혼이에요. 가끔 전화가 와요. 밥 먹었냐고."
두 사람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실패의 목록을 펼치지 않았다. 남우의 결혼은 긴 침묵으로 끝났고, 미경의 결혼은 짧은 불성실로 끝났다. 그 문장들을 산 아래 카페에서 다 꺼낼 필요는 없었다. 늦은 봄의 빛은 그런 이야기를 길게 버티지 못했다.
김밥을 나눠 먹었다. 단무지가 아삭했다. 미경이 말했다.
"김밥 싸는 손이 오래간만이라 속이 좀 헤졌어요."
"맛있습니다."
정말로 맛있었다. 남우는 회사 다니던 삼십 년 동안 도시락을 열어 본 적이 드물었다. 아내가 싸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가 일찍 나와 구내식당을 썼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지금에야 이상하게 슬펐다. 슬픔은 곧 지나갔다. 미경이 귤 껍질을 손톱으로 벗기는 소리가 더 분명했다.
비가 완전히 그친 뒤, 그들은 대공원 담장을 따라 걸었다. 연인들의 길이 아니었다. 자전거가 지나고, 유모차가 지나고, 중년의 개 산책이 지나갔다. 남우의 어깨와 미경의 어깨는 한 뼘이 조금 안 되게 떨어져 있었다. 그 간격이 산에서보다 좁았다.
"집, 가까우시죠."
미경의 말이었다. 질문이면서 질문이 아니었다. 남우는 삼 초를 세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보로 십오 분입니다. 차 마시겠습니까. 보리차입니다. 유자는 없고요."
"보리차 좋아요."
과천의 아파트는 오래된 편이었다. 현관에 등산화가 두 켤레, 우산 세 개, 물통이 싱크대에 엎어져 있었다. 남우는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미경의 구두를 위한 슬리퍼를 꺼냈다. 새것이었다. 손님이 없던 집의 새 슬리퍼는 그 자체로 조금 부끄러웠다.
거실 창으로 청계산이 보였다. 어제의 능선, 오늘의 구름. 미경이 창가에 서서 말했다.
"여기서 그 산이 보이네요. 이상하다. 걸어온 산이 이렇게 작아 보이고."
남우는 보리차를 끓이며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흰 셔츠, 등산 바지가 아닌 베이지색 면바지. 허리의 선이 단정했다. 단정함 아래로 나이가 보였다. 나이는 숨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물 끓는 소리를 핑계로 시선을 내렸다.
차를 마시는 동안 말은 더 줄었다. 미경이 컵을 내려놓으며 남우를 보았다. 그 눈이 피하지 않았다.
"남우 씨."
"네."
"오늘, 이 이상 가면 돌아갈 때 조금 어색할 거예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남우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미경의 손등이 먼저 그의 손바닥에 닿았다. 차가웠다. 곧 따뜻해졌다. 두 사람은 소파가 아닌 창과 소파 사이의 짧은 거리에서 서로를 당겼다. 키스는 서툴렀다. 이가 부딪쳤다. 미경이 코로 숨을 내쉬며 웃었고, 그 웃음 위로 남우의 입술이 다시 갔다. 두 번째가 더 깊었다. 그녀의 입안에서 유자와 단무지의 끝이 남아 있었다.
침실로 가는 길은 짧았으나 신중했다. 남우는 커튼을 반만 내렸다. 늦은 오후빛이 이불 모서리를 남겼다. 미경이 셔츠 단추를 스스로 풀었다. 서두르지 않았다. 브라의 등 뒤에서 남우의 손가락이 한동안 헤맸다. 후크가 두 개였다. 풀리자 그녀의 가슴이 천 없이 그의 손 안에 들어왔다.
오십팔의 가슴은 탄력이 아닌 무게로 와 닿았다. 남우는 그 무게를 공손히, 그러나 분명히 감쌌다. 유두가 손바닥 안에서 천천히 굳었다. 미경의 숨이 짧아졌다. 그가 입을 가져가자 그녀가 그의 머리를 안았다. 짧아진 머리칼 사이로 그의 귀가 그녀의 심장에 닿았다.
"이상하죠. 이런 거."
미경의 목소리였다. 남우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지 않았다. 오래 잊고 있던 것이 다시 몸을 찾는 일에 가까웠다. 그는 그녀의 바지를 내렸다. 면 속옷, 베이지. 그 아래의 살이 허벅지 안쪽에서 부드럽게 겹쳤다. 남우는 그 겹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손으로 쓸고, 무릎을 꿇고, 입술을 가져갔다.
미경이 낮게 신음했다. 음모는 희끗했고, 그 아래로 이미 젖어 있었다. 남우의 혀가 주름을 벌리자 그녀의 손이 시트를 쥐었다. 음핵은 작았고, 오래 자극받지 않은 사람의 더딤이 있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혀의 넓이와 손가락 하나로, 그녀의 숨이 바뀔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미경의 허리가 떠올랐다. 나이가 만든 느림 안에서, 절정은 갑자기가 아니라 물이 넘치듯 왔다. 그녀는 소리를 삼키려다 삼키지 못했다. 남우의 이름도 아닌, 짧은 모음만이 방 안에 남았다.
남우는 일어나 자신의 옷을 벗었다. 배가 나왔다. 가슴털이 희었다. 발기는 있었으나 젊은 날의 그것이 아니었다. 단단하되 급하지 않았다. 미경이 손을 뻗어 그를 쥐었다. 손바닥의 온기가 귀두까지 올라왔다. 그녀가 그를 입 쪽으로 끌어당겼다. 혀가 밑면을 훑었다. 남우는 눈을 감았다. 삼십 년 만에 다른 사람의 입이 그 자리를 감싸는 감각은, 산에서의 팔꿈치보다 무거웠다.
콘돔을 찾는 동안 두 사람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서랍 깊숙한 곳에서 새 상자가 나왔다. 남우가 혼자 사 둔 것이었다. 언제 쓸지 모르고 사 둔 물건이 오늘, 그녀의 앞에서 뜯어졌다. 미경이 그를 침대 쪽으로 당겨 눕히고, 스스로 올라탔다. 삽입은 느렸다. 건조한 듯하다 이내 열렸다. 그녀가 허리를 천천히 내리자 남우의 것이 끝까지 들어갔다. 두 사람이 동시에 숨을 참았다.
미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지 않았다. 가슴이 흔들렸고, 남우의 손이 그 흔들림을 받아 올렸다. 유두를 손가락으로 집자 그녀의 안이 조여 왔다. 남우는 허리를 밀어 올렸다. 각도가 바뀔 때마다 미경의 눈이 감겼다. 이불 밖에서 그녀의 등허리가 땀으로 빛났다. 점무늬 같은 기미, 수술 자국 없는 부드러운 배. 남우는 그 배를 쓰다듬으며 더 깊이 넣었다.
"남우 씨, 거기..."
그녀는 끝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이미 알고 그곳을 반복해 밀었다. 두 번째 절정이 그녀에게 왔다. 안이 리드미컬하게 수축했다. 남우는 그 수축 안에서 자신의 것을 참으려다, 그녀가 몸을 숙여 그의 입술을 물자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사정은 길었다. 콘돔 안으로 풀리는 감각이 부끄러울 만큼 선명했다. 그는 신음 대신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붙였다.
그 후로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창밖의 산이 구름 뒤로 들어갔다 나왔다. 미경이 그의 가슴털을 손가락으로 정리하듯 쓸었다.
"처음이에요. 그 사람 말고."
"저도입니다. 사 년, 그보다 더. 사실 결혼 후반에는..."
남우가 말을 흐렸다. 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것은 이미 이해한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그의 팔 안에서 숨을 고르고, 나중 에 말했다.
"어색할 줄 알았는데, 어색한 건 이불 색깔이네요. 너무 회색이야."
남우가 웃었다. 이번엔 입을 가리지 않았다. 미경이 그 웃는 입에 다시 입을 맞췄다. 키스는 전보다 느렸고, 더 젖어 있었다. 바깥에서 빗방울이 다시 시작되는지, 아니면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잔비인지, 창틀이 가늘게 소리 냈다.
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가만히 쥐어 보았다. 맥박이 손바닥에 닿았다. 산에서는 팔꿈치였고, 집에서는 손목이었다. 그 차이가 오늘 하루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미경은 저녁이 되기 전에 일어났다. 샤워를 하고, 베이지 바지를 입고, 짧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넘겼다. 남우가 현관까지 나왔다. 그녀가 슬리퍼를 벗으며 말했다.
"다음 주, 산 가요. 비 안 오면."
"비 와도 둘레길은 괜찮지 않을까요. 천천히 걸으면."
미경이 그를 보았다. 단톡에 남겼던 그녀의 문장을 그가 그대로 돌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신발을 신고, 현관 등 아래에서 그의 볼에 입술을 짧게 붙였다.
"물통, 채워 두세요."
문이 닫힌 뒤, 남우는 창가에 남아 그녀의 아반떼가 단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불은 아직 흐트러져 있었고, 보리차 컵은 두 개였다. 그는 컵을 씻지 않고 싱크대에 나란히 두었다.
늦은 봄의 잔비 소리가, 빈 집이 아닌 집이 된 거실을 천천히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