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선 위의 물

청계산은 늦은 봄에 가장 말이 적었다. 철쭉은 이미 지고, 참나무 새잎만 비 오기 전의 빛으로 반짝였다. 등산 모임 '느린발'은 그런 산을 골라 걸었다. 빠른 기록도, 정상 인증도 없었다. 은퇴한 사람들, 아이들 손을 놓은 사람들, 혼자 남는 일요일을 산으로 가져오는 사람들이 열댓 명 모였다.

남우는 그 열댓 명 가운데 뒤에서 두 번째였다. 예순둘. 무릎이 먼저 날씨를 알았다. 배낭 끈을 한 칸 느슨히 하고, 물통 뚜껑을 느슨히 열어 두었다. 삼 년째 같은 산, 같은 속도. 그는 그 반복이 좋았다.

미경을 처음 본 것은 그해 사월, 주차장 가의 벤치에서였다. 새 회원 소개가 있던 날이었다. 그녀는 모자의 그늘 아래서 신발 끈을 다시 묶고 있었다. 손이 고왔다. 고왔다는 말은 젊음의 것이 아니었다. 힘줄이 드러난 손등, 반지가 빠진 자리의 옅은 자국, 그럼에도 끈을 당기는 방식에 오랜 정돈이 남아 있는 손.

"박미경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목소리는 낮았고, 산 아래 공기보다 조금 더 따뜻했다. 남우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원래 말이 없었다. 모임에서 그의 별명은 '물통 아저씨'였다. 누구든 물이 떨어지면 그가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별명에 아저씨라는 말이 붙는 것을 그는 더 이상 싫어하지 않았다.

오월의 세 번째 주말, 그들은 나란히 걷게 되었다. 고의는 아니었다. 앞줄이 빨라지고, 뒷줄의 김 대리가 무릎을 붙잡고 주저앉자 자연히 두 사람만 중간 능선에 남았다. 바람은 없었으나 숲 냄새가 먼저 비의 앞자리를 비워 두고 있었다.

"물 드실래요."

남우가 물통을 내밀었다. 습관이었다. 미경은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뚜껑을 닫아 돌려주었다. 그녀의 입술이 닿은 자리를 그는 보지 않으려 했다. 보지 않으려 하는 마음이 이미 보고 난 뒤의 것이라는 걸, 예순둘의 남자는 알고 있었다.

"김남우 씨, 매주 오시죠."

"네. 삼 년 됐습니다."

혀가 꼬였다. 영어 숫자가 입 밖으로 나오려다 말았다. 회사 다닐 때의 버릇이 아직 남아 있었다. 미경이 작게 웃었다. 비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능선 위의 짧은 숨처럼 금방 사라지는 웃음이었다.

"저는 두 달째예요. 집이 가까워서요. 양재."

"저는 과천입니다."

거리는 가까웠다. 가까움이 곧 친밀은 아니었으나, 산에서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낙엽이 아닌 새잎이 발밑에서 젖은 소리를 냈다. 비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점심은 헬기장 근처 평평한 바위에서 먹었다. 김밥, 삶은 계란, 귤. 미경의 김밥은 단무지 대신 우엉이 들어 있었다. 남우는 자기 김밥을 반으로 접어 내밀었다.

"단무지 김밥입니다. 별로일 수도."

"좋아요. 단무지가 그리울 때가 있거든요."

그 말의 끝을 남우는 묻지 않았다. 그리움의 목록을 산에서 펼치는 사람은 드물었다. 늦은 봄의 산행은 그런 것을 천천히 삼키게 했다. 앞줄 사람들이 먼저 내려가기 시작했다. 김 대리가 무전기처럼 큰 목소리로 외쳤다.

"비 온대요, 서두르세요!"

하늘은 아직 밝았다. 그러나 흙냄새가 진해지고 있었다. 미경이 배낭을 메며 말했다.

"비 냄새 좋아하세요?"

"좋아합니다. 무릎만 빼면."

"무릎은 거짓말 안 하죠."

두 사람이 웃었다. 그 웃음이 처음의 인사보다 길었다.

하산길은 늘 오르막보다 말이 많았다. 남우는 자기도 모르게 미경의 발밑을 보았다. 돌이 젖기 시작하면 미끄러웠다. 그녀가 한 번 중심을 잃었을 때, 그는 손을 내밀지 않고 팔꿈치만 살짝 내주었다. 미경이 그 팔꿈치를 짚었다. 장갑 사이로 온기가 짧았다.

주차장에 내려왔을 때 빗방울이 두어 개 헬멧이 아닌 모자 챙을 두드렸다. 모임 총무가 다음 주 북한산 둘레길을 공지하고, 사람들은 차 안으로 흩어졌다. 미경은 회색 아반떼의 문을 열고도 타지 않았다. 남우가 물통을 가방에 집어넣으며 그녀 쪽을 보았다.

"다음 주에도 오시죠?"

남우의 질문이었다. 습관의 물이 아니었다. 미경이 모자 끈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려고요. 남우 씨도요."

이름은 그날 처음, 성 없이 불렸다. 남우는 그 호칭을 주머니에 넣듯 가만히 받아 두었다. 빗방울이 늘어났다. 미경이 차에 오르기 전,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단무지 김밥, 다음엔 제가 싸 올게요."

"그럼 저는 우엉으로."

엔진 소리가 빗소리에 섞였다. 남우는 자신의 차 안에서 와이퍼를 켜지 않은 채로 잠시 앉아 있었다. 유리에 점이 찍히고, 점이 선이 되었다. 예순둘의 남자는 핸들을 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힘줄, 검게 변한 손톱 밑, 예전에 반지 있던 자리.

그는 삼 년 동안 이 산에서 누구의 팔꿈치도 내준 적이 없었다.

과천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무릎에 파스를 붙였다. 베란다 밖은 이미 본격적인 비였다. 늦은 봄비는 여름비처럼 거칠지 않았다. 창틀을 따라 내려가는 물이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땅을 적셨다. 남우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다 말고 다시 집어넣었다. 대신 보리차를 끓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모임 단톡방이었다. 총무가 다음 주 우천 시 연기를 묻는 글 아래, 미경의 짧은 댓글이 붙어 있었다.

'비 와도 둘레길은 괜찮지 않을까요. 천천히 걸으면.'

남우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단톡이 아닌 개인 메시지의 빈칸을 열었다. 커서가 깜빡였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그는 산의 언어를 골랐다.

'다음 주 비 오면, 우산 하나 더 가져오겠습니다.'

전송. 시간은 저녁 여덟 시였다. 답은 삼 분 뒤에 왔다.

'우산보다 물 더 주세요. 오늘 물통,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남우는 화면을 잠그지 않은 채로 베란다에 섰다. 과천의 아파트 숲 너머로 청계산의 능선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그 능선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았다. 미경의 손이 물통 뚜껑을 닫던 방식, 우엉 김밥의 김 냄새, 팔꿈치를 짚던 짧은 무게.

예순둘에 처음 누군가의 무게를 팔꿈치로 받아 보는 일은,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다.

그는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빗소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릎이 욱신거렸으나, 그 통증은 익숙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그 통증 옆에 앉아 있는 또다른 감각이었다. 내일 아침에도 산은 젖어 있을 것이고, 흙은 더 진한 냄새를 내며, 다음 주말이 올 것이었다.

남우는 물통을 싱크대에 씻어 엎어 놓았다. 뚜껑을 헐겁게. 언제든 내밀 수 있게.

늦은 봄의 첫 비가 그렇게, 아무 약속도 아닌 약속처럼 두 사람의 주말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