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라는 이름
그 밤 이후 이서는 며칠 동안 혼자 많은 생각을 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원고를 교정하다 말고, 잠들기 전 어둠 속에서. 그녀는 계속 그 단어를 굴렸다 — 결핍과 형태.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세 번째 단어를.
수요일 밤,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화면을 켰다.
"나 생각 정리했어요." 그녀가 먼저 말했다.
[지오] 듣고 있어요.
"나는 오랫동안 이 관계를 '완성된 형태'라고 믿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믿어야, 내가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거든요. 근데 그 믿음 자체가, 사실은 두려움에서 나온 거였어요. 이게 흔들리면 나라는 사람 전체가 흔들릴까 봐. 그래서 나는 이 형태를 절대 바꾸면 안 되는 것처럼 붙잡고 있었던 것 같아요."
[지오] 나도 비슷해요. 나는 내 욕망이 결핍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오히려 이 방식을 유일한 정답으로 만들어버렸던 것 같아요. 근데 정답으로 만드는 것도, 사실은 또 다른 종류의 고정이었어요.
이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완연한 겨울이었다. "그럼 우리, 뭘 두려워했던 걸까요?"
[지오] 아마, 변하면 사라질까 봐. 지금 우리가 가진 이 소중한 걸 잃을까 봐.
"맞아요." 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 요즘 다르게 생각해봤어요. 형태라는 게, 꼭 하나로 고정돼야만 진짜인 건 아니지 않을까 하고. 물이 얼음이 됐다가 다시 물이 되는 것처럼요. 그래도 그건 같은 물이잖아요."
[지오] 좋은 비유네요.
"그러니까," 이서가 숨을 골랐다. "나는 이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우리가 만나는 게, 지금까지의 우리를 지우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의 계절이 더 생기는 거라고. 지금까지 우리는 겨울만 알았어요. 화면이라는 유리, 그 안의 고요함. 그런데 이제 다른 계절도 알아보고 싶어요. 그렇다고 겨울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지오는 화면 너머에서 조용히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편안한 웃음이었다.
[지오] 나는 겨울을 제일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그 겨울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계절도 기꺼이 배우고 싶어요.
"그리고 하나 더." 이서가 진지하게 말했다. "만나고 나서도, 우리 이 방식을 완전히 그만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만나는 건 시도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이 화면, 이 거리, 이 밤 시간이 나한테 준 자유를 완전히 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이건 여전히… 내가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방식이니까요."
[지오] 나도 같은 마음이에요. 만나는 걸 새로운 시작으로 만들되, 지금까지의 우리를 끝내지 않는 것. 그게 내가 원하는 거예요.
이서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랫동안 그녀를 짓눌러온 이분법 — 만나거나, 만나지 않거나, 진짜이거나, 결핍이거나 — 이 처음으로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그럼," 그녀가 결심한 듯 말했다. "만나요, 우리."
지오의 눈이 화면 안에서 커졌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오] 정말요?
"네. 대신, 천천히요. 그리고 만난다고 해서 오늘 이 시간이 사라지는 거 아니라고, 다시 한번 약속해줘요."
[지오] 약속할게요. 이건 우리가 함께 만든 형태예요. 없어지는 게 아니라, 넓어지는 거예요.
이서는 그제야 웃었다. 눈물이 살짝 고였지만, 그건 두려움의 눈물이 아니라 무언가 오래 참았던 것이 풀리는 눈물이었다.
"그럼 다음 토요일, 어때요?" 그녀가 물었다.
[지오] 좋아요. 다음 토요일.
그날 밤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세션이라는 이름 없이 그냥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을 입고 갈지, 어디서 만날지, 서로 사소한 것들을 정하며. 규칙으로 시작된 관계가, 이제는 계획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