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라고 말하면 — 마지막 밤 앞에서
오후 늦게 발전기가 완전히 안정되면서 산장에 불이 다시 들어왔다. 냉장고가 웅웅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고, 보일러가 다시 방 안을 데웠다. 사흘째 되는 날의 저녁이 그렇게 시작됐다.
강현은 저녁 준비를 하는 대신, 거실 소파에 한나와 마주 앉았다. 벽난로에는 여전히 불이 타고 있었지만, 오늘은 장식적인 온기일 뿐이었다. 전기가 돌아온 방 안은 어젯밤과는 완전히 다른 공기였다.
"오늘 아침에 네가 한 말, 계속 생각했어." 강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역할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완전히 강현 그 자체의 목소리였다. "역할이 그렇게 쉽게 벗어질 수 있었던 거, 그게 가짜였다는 뜻인지."
한나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해." 그가 이어갔다. "우리가 정전됐을 때 바로 역할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건, 그 역할이 가짜였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둘 다 진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만약 그게 연기였다면,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못 벗어났을 거야. 연기는 각본이 있어야 계속되니까. 근데 우리는 각본이 필요 없는 상황이 오자마자 서로를 알아본 거잖아."
한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생각해봐." 강현이 계속했다. "네가 눈 뜨러 같이 나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 판단을 존중했어. 지시가 아니라 존중.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사흘 동안 내가 너의 결정권을 쥐고 있으면서도 그 밑에 항상 너라는 사람의 판단력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야. TPE는 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네가 나를 통해서만 움직이기로 선택하는 거잖아. 어젯밤엔 그 선택을 잠깐 다르게 한 것뿐이고."
한나는 그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맞는 말 같았지만,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무언가가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근데 그럼,"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우리는 매년 이걸 하는 거예요? 어젯밤 담요 아래서 느낀 그 친밀함이 그렇게 좋았다면, 왜 굳이 목줄을 채우고 규칙을 만들고, 그 안에 갇혀야 해요?"
이 질문이 지금 대화의 핵심이었다. 강현도 그걸 알았다. 그는 잠시 벽난로의 불꽃을 바라보다가 다시 그녀를 봤다.
"평소의 우리도, 어젯밤의 우리도, 세션 안의 우리도 다 진짜야. 근데 세션은... 그중에서 우리가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들어가는 진짜야. 일상에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밀도. 결정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도, 완전히 책임지는 것도, 그건 위기가 강제로 준 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믿어서 선택한 거잖아."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젯밤은 위기가 우리한테 강요한 동등함이었어. 세션은 우리가 서로한테 선물하는 불균형이고. 둘 다 필요해. 근데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가짜로 만드는 건 아니야."
한나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뭔가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는 아니었다.
"오늘 밤은 마지막 밤이야." 강현이 말했다. 이제 그의 목소리에 확인의 어조가 섞였다. "다시 시작할까? 목줄, 규칙, 전부. 원래대로."
그가 묻는 방식은 사흘 전 첫날 밤의 방식과 같았다. 질문이자 확인. 하지만 이번엔 무게가 완전히 달랐다. 이건 단순히 '오늘 밤도 할까'가 아니었다. 어젯밤의 그 진짜 같았던 동등함을 뒤로하고, 다시 불균형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인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한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창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고, 다시 들어온 전깃불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얇은 가죽 밴드를 손끝으로 만지며, 오랫동안 침묵했다.
"생각할 시간 좀 주세요."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얼마든지." 강현이 답했다. 그의 눈빛에는 재촉이 없었다. 그저 기다림뿐이었다.
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눈 덮인 마당이 달빛 아래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사흘 동안 있었던 모든 순간들을 하나씩 되짚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