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현의 침묵
그 일요일 이후로 규현은 평소보다 말이 없어졌다. 겉으로는 똑같았다. 퇴근하면 넥타이를 풀고, 하영이 무릎을 꿇으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규칙을 어기면 어김없이 벌을 내렸다. 하지만 하영은 알았다. 그의 손길에 미세하게 힘이 더 들어가 있다는 걸. 평소보다 벌이 조금 더 길어지고, 다정한 말수가 줄었다는 걸.
수요일 저녁, 하영이 물을 따라주다가 손이 미끄러져 컵을 놓쳤다. 물이 바닥에 쏟아지고, 그녀가 서둘러 사과했다.
"미안해, 바로 닦을게—"
"됐어. 나중에."
규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딱딱했다. 하영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 다른 걸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자기, 요즘 좀 이상해."
"아니야. 그냥 피곤해서."
"거짓말. 나 자기 표정 다 읽는단 말이야."
규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소파에 앉아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하영이 조심스럽게 옆에 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지난 일요일 때문이야?"
정곡을 찔린 규현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
"내가 뭘 잘못했어? 그때도 자기 말하자마자 바로 풀어줬잖아."
"네가 잘못한 거 없어. 문제는 나야."
하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규현은 한참을 고르고 골라 말을 이었다.
"나는 항상 널 통제하는 사람이었어. 근데 그날, 눈이 가려지고 손이 묶인 채로... 잠깐 진짜로 무서웠어. 통제를 잃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처음 제대로 느낀 거야. 그리고 신호를 보낸 순간에도, 속으로 자꾸 생각했어. 이래도 되나. 내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여도 되나."
"규현아..."
"게다가 무법일이라는 게, 원래는 내가 너한테 주는 선물이었잖아. 근데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그날이 다가올 때마다 조금씩 긴장하게 되더라. 이번엔 또 어디까지 갈까, 이번엔 내가 또 어디서 멈춰야 할까. 그게 계속되면 언젠가는 내가 이 규칙을 만든 걸 후회하게 될까 봐."
하영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의 눈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낮게 물었다.
"내가 자기를 이기는 게 싫어?"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내가 자기를 예전만큼 대단하게 안 볼까 봐 무서운 거야? 손 떨던 모습 보여줘서?"
규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확히 그 지점을 찔린 얼굴이었다. 하영은 그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규현아. 나 그날 자기 손 떨리는 거 보고 실망 안 했어. 오히려 더 좋아했어. 자기가 나한테 그렇게까지 솔직할 수 있다는 거, 그게 얼마나 큰 신뢰인지 알아?"
"...그래도 나는 계속 강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어. 너한테는."
"자기가 강해서 좋아하는 거 아니야. 자기가 나를 진심으로 아껴줘서 좋아하는 거지."
하영은 그의 무릎 위로 올라앉아 이마를 맞댔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무법일 그만할까?"
"아니. 계속하고 싶어. 근데... 오늘은 그냥, 규칙도 무법도 없이 서로 안고 싶어."
규현이 그녀를 끌어당겨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평소의 벌도, 무법일의 격렬함도 아닌, 오롯이 서로를 향한 애정만 담긴 키스였다. 하영이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며 속삭였다.
"오늘은 내가 리드하는 것도, 자기가 벌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우리 둘이 하자."
침실로 옮겨간 두 사람은 서두르지 않았다. 규현은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입을 맞추며 하나하나 확인하듯 어루만졌다. 하영도 평소와 달리 반항 없이, 다정하게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규현아, 좋아..."
"나도 좋아. 너랑 이렇게 있는 거."
그가 천천히 그녀 안으로 들어갔을 때, 두 사람 다 숨을 삼켰다. 격렬함 대신 깊은 밀착이 두 사람을 채웠다. 규현은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느리게 움직였고, 하영은 그의 등을 끌어안으며 그 리듬에 몸을 맡겼다.
"규현아, 나 자기 안 놓을 거야. 무법일이든 아니든."
"나도. 너 없인 이 모든 규칙도 의미 없어."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절정으로 향했다. 격정보다는 안도에 가까운 떨림이었다. 끝난 후, 규현은 하영을 품에 안고 오랫동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고마워. 말할 수 있게 해줘서."
"당연하지. 우리 사이엔 무법일도, 규칙도 다 있지만, 제일 중요한 건 그거잖아. 서로한테 솔직한 거."
규현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다음 무법일이 언제가 되든, 이제는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