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꺼지다 — 세계가 끊어지는 순간

정전은 예고 없이 왔다.

한나가 여운 속에서 반쯤 잠들어 있을 때, 갑자기 방 안의 모든 소리가 바뀌었다. 보일러의 낮은 웅웅거림, 냉장고의 미세한 진동, 대기 중이던 조명의 전자음 — 그 모든 배경 소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정적이 너무 완전해서 오히려 귀가 먹먹했다.

"강현씨." 한나가 몸을 일으키며 그를 불렀다. 역할이고 뭐고 없이 저절로 나온 이름이었다.

"나도 봤어." 강현이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까까지의 낮고 단단한 지배자의 톤이 없었다. 평소의, 조금 날카로워진 현실적인 목소리였다. 그는 협탁 위 스탠드 스위치를 눌러봤다. 반응이 없었다.

창밖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평소라면 저 멀리 산 아래 마을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을 텐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바람에 흩날리는 눈발이 창에 부딪히는 소리만 크게 울렸다. 바람은 아까보다 훨씬 거세져 있었다. 처마가 삐걱거리는 소리,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낮게 울리는 바람의 웅웅거림.

강현이 휴대폰을 꺼내 손전등을 켰다. 화면 상단에는 신호 표시가 아예 없었다. "신호 원래 안 잡히긴 하는데, 와이파이도 나갔을 거야. 산장 자체 발전기가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다."

한나는 급하게 옷을 찾아 입었다. 아직 몸에 로프 자국이 남아 있었고, 손목과 발목이 얼얼했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방 안 온도가 벌써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함께 거실로 나갔다. 강현이 관리사무소에서 받은 안내 책자를 뒤졌다. "여기, 자가발전기 있대. 창고에." 그가 손전등 불빛으로 현관 쪽을 비췄다. "가서 확인하고 올게."

"저도 같이 갈게요." 한나가 말했다.

"아니, 여기 있어. 벽난로 살려놔. 불씨는 아직 남아 있을 거야." 강현이 그녀의 어깨를 짧게 잡았다. "괜찮아. 별일 아닐 거야."

그 말과 달리 그의 얼굴엔 긴장이 서려 있었다. 그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손전등을 든 채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눈보라가 그대로 들이쳤다. 바람이 얼마나 강한지, 문을 다시 닫는 데도 힘을 써야 했다.

한나는 벽난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직 남아 있는 불씨에 잔가지를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세션 중 로프에 묶여 있을 때는 무섭지 않았는데, 지금 이 어둠과 바람 소리는 다른 종류의 무서움이었다. 실체가 있는 위협이었다. 그녀는 문득 강현이 밖에서 얼마나 오래 걸릴지, 그가 괜찮을지 걱정이 됐다 — 그건 슬레이브로서의 걱정이 아니라, 그냥 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걱정이었다.

십오 분쯤 지났을까. 현관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강현이 눈을 잔뜩 뒤집어쓴 채 들어왔다. 얼굴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발전기 어떻대요?" 한나가 급히 다가갔다.

"연료는 있는데 시동이 안 걸려." 강현이 젖은 외투를 벗으며 말했다. 숨이 아직 거칠었다. "관리소에 전화도 안 되고.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오늘 밤엔 아무도 못 올 거야."

"그럼..."

"그럼 오늘 밤은 이걸로 버텨야지." 그가 벽난로 쪽을 바라봤다. 불씨가 다시 살아나 작은 불꽃을 내고 있었다. "물도 얼마 안 남았을 텐데, 정수기가 전기식이라 지금은 못 써. 눈 녹여서 써야 할 것 같아."

한나는 그제야 상황의 무게를 실감했다. 산 중턱, 인적 없는 곳, 전기도 통신도 끊긴 산장 안에 두 사람뿐이었다. 어젯밤까지의 세계 — 목줄과 로프와 지시로 이루어진 세계 — 는 이 순간 완전히 뒤로 밀려났다. 지금 필요한 건 주인과 슬레이브가 아니라, 살아남을 방법을 함께 찾을 두 사람이었다.

강현이 그녀를 바라봤다. 잠깐의 정적 속에서 그의 눈빛이 달라지는 걸 한나는 봤다. 지배자의 시선이 아니라, 동등한 무게로 이 상황을 함께 짊어질 파트너를 찾는 시선이었다.

"한나야." 그가 그녀의 이름을 그냥 이름으로 불렀다. 호칭도, 존댓말도 없이. 사흘 만에 처음이었다. "오늘 밤은 역할 잠깐 내려놓자. 지금은 그게 맞는 것 같아."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에 걸린 얇은 가죽 밴드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며, 그녀도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응." 그녀가 답했다. 처음으로, 사흘 만에 처음으로, 그 말에 아무 망설임이 없었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산장 전체를 흔들듯 울부짖고 있었다. 두 사람의 세계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으로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