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날, 다른 명령
토요일 오후, 세 사람은 재원의 집 식탁에 둘러앉았다. 중립적인 장소가 아니라 재원의 집을 고른 건, 재원이 초안을 문서로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표 하나가 떠 있었다. 요일별 일정, 각자의 규칙, 우선순위. 재원다운 방식이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목요일의 오해에 대해 재원이 먼저 사과했고, 시현도 그날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던 걸 인정했다. 유나는 두 사람이 이렇게 차분하게 마주 앉아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목요일 갈등 이후 처음으로,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무겁지 않았다.
문제는 문서의 세 번째 항목에서 시작됐다. "훈육 및 벌칙"이라고 적힌 칸.
"이 부분은 각자 알아서 하는 걸로 하죠." 재원이 담담하게 말했다. "유나가 나와의 규칙을 어기면, 그에 대한 벌은 내가 정해요. 당신 쪽 규칙을 어겼을 때도 마찬가지고. 서로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는 거죠."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그 벌이라는 게, 순수하게 재원 씨랑 유나 씨 둘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예를 들어서?"
"만약 재원 씨가 유나한테 일주일 동안 다른 사람 안 만나기, 이런 식의 벌을 준다고 치면. 그 기간에 저랑 만나기로 한 날이 껴 있으면 그건 제 시간도 같이 뺏기는 거잖아요."
재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런 극단적인 벌은 잘 안 줘요. 근데… 만약 정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그건 내 권한이라고 생각해요. 유나와 나 사이의 신뢰 문제니까."
"그 신뢰 문제가 제 시간을 침범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는 거 아닌가요."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유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심장이 조여드는 걸 느꼈다.
"구체적으로 말해봅시다." 재원이 목소리를 낮췄다. "당신은 지금 내가 유나한테 벌을 줄 때마다 당신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허락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그게 제 시간에 영향을 준다면 미리 알려주기라도 해야죠."
"그럼 그 반대는요? 당신이 유나랑 있는 시간에 뭘 하든, 그게 나한테 영향을 주면 나도 매번 통보를 받아야 하나?"
"그건 다르죠. 저는 애초에 벌 같은 걸 잘 안 줘요."
"그게 당신 방식이고, 이게 내 방식이에요. 그걸 왜 당신 기준으로 재단해요?"
유나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걸 들으며 손을 무릎 위에서 꽉 쥐었다. 몇 주 전, 목요일 극장 앞에서 느꼈던 것과 똑같은 무력감이 다시 밀려왔다. 이번엔 그 무력감이 두 배였다. 두 사람 모두 유나를 위해서 싸우고 있었지만, 정작 유나 자신은 그 싸움의 한가운데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저기." 유나가 겨우 입을 열었지만, 두 사람의 논쟁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저는 그냥," 시현이 언성을 살짝 높였다. "유나가 벌이라는 이름으로 저와의 시간을 뺏기는 일이, 재원 씨 혼자 결정으로 일어나는 게 싫다는 거예요."
"그럼 내가 유나를 어떻게 대할지, 당신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거네."
"그런 뜻이 아니라—"
"됐어요." 유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저 잠깐만요."
두 사람이 동시에 유나를 돌아봤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저... 노랑." 유나가 겨우 말을 이었다. 세 사람이 처음 규칙을 정할 때 만든 신호였다. 완전히 멈추는 빨강까지는 아니지만, 속도를 늦추고 확인이 필요하다는 뜻의 노랑.
재원과 시현의 표정이 동시에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의 날카로움이 순식간에 걷히고, 둘 다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나를 바라봤다.
"괜찮아?" 시현이 먼저 물었다.
"미안해요." 유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 지금 두 분이 저를 위해서 싸우는 건 아는데. 근데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꼭... 제가 두 분 사이에서 무슨 물건처럼 나눠지는 것 같아서."
재원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유나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손을 내밀기 전에 시현을 한번 쳐다봤다. 마치 허락을 구하듯. 시현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재원은 유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미안해." 재원이 말했다. "우리가 너무 우리 입장만 얘기했다."
"저도 미안해." 시현도 반대편에서 유나의 손을 잡았다. "너 여기 앉혀놓고 우리끼리 목소리만 높였네."
유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닦았다. "저 오늘은 그냥... 잠깐 쉬고 싶어요."
재원과 시현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눈빛 속에는 방금 전의 팽팽했던 대립이 아니라, 똑같이 유나를 걱정하는 마음만이 남아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재원이 조용히 말했다. "우리끼리도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고."
시현이 유나의 손을 꼭 쥐었다가 놓았다. "데려다줄까? 아니면 혼자 있고 싶어?"
"혼자 있고 싶어요, 오늘은." 유나가 작게 말했다.
두 사람 다 그 말을 존중했다. 유나가 재원의 집을 나서기 전, 재원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우리, 다시 만날게. 이번엔 제대로 준비해서."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유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참을 혼자 서 있었다. 노랑이라고 말한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뱉는 순간 느낀 건, 부끄러움이 아니라 이상한 안도감이었다. 처음으로, 자신이 두 사람 사이에서 그냥 견디기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실감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