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은 밤
그 주는 유나에게 살얼음판 같았다.
시현과의 냉랭한 기류를 풀어보려고, 유나는 수요일 저녁에 갑자기 시현의 집에 들렀다. 원래 계획에 없던 방문이었다. 시현은 반가워했지만, 그날은 하필 재원이 정한 "저녁 아홉 시 이후 위치 보고" 규칙을 지키지 못한 날이 됐다. 유나는 시현과 얘기를 나누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고, 재원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한 건 밤 열 시가 다 되어서였다.
[아홉 시 넘었는데 연락이 없네.]
유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황급히 답장을 보냈다. [죄송해요, 시현이 집이에요. 얘기하다가 시간을 놓쳤어요.]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 침묵이 어떤 말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화요일이 아니라 목요일도 아닌, 원래 재원과의 약속이 없던 그 다음 주 화요일, 유나가 재원의 집 문을 열었을 때 그는 평소와 달리 소파에 앉아 있지 않았다. 식탁 의자에 똑바로 앉아 유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앉아."
유나는 맞은편이 아니라, 재원이 손짓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자세만으로도 이미 오늘이 평소와 다른 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난주 수요일. 아홉 시 넘어서 연락한 거, 알지."
"네."
"이유는 들었어. 시현 씨 집에서 얘기하다가 시간을 놓쳤다고. 그건 이해해. 근데 내가 진짜 궁금한 건 그게 아니야."
재원은 잠시 말을 멈추고 유나를 내려다봤다.
"네가 요즘 나랑 있을 때랑 시현 씨랑 있을 때, 다른 사람 같아. 나랑 있을 때는 규칙을 지키려고 애쓰다가 지쳐 보이고, 시현 씨 얘기할 때는… 뭐랄까, 눈치를 보는 것 같아. 두 사람 사이에서 뭘 숨기고 있는 것처럼."
유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재원의 관찰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지난 이 주 동안 유나는 두 사람 모두에게 어느 정도씩 진심을 숨기고 있었다. 재원에게는 시현과의 마찰을, 시현에게는 재원의 요구가 얼마나 부담스러운지를.
"저번에 극장 일도 그렇고. 나는 네가 나한테 뭘 숨기는 게 제일 싫어. 규칙을 어기는 것보다 그게 더 싫어."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몰라서."
"그럼 지금 말해봐."
유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재원 님 규칙이 너무 갑자기 정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저는 시현이한테 미안해지고, 시현이 규칙은… 정확히 뭔지 말로 정해진 게 없어서 제가 매번 눈치로 파악해야 해요. 그래서 어느 쪽도 완벽하게 못 지키는 것 같아요. 그게 계속 저를 갉아먹어요."
재원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유나는 자신이 처음으로 재원 앞에서 규칙이 아니라 마음을 그대로 꺼내놨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까지 힘들었는지 몰랐어." 재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조용했다. "미안해."
그 사과가 오히려 유나를 무너뜨렸다. 재원 앞에서 눈물이 터진 건 오랜만이었다. 재원은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유나를 품에 안았다. 그의 팔이 유나를 감싸는 힘이 평소보다 훨씬 조심스러웠다.
"오늘은 벌 안 줘." 그가 유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지금 필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아."
"저 원래 아홉 시 규칙 어긴 거 벌받아야 하는데."
"규칙은 규칙이고, 지금 네가 무너지고 있는 건 다른 문제야. 그걸 먼저 봐야지."
재원은 유나를 안아 소파로 옮겼다. 그의 손이 유나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오늘은 평소의 엄격함 대신 온전한 다정함으로만 유나를 감쌌다.
"우리, 이거 세 사람이 다 같이 얘기해야 할 것 같아." 재원이 말했다. "네가 혼자서 우리 둘 사이에서 눈치 보고 조율하는 거, 그거 너무 오래 시켰어. 미안해."
"시현이도 비슷한 말 했어요."
"그럼 답은 나온 거네." 재원이 유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번 주 안에 셋이 시간 맞춰보자."
그 밤, 재원은 유나를 벌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유나를 침실로 데려가 그 어느 때보다 느리고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의 손끝이 유나의 몸을 어루만질 때마다, 마치 사과를 몸으로 전하는 것 같았다. 유나가 그의 품 안에서 절정에 이를 때, 재원은 평소처럼 "가"라고 명령하지 않고, 대신 낮게 속삭였다. "괜찮아. 힘들었지. 이제 괜찮아."
그 말에 유나는 다시 눈물이 났다. 이번엔 슬픔이 아니라 안도 때문이었다.
모든 게 끝난 뒤, 재원은 유나를 품에 안고 오랫동안 등을 쓸어줬다. "시현 씨한테도 연락해둘게. 우리 셋, 이번 주 토요일 오후에 보자고."
유나는 재원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과 안도가 동시에 밀려왔다. 드디어 이 균열을 정면으로 마주할 시간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