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에 앉다
일요일 오후 두 시, 유나는 자신의 집을 이번 만남의 장소로 골랐다. 재원의 집도, 시현의 집도 아닌 곳. 이번만큼은 어느 한쪽의 공간에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유나가 이틀 밤을 새워 정리한 노트와, 인쇄해온 A4 용지 몇 장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 유나는 몇 번이고 그 종이들을 다시 읽으며 순서를 확인했다.
재원이 먼저 도착했다. 그는 평소처럼 십 분 일찍 왔지만, 이번엔 노트북을 챙겨오지 않았다. "오늘은 네가 준비했다고 해서, 나는 그냥 듣는 자리로 왔어." 재원이 그렇게 말하며 식탁에 앉았다. 유나는 그 작은 변화가 고마웠다.
시현은 정각에 맞춰 도착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긴장 풀라고." 그가 봉투를 내밀며 웃었다. 안에는 유나가 좋아하는 마카롱이 들어 있었다. 재원이 그 모습을 보며 살짝 웃었다. "이런 것도 챙겨오고, 역시 시현 씨답네요."
세 사람이 식탁에 둘러앉자, 유나는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은 제가 진행할게요. 대신 몇 가지 규칙을 먼저 정하고 싶어요."
두 남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 제가 얘기하는 동안은 중간에 끼어들지 말아주세요. 다 듣고 나서 질문이나 의견 주세요. 둘째, 이건 어느 한쪽이 이기고 지는 자리가 아니에요. 세 사람이 다 같이 지속 가능한 걸 만드는 자리예요. 셋째… 오늘 여기서 나온 얘기는, 나중에 두 분끼리 따로 만나서 뒤집거나 하지 않기로 해요. 저를 빼고 결정하지 않기로."
재원과 시현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눈빛 속에 은근한 자책이 스쳤다. 토요일 회의가 결국 두 사람의 언쟁으로 번졌던 걸 둘 다 기억하고 있었다.
"동의해." 재원이 말했다.
"저도요." 시현도 이어 말했다.
유나는 노트를 펼쳤다. "저 먼저 말할게요. 지난 몇 주 동안 제가 힘들었던 이유를 정리해봤어요."
유나는 하나씩 짚어나갔다. 재원의 규칙이 갑작스럽게 바뀔 때마다 시현과의 시간을 어떻게 조율해야 할지 몰라 혼자 끙끙댔던 것. 시현의 규칙이 명문화되지 않아서,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판단할 기준이 없어 불안했던 것. 그리고 무엇보다, 두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건 분명한데, 그 두 사랑의 접점에서 자신이 늘 완충재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
"저는 그 완충재 역할,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유나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제가 두 분 사이를 조율하는 사람이 아니라, 두 분이 저를 위해서 미리 조율된 구조 안에서 안심하고 있고 싶어요."
재원이 손을 살짝 들었다. "질문해도 돼?"
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구조를 생각하고 있어?"
유나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거기엔 표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세 단계로 나눠봤어요. 첫 번째는 '공통 규칙'. 이건 두 분 다 지켜야 하고, 저한테도 똑같이 적용되는 거예요. 안전, 건강, 그리고 최소 사흘 전 일정 통보 같은 거요. 두 번째는 '개인 규칙'. 이건 각자의 요일, 각자의 공간에서만 적용되는 규칙이에요. 재원 님 방식, 시현이 방식 그대로 유지하는 거예요. 세 번째는… '예외 처리'. 이게 이번에 제일 중요한 부분이에요."
"예외 처리?" 시현이 되물었다.
"응. 지난번처럼 갑자기 일정이 겹치거나, 벌이 다른 사람 시간을 침범하는 경우요. 이런 상황이 생기면 저 혼자 판단하지 않고, 정해진 절차대로 처리하는 거예요."
유나는 노트를 넘겨 다음 페이지를 보여줬다. 거기엔 작은 순서도 하나가 손글씨로 그려져 있었다.
"이 부분은 아직 제가 초안만 잡았어요. 오늘은 이걸 같이 완성했으면 좋겠어요."
재원은 그 순서도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에 처음 보는 종류의 존중이 담겨 있었다.
"너 이거 진짜 며칠 밤 새운 거지."
"네. 두 밤이요."
"미안해." 재원이 조용히 말했다. "이런 걸 네가 혼자 짜내야 했다는 게."
"저도 미안해." 시현도 유나의 손을 살짝 잡았다. "우리가 진작 이렇게 앉았어야 했는데."
유나는 두 사람의 사과를 받으며, 처음으로 눈물이 아니라 옅은 미소가 나오는 걸 느꼈다.
"자, 그럼." 유나가 종이를 다시 정리하며 말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해봐요. 시간 많이 걸릴 거예요. 그래도 오늘은 끝까지 가요, 우리."
재원과 시현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오후 햇살이 길게 늘어지는 동안, 세 사람은 식탁 위에 펼쳐진 종이들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