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치는 선

목요일 저녁 일곱 시 이십 분, 유나는 극장 앞에서 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재원이었다.

[여덟 시에 카페 도착해서 연락해.]

유나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화면을 끄기도 전에 시현이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많이 기다렸어?" 시현이 물었다.

"아니, 방금 왔어."

영화는 두 시간짜리였다. 상영 시간표를 다시 확인했을 때, 유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는 시간은 아홉 시 삼십 분. 재원과의 약속은 여덟 시. 처음부터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계산이었다는 걸 유나는 극장 좌석에 앉고 나서야 제대로 실감했다.

"저기, 시현아."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 유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중간에 잠깐 나가야 할 것 같아. 여덟 시에."

시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살짝 걷혔다. "영화 중간에?"

"재원 님이 서류에 사인 받을 게 있대서. 삼십 분이면 된다고 하셨어."

"영화관에서 나가서 삼십 분 만에 다시 들어오면, 그게 벌써 삼십 분이 아니잖아. 이동 시간까지 하면."

유나는 할 말이 없었다. 시현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극장 근처 카페까지 걸어서 십 분, 다시 극장으로 돌아오는 데 십 분. 삼십 분이라던 약속은 이미 오십 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미리 말했어야지." 시현이 낮게 말했다. 화가 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평소의 장난기가 완전히 빠진 목소리였다. "나는 이거 예매하면서 다음 주 다른 일정까지 다 조율했어. 그런데 영화 보는 중간에 네가 나가고 없으면, 그거 뭐라고 해야 하나."

"미안해.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재원 님이 갑자기 시간을 옮기신 거라."

"그럼 재원 씨한테 안 된다고 말했어야지."

그 말에 유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안 된다고 말한다는 선택지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재원의 말은 늘 규칙처럼 다가왔고, 규칙을 거스른다는 생각을 유나는 아예 해본 적이 없었다.

"나 재원 님한테 그렇게 말 못 해."

"왜?"

"그냥… 그런 식으로 얘기가 안 오가는 관계라서."

시현은 잠시 유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처음 보는 종류의 실망이 스쳤다.

"나는 네가 나한테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영화가 시작됐지만 두 사람 다 화면에 집중하지 못했다. 여덟 시가 되자 유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시현은 붙잡지 않았지만, 나가는 유나의 뒷모습을 보는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카페에서 만난 재원은 정말로 서류 몇 장을 내밀며 사인을 받았다. 정확히 십오 분이 걸렸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재원이 말했다. "가서 영화 마저 봐."

"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유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시현이가… 좀 서운해했어요. 영화 중간에 나온 거."

재원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 "내가 미리 말 안 하고 시간 잡은 건 미안한데, 그건 클라이언트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그리고 원래 목요일 저녁 약속 관련해서는 최소 삼 일 전에 나한테 알려주기로 했잖아. 근데 오늘 아침에서야 얘기했지."

"그때는 저도 시현이랑 영화 보러 가는 게 갑자기 정해진 거라서요."

"그럼 갑자기 정해진 일정이 먼저 잡힌 내 일과 겹칠 때, 누구 걸 우선해야 하는지는 정해져 있었나?"

유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규칙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재원은 잠시 유나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미안. 너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그냥… 이런 식으로 계속 부딪히면 안 될 것 같아서."

유나가 극장으로 돌아왔을 때, 영화는 이미 절반 넘게 지나 있었다. 시현은 조용히 자리를 내주며 다시 앉을 공간을 만들어줬지만, 어둠 속에서도 그의 옆얼굴이 평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게 보였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은 그냥 데려다줄게." 극장 앞에서 시현이 말했다. 평소라면 근처 카페에 들러 야식을 먹거나, 유나의 집까지 걸어가며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눴을 텐데, 오늘은 그런 여유가 없었다.

택시 안에서 시현이 조용히 말했다. "나 화난 거 아니야. 그냥… 좀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생각?"

"우리가 처음에 얘기했던 거. 요일 나누고, 서로 존중하고. 근데 오늘 보니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더라고. 재원 씨 일정이 갑자기 바뀌면 내 시간이 밀려나. 근데 반대로 내 일정이 재원 씨 시간을 밀어낸 적은 없잖아."

"그건 그냥 우연이야."

"그럴 수도 있고. 근데 우연이 자꾸 한쪽으로만 쏠리면, 그건 우연이 아닐 수도 있어."

유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집 앞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리면서, 시현은 평소처럼 유나의 이마에 입을 맞췄지만, 그 입맞춤은 평소보다 짧고 조심스러웠다.

"잘 자. 우리 이거에 대해서 언젠가는 제대로 얘기해야 될 것 같아."

유나는 집으로 들어가면서도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파란 칸과 초록 칸이 겹치는 날들이 앞으로도 계속 생길 거라는 예감이, 이제는 확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