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단어

유나는 이틀 동안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재원에게도, 시현에게도.

처음엔 그저 지쳐서였다. 회사에 가고, 집에 돌아오고, 저녁을 챙겨 먹는 등 최소한의 일과만 반복하며 휴대폰을 멀리 뒀다. 두 사람 모두 그 침묵을 존중해주는 듯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다만 재원에게서 딱 한 번,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기다릴게"라는 문자가 왔고, 시현에게서는 "네가 좋아하는 김밥집 아직 하더라. 생각날 때 말해"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문자가 왔다. 유나는 그 두 문자 모두에 답하지 않았지만, 읽고 또 읽었다.

사흘째 되던 날 저녁, 재원이 집 앞으로 찾아왔다. 문자도 없이 갑자기 온 건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유나가 문을 열자 재원은 평소와 다르게 조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락도 없이 미안. 그냥…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유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재원을 안으로 들였다.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재원은 평소처럼 규칙 얘기도, 하루 일과 보고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곁에 있었다.

"괜찮아?" 재원이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유나가 솔직하게 답했다. "그냥 다 멈추고 생각을 좀 해야 했어요."

"생각 정리됐어?"

"조금요."

재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유나의 어깨를 감쌌다. 그 손길이 익숙했다. 이 자세, 이 다음에 이어지는 흐름이 유나의 몸에는 이미 각인돼 있었다. 재원이 유나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낮게 말했다.

"오늘은 아무 얘기도 안 해도 돼. 그냥 내가 좀 안아줄게."

그의 손이 유나의 뺨을 감싸고, 입술이 다가왔다. 유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익숙한 흐름, 익숙한 항복. 재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나의 몸이 자동으로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마치 이게 모든 걸 해결해주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그 순간, 유나는 문득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원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그냥 익숙해서, 그게 재원과의 관계에서 늘 해왔던 방식이라서 몸이 알아서 반응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빨강." 유나가 눈을 뜨며 말했다.

재원이 즉시 멈췄다. 그의 표정이 한순간에 완전히 바뀌었다. 지배자의 얼굴이 사라지고, 순수하게 걱정하는 한 사람의 얼굴만 남았다.

"괜찮아? 뭐가 잘못됐어?"

유나는 몸을 뒤로 물리며 숨을 골랐다. "아니에요. 재원 님이 뭘 잘못한 거 아니에요. 그냥… 지금 이거, 제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익숙해서 하려던 거였어요. 재원 님이 안아주면 다 해결될 것 같아서, 생각 안 하고 몸이 먼저 움직인 것 같아요."

재원은 그 말을 한참 곱씹듯 침묵했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줘서 고마워." 그가 조용히 말했다. "빨강이라고 말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저도 처음이었어요. 재원 님한테 이 말 쓴 거."

"알아. 그래서 더 고마워."

재원은 유나에게서 완전히 물러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유나의 손을 감쌌지만,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나 요즘 계속 생각했어." 재원이 말했다. "내가 너한테 안정감을 준다고 믿었는데, 그게 사실은 너한테 도망칠 곳을 안 준 거였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네가 힘들 때마다 나한테 오면, 나는 규칙과 통제로 그 힘든 걸 덮어버리려고 했던 것 같아. 그게 위로라고 착각하면서."

유나는 그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저도 그랬어요. 힘들 때마다 재원 님한테 오면 생각 안 해도 되니까, 그게 편해서 계속 그렇게 했어요. 근데 그게 진짜 저를 돌보는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럼 진짜 필요한 게 뭐야, 지금?"

유나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이번엔 제가 직접 얘기를 이끌어보고 싶어요. 두 분이 저를 위해서 싸우는 거 말고, 제가 뭘 원하는지 먼저 말하고, 두 분이 거기에 맞춰서 조율하는 방식으로요. 이번 자리는 제가 정리해서 제안할게요."

재원은 잠시 놀란 얼굴을 하다가, 이내 옅게 웃었다. "그거 좋다. 그래야지."

유나는 그날 밤 재원을 돌려보낸 뒤, 홀로 앉아 노트를 펼쳤다. 그동안 두 사람 각각과 있었던 순간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과 견딜 수 없는 것을 적어 내려갔다.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노트 한 페이지가 빼곡히 채워졌다.

다음 날 아침, 유나는 재원과 시현에게 각각 같은 문자를 보냈다.

[이번 주 일요일 오후에 시간 되세요? 이번엔 제가 준비해서 얘기하고 싶어요. 두 분 다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답장은 몇 분 안에 둘 다에게서 왔다. 재원은 짧게 "그래, 갈게"라고 답했고, 시현은 "당연하지, 뭐 준비할 거 있으면 말해"라고 보내왔다.

유나는 두 개의 답장을 번갈아 보며, 처음으로 이 관계 안에서 자신이 끌려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정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