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의 규칙
유나의 휴대폰에는 캘린더 앱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회사 일정이 적힌 평범한 캘린더였고, 다른 하나는 색깔로 구분된 캘린더였다. 파란색은 재원의 날, 초록색은 시현의 날, 그리고 아직은 거의 비어 있는 보라색 칸은 셋이 함께하는 날이었다. 그 캘린더를 처음 만든 사람은 시현이었다. "이렇게 안 하면 우리 다 헷갈려서 사고 나." 웃으면서 한 말이었지만, 유나는 그 말 속에 얼마나 많은 배려가 들어 있는지 나중에야 알았다.
재원을 만난 건 이 년 전이었다. 소개로 나간 자리에서 그는 유나에게 커피를 사주며 딱 세 가지를 물었다. 이 관계에서 뭘 원하는지, 한계가 어디인지, 그리고 그걸 얼마나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 유나는 그 직설적인 질문들이 무례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안심이 됐다. 재원은 자신이 원하는 것도 똑같이 정직하게 말했다. 통제, 규율, 예측 가능한 구조. 그는 즉흥적인 걸 싫어했고, 계획에 없던 일이 벌어지는 걸 견디지 못했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엄격했지만 그 엄격함 안에는 늘 유나를 향한 세심한 계산이 있었다.
시현을 만난 건 그로부터 반년 뒤, 재원과 이미 관계를 맺고 있을 때였다. 유나가 처음으로 재원에게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이 간다"고 털어놓았을 때, 재원은 며칠을 침묵했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는 폴리아모리에 대해 책을 세 권 읽고 커뮤니티 사람들과 두 번 만난 뒤에야 유나에게 답을 줬다. "네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원한다고 해서 내가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할게. 대신 조건이 있어." 그 조건들이 지금 파란 캘린더 칸에 적힌 규칙들의 시작이었다.
시현은 정반대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웃음이 많았고, 유나가 긴장할 때마다 손을 잡아주기보다는 먼저 우스갯소리를 던져 긴장을 풀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다정함 뒤에는 재원 못지않게 단단한 축이 있었다. 시현이 처음으로 유나를 무릎 꿇렸던 밤, 그는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소리 지르지 않아. 그런데 내가 하는 말은 다 진심이야. 그러니까 잘 들어." 유나는 그 순간 두 사람의 다정함과 엄격함이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세 사람이 처음으로 한 테이블에 앉은 건 시현이 재원에게 연락하면서였다. 시현은 예의를 갖췄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유나 씨를 좋아합니다. 두 분 관계를 존중하고 싶어요. 그러니 세 사람이 만나서 얘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재원은 그 연락을 받고 유나에게 "이 사람, 마음에 안 들지만 예의는 있네"라고 말했다. 유나는 그게 재원식의 칭찬이라는 걸 알았다.
그날의 만남에서 셋은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세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 그리고 유나가 두 사람 모두에게 무엇을 줄 수 있고 무엇을 줄 수 없는지. 결론은 간단했다. 유나는 재원과 시현 모두와 관계를 지속한다. 대신 세 사람 모두 서로의 존재를 알고, 인정하고, 최소한의 규칙을 지킨다. 요일은 나눈다. 화요일과 목요일, 그리고 격주 토요일은 재원. 수요일과 금요일은 시현. 나머지는 유동적으로, 유나의 컨디션과 스케줄에 맞춰 조율한다.
그렇게 시작된 지 여덟 달이 지난 지금, 유나는 이 구조가 제법 잘 굴러간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오늘 아침까지는 그랬다.
문제는 두 사람의 규칙이 서로 다른 언어로 쓰여 있다는 데 있었다. 재원의 규칙은 문서였다. 실제로 그는 유나에게 정리된 텍스트 파일을 보낸 적도 있었다. 기상 시간, 보고 방식, 허락받아야 하는 일들의 목록. 반면 시현의 규칙은 대화 속에 흩어져 있었다. "그날 밤에 그랬잖아, 기억나?"로 시작하는, 문서화되지 않은 암묵의 합의들. 두 방식 모두 유나에게는 소중했지만, 문제는 이 두 세계가 겹치기 시작했을 때였다.
유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두 개의 캘린더를 번갈아 보다가, 문득 파란 칸과 초록 칸이 같은 주 목요일에 겹쳐 있는 걸 발견했다. 재원의 정기 화요일 옆에, 이번 주만 목요일 저녁 약속이 추가로 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 목요일은 원래 시현의 날이었다.
유나는 한참을 화면만 보다가, 결국 두 사람에게 각각 메시지를 보내지 않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아직은,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