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기까지
2차는 걸어서 오 분 거리의 맥주집이었다.
율은 1차에서 빠졌다. "내일 아침 일찍 일이 있어서요. 다들 조심히 가요. 다혜님, 오셔서 좋았어요." 하루도 같이 나갔다. 집이 멀다고 했다. 남은 건 다섯 명. 모카, 제이, 현, 다혜, 은재.
맥주집은 시끄러웠다. 그게 편했다. 시끄러우면 말을 안 해도 티가 안 났다. 다혜는 구석 자리에 앉아서 생맥주 한 잔을 천천히 마셨고, 모카는 제이랑 폰으로 뭔가를 보면서 조용히 웃었고, 현은 은재 옆에 앉았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내가 말이 많아서."
현이 말했다. 진심인 것 같았다.
"아 아니에요 ㅋㅋ 괜찮아요."
"은재님 아까 리밋 리스트 얘기 좋았어요. 그거 누가 알려줬어요?"
은재는 잠깐 멈췄다. 맞은편에서 다혜가 맥주잔을 내려놓는 게 보였다.
"…책에서요."
"책에서 나온 거 실제로 해보는 사람 별로 없는데. 대단하네."
현은 웃었다. 은재도 웃었다. 그리고 현이 은재 잔에 맥주를 채웠다. 은재가 안 비웠는데.
열한 시가 넘어가면서 현은 은재한테 조금 더 가까이 앉았다. 자리가 좁아서 그런 건지 아닌지 은재는 판단하지 않으려고 했다. 판단하면 이 자리가 불편해지니까. 그런데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불편하다는 뜻이라는 걸 은재는 알았다.
"은재님 어디 산다고 했죠?"
"아 저 은평구요."
"나 마포인데. 가는 길이네. 데려다줄게요. 차 밖에 있어요."
"아 저 진짜 괜찮아요. 지하철 아직 있어요."
"이 시간에 여자 혼자 지하철 위험해요. 진짜로. 나 그런 거 못 봐요."
현은 웃으면서 말했다. 나쁜 말이 하나도 없었다. 은재는 거절할 말을 찾았다. 거절할 말이 있어야 거절할 수 있는 건 아닌데, 은재는 항상 있어야 했다.
"그러면 역까지만. 역까지만 같이 가요."
"아……"
"은재 씨는 나랑 가요."
큰 목소리가 아니었다.
맥주집이 시끄러웠는데도 은재는 그 문장을 첫 글자부터 들었다. 다혜는 구석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코트를 팔에 걸치고. 은재를 보고 있었다.
은재의 몸이 먼저 일어났다.
머리가 판단하기 전에 다리가 펴졌다.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났다. 은재는 자기가 일어선 걸 일어선 뒤에 알았고, 그걸 알고 나서 심장이 한 번 크게 쳤다. 이건 뭐지. 일어나라고 안 했는데. 같이 가자고만 했는데.
"어? 둘이 같은 방향이야?"
현이 물었다.
"네."
다혜가 말했다. 한 글자. 마침표. 마포와 은평이 같은 방향인지 은재는 몰랐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다혜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제이가 눈썹을 올렸다. 모카는 폰에서 눈을 떼고 두 사람을 한 번 보고 아주 조금 웃었다. 현은 뭐라고 하려다가 그냥 "아, 그럼 조심히 가요" 했다.
"조심히 가요. 모카님 제이님 오늘 반가웠어요."
은재가 인사했다. 다혜는 고개만 숙였다. 그리고 문을 열고, 은재가 나올 때까지 잡고 있었다. 두 번째였다.
밖은 추웠다.
"택시 탈 거예요."
다혜가 말했고, 은재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손을 들었다. 택시는 바로 섰다. 다혜가 뒷문을 열었다. 은재가 먼저 탔다. 다혜가 옆에 탔다.
"은평구 먼저 가주세요."
은재는 그때 알았다. 마포가 먼저인데 은평을 먼저 간다는 건 다혜가 은재를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온다는 뜻이었다. 같은 방향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언니……"
"응."
"언니 집 마포잖아요."
"응."
"그러면……"
"은재 씨."
은재는 입을 다물었다. 택시가 출발했다. 창밖으로 합정 불빛이 지나갔다. 은재는 긴장하면 말이 많아지는 사람이었고, 지금 말이 많아지려고 하고 있었다. 아까 현이 그렇게 말할 때 사실 좀 그랬다고, 언니가 그 말 해줘서 진짜 고마웠다고, 근데 자기도 왜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그게 이상했다고—
다혜의 손이 은재의 손목 위에 올라왔다.
세게 아니었다. 그냥 잡았다. 손가락이 손목을 감쌌고, 엄지가 손목 안쪽 위에 놓였다. 맥이 뛰는 자리에.
은재의 말이 멈췄다. 입안에 있던 문장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기억한다고 했잖아요."
다혜는 앞을 보고 있었다. 은재를 보지 않고. 손만 은재한테 있었다.
궁금한 것 3번. 손목. 잡히는 것. 세게 아니어도. 그냥 잡고 안 놔주는 것.
은재는 숨을 쉬는 방법을 잊었다. 아니, 잊은 게 아니라 숨이 다혜의 엄지 밑에서 뛰고 있었다. 다혜는 그걸 느끼고 있을 거였다. 은재의 맥이 얼마나 빠른지. 그걸 알면서 다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만 보고 있었다.
이십 분이었다. 합정에서 은평까지. 그 이십 분 동안 다혜는 손을 놓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재도 하지 않았다. 택시 기사가 라디오를 틀었다. 무슨 노래인지 은재는 나중에 기억하지 못했다. 엄지만 기억했다. 맥이 뛸 때마다 아주 조금 눌리는 것 같은 엄지.
택시가 은재의 원룸 건물 앞에 섰다.
다혜는 손을 놓았다. 은재는 손목이 갑자기 추워지는 걸 느꼈다.
"오늘은 여기까지."
"……왜요."
은재는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온 걸 나온 뒤에 알았다. 왜요. 스물여섯 살 성인이 택시에서 내리기 싫어서 하는 말치고는 너무 애 같았다.
다혜가 처음으로 은재를 봤다.
"협상 안 했으니까."
은재는 웃음이 났다. 웃음이 나면서 눈가가 뜨거워졌다. 이 사람은 택시 안에서까지 챕터 3을 지키고 있었다. 손목 하나 잡는 것까지는 리스트에 있어서 했다. 그다음은 리스트에 없어서 안 했다.
"다음 주에 얘기해요."
다혜가 말했다.
"글로. 제대로."
"……네."
"내려요. 도착하면 문자하고."
은재는 내렸다. 문을 닫으려다가 잡았다.
"언니."
"응."
"고마워요. 아까요."
다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은재를 봤다. 그리고 은재가 문을 닫을 때까지 봤다. 택시는 은재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에 출발했다. 은재는 그걸 유리문 너머로 봤다.
원룸 문을 닫자마자 은재는 벽에 등을 붙였다.
손목을 봤다. 아무 자국도 없었다. 그런데 거기 뭐가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 은재는 그 자리를 다른 손으로 감쌌다. 다혜의 손보다 작았다. 다혜의 손은 은재 손목을 한 바퀴 다 감았다.
옷을 벗을 정신이 없었다. 은재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서 청바지 단추를 풀었다. 손이 급했다. 다혜는 급한 사람이 아닌데, 은재는 지금 다혜가 아니었다. 다혜가 없는 방에 다혜 때문에 이렇게 된 사람이었다.
바지를 무릎까지 내리고 팬티 안으로 손을 넣었다. 젖은 게 아니라 흘러 있었다. 택시에서부터. 이십 분 동안 엄지 하나로.
'오늘은 여기까지.'
은재는 그 말을 생각하면서 손가락을 넣었다. 하나.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했는데 은재는 여기까지가 아니었다. 그게 잘못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 느낌이 더 뜨거웠다. 다혜가 하지 말라고 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다혜가 정한 '여기'를 은재 혼자 넘고 있었다.
두 개. 손가락을 구부렸다. 다른 손으로 손목을 잡았다. 자기 손목을. 세게. 다혜보다 세게 잡아야 다혜 같았다.
'기억한다고 했잖아요.'
다혜가 이 방에 있다면. 침대 끝에 앉아서. 앞만 보고. 은재가 뭘 하는지 보지도 않고, 그냥 손목만 잡고. 은재가 소리를 내면 엄지로 맥을 한 번 눌러서 조용히 하라고 하고.
은재는 소리를 냈다. 벽이 얇다는 걸 알았는데 손이 입으로 가지 않았다. 손 하나는 손목에 있었고 하나는 안에 있었다. 허리가 침대에서 떠올랐다. 은재는 두 손가락으로 안쪽을 누르면서 엄지로 클리토리스를 문질렀고, 다혜의 목소리로 '색깔.' 하고 묻는 걸 들었고—책에 나오는 그 질문을 아직 한 번도 진짜로 받아본 적이 없는데—'초록'이라고 소리 내서 답하면서 왔다.
한참 뒤에 손을 뺐다.
천장. 어두운 천장. 반쯤 벗은 청바지. 젖은 손. 은재는 웃었다. 소리 없이. 협상도 안 했는데 혼자 색깔을 말했다. 다혜가 알면 뭐라고 할까. 아마 마침표 하나.
폰을 집었다. 열두 시 사 분.
다혜. ↔ 은재
은재: 도착했어요
답은 바로 왔다. 다혜는 아직 택시 안일 거였다. 마포로 돌아가는.
다혜.: .
다혜.: 잘 자요, 은재.
은재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씨'가 없었다. 여덟 달 동안, 스물세 줄 동안, DM 삼 주 동안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두 글자가 없었다. 쉼표 하나 찍고 이름만.
은재는 그게 오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다혜는 오타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한 거였다. 택시 뒷자리에서, 손목을 놓고 나서, 마포로 돌아가는 길에.
은재: 잘 자요 언니
그리고 은재는 잠들기 전까지 자기 손목에 코를 대고 있었다. 다혜 냄새가 날 리가 없었다. 그냥 은재 손목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