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월요일 밤 열 시에 다혜가 먼저 DM을 보냈다.

다혜. ↔ 은재

다혜.: 은재.

다혜.: 지금 시간 돼요?

은재: 네!!!! 돼요

다혜.: 챕터 3 펴놓고 해요.

은재: ㅋㅋㅋㅋㅋㅋ 진짜요?

다혜.: 진짜요.

다혜.: 나 이거 처음이니까 책대로 할 거예요. 은재도 아는 거 다시 확인하는 거니까 답답해하지 말고.

은재: 안 답답해요. 저 언니 이런 거 좋아요

다혜.: .

은재: !

은재는 침대 위에 책을 펼쳐놓고 노트를 그 옆에 놓았다. 협상. 3장. 포스트잇 여섯 개. 몇 주 전에 물음표를 그려놓은 자리. 그때는 협상이 왜 필요한지 몰랐다. 지금은 알았다. 지도가 있어야 다시 그릴 수 있으니까.

다혜.: 먼저 말할게요.

다혜.: 나 이거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알죠.

은재: 알아요

다혜.: 그래서 더 천천히 갈 거예요. 은재가 원하는 것보다 느릴 수도 있어요.

은재: 언니가 천천히 하면 저는 그냥 따라가면 되는 거 아녜요?

다혜.: 아니요.

다혜.: 따라오는 게 아니라 같이 확인하는 거예요. 내가 처음이라서 뭘 놓칠 수 있어요. 은재가 그걸 말해줘야 해요. 그게 은재 일이에요.

다혜.: 책에 그렇게 나오잖아요. 서브가 수동적인 게 아니라고.

은재: ……네. 알겟어요

은재는 그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따라오는 게 아니라 같이 확인하는 것.' 은재가 3년 전에 못 한 게 그거였다. 따라가기만 했다. 그 사람이 경험이 많으니까.

다혜.: 원하는 것부터. 은재 먼저.

은재: 저는

은재: 리스트에 쓴 거 다요. 이름 불러주는 거. 명령할 때. 셈. 손목

은재: 그리고 언니가 저 보는 거요. 그냥 보는 거. 정모 때 맞은편에 앉은 거처럼

다혜.: 알겠어요.

다혜.: 나는.

'입력 중…'이 길었다. 은재는 기다렸다. 이 사람은 원하는 것을 말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었다. 십 년 동안 읽기만 하고 한 번도 말한 적 없으니까.

다혜.: 은재가 내 말대로 하는 거 보고 싶어요.

다혜.: 천천히. 내가 하라는 속도로.

다혜.: 그리고 은재가 참는 거. 내가 하라고 하기 전까지.

은재는 폰을 쥔 손에 땀이 나는 걸 느꼈다.

은재: 참는 거

다혜.: 네.

다혜.: 마지막까지.

은재: ……알겟어요

은재: 아 잠깐만 언니 저 지금 심장이 이상해요

다혜.: 물 마셔요.

은재: 네

은재는 진짜로 일어나서 물을 마셨다. 다혜가 시켜서. 그게 이미 시작인 것 같았다.

다혜.: 원하지 않는 것.

은재: 하드 리스트 그대로요. 사진 영상 실명 목. 그리고 노랑 무시하는 거

다혜.: 마지막 건 리밋이 아니라 규칙이에요. 무시하면 그건 플레이가 아니라 다른 거예요. 당연한 거니까 리밋에 안 써도 돼요.

다혜.: 그래도 써놓은 건 잘했어요.

은재: 언니는요? 원하지 않는 거

다혜.: 나 옷 안 벗어요. 이번엔.

은재: ??? 왜요

다혜.: 내가 아직 그건 안 돼서.

은재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 안 돼서. 다혜가 '안 된다'고 말하는 걸 처음 봤다. 은재는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였다. 리밋에 이유를 묻는 건 리밋을 흔드는 거니까. 책에 나왔다.

은재: 알겟어요. 안 물어볼게요

다혜.: 고마워요.

다혜.: 다음. 도구.

은재: 이번엔 없이요. 손만

다혜.: 손만.

은재: 아 근데

은재: 손가락은 손이잖아요

한참 답이 없었다. 은재는 자기가 쓴 걸 다시 봤다. 이걸 쓴 사람이 자기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손가락은 손이잖아요. 스물여섯 살이.

다혜.: .

다혜.: 손가락은 손이에요.

은재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를 냈는지 안 냈는지 모르겠다.

다혜.: 마킹 없음. 사진 없음. 삽입은 손가락까지. 도구 없음.

다혜.: 맞아요?

은재: 맞아요

다혜.: 신호.

은재: 초록 노랑 빨강. 책대로

다혜.: 말 못 할 때는.

은재: 아 그거 생각 안 했어요

다혜.: 손바닥으로 두 번. 아무 데나. 내 몸이든 바닥이든.

다혜.: 두 번이면 멈춰요. 세 번이면 끝이에요.

은재: 네

다혜.: 노랑 말했을 때 내가 뭘 해야 돼요?

은재는 그 질문에 멈췄다. 3년 전에 아무도 은재한테 묻지 않은 질문이었다. 노랑은 그 사람이 정했고, 노랑의 뜻도 그 사람이 정했다. 노랑은 천천히 하라는 거지 멈추라는 게 아니야.

은재: 멈추고 물어봐주세요. 계속할지 말지. 제가 정하게

은재: 그리고 손 떼지 말아주세요. 멈춰도 손은 그대로 있어주세요

다혜.: 알겠어요.

다혜.: 기억할게요.

은재는 그 말에 눈을 감았다. 기억할게요. 저번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손 같았다. 지금은 손이 은재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실제로 잡은 적이 있으니까 이제 그 말은 감촉이 있었다.

다혜.: 끝난 뒤.

은재: 담요. 따뜻한 거. 30분 이상 같이 있어주기

은재: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문자. 언니가 먼저요

다혜.: 나는 원래 먼저 안 보내는데.

은재: 그러니까요. 그날은 먼저 해주세요

다혜.: 알겠어요.

다혜.: 나도 하나.

은재: 네

다혜.: 끝나고 은재가 나한테 뭐가 좋았고 뭐가 아니었는지 말해줘요. 정직하게. 나 처음이라서 그거 없으면 다음에 못 고쳐요.

다혜.: 좋았다고만 하지 말고.

은재: 알겟어요. 정직하게

다혜.: .

다혜.: 장소.

은재: 저희 집이요. 제가 집이 더 편할 것 같아요. 언니 괜찬으면

다혜.: 괜찮아요.

다혜.: 토요일 오후 3시.

은재: 밤 아니고요?

다혜.: 밝을 때 해요. 처음이니까. 밤에 하면 은재가 못 보는 게 많아져요. 나도.

은재: ……네

다혜.: 은재.

은재: 네

다혜.: 하나 더 물어볼게요.

다혜.: 은재가 나한테 원하는 게 하나 있으면. 리스트에 없는 거.

은재는 한참 생각했다. 리스트에 없는 거. 리스트는 사흘 동안 정직하게 썼다. 그런데 하나가 빠져 있었다. 리스트를 쓸 때는 다혜한테 안 보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다혜한테만 원하는 건 쓸 수 없었다.

은재: 언니가 절 이름으로만 불러주세요. 그날은. '씨' 빼고

은재: 저번에 택시 내리고 문자에서 그랬잖아요. 그거 계속요

다혜.: 알겠어요.

다혜.: 은재.

은재: 네

다혜.: 연습.

은재는 웃었다. 그리고 울 것 같았다. 둘 다 동시에.

다혜.: 끝났어요. 지도.

다혜.: 다시 그릴 거 있으면 토요일 전에 말해요. 언제든.

은재: 네. 언니도요

다혜.: 나는 하나 있어요.

은재: 뭐요?

다혜.: 나 손 떨릴 수 있어요. 처음이라서.

다혜.: 그거 보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

은재는 그 문장을 보고 진짜로 울었다. 조금. 왜 우는지 모르면서.

은재: 언니

은재: 그거 조건 아니에요. 그건 그냥 언니예요

다혜.: .

은재: !

은재: 잘 자요 언니

다혜.: 자요.

은재는 폰을 내려놓고 책을 봤다. 3장. 협상. 몇 주 전에 그린 물음표 옆에 은재는 연필로 작게 썼다. '토요일 3시.' 그리고 그 밑에 다혜가 한 말을 옮겼다. '따라오는 게 아니라 같이 확인하는 것.'

화요일부터 은재는 청소를 시작했다.

원룸이 넓지 않아서 하루면 끝날 청소를 나흘 동안 했다. 화요일에 바닥, 수요일에 침구 세탁, 목요일에 욕실, 금요일에 다시 바닥. 콜은 수요일에 있었는데 은재는 그날 질문을 하나만 했다. 모카가 "질문봇 고장남?"이라고 채팅을 쳤다.

금요일 밤, 은재가 바닥을 두 번째로 닦고 있을 때 #잡담에 짤이 하나 올라왔다.

밑줄 · #잡담

모카: (짤: 고양이가 걸레를 밟고 서 있음. 자막 '갑자기 청소하는 사람은 뭔가 있음')

모카: 이거 나임 근데 아무 일도 없음 ㅋㅋㅋㅋ

제이: 님은 원래 청소 안 하잖아

모카: 그래서 아무 일도 없다는 거

은재는 걸레를 들고 혼자 웃었다. 그리고 다혜가 이 채팅을 보고 있을지 생각했다. 다 본다고 했으니까 봤을 거였다. 그리고 지금 은재가 뭘 하고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다혜는 그런 걸 아는 사람이었다.

다혜. ↔ 은재

다혜.: 청소 그만하고 자요.

은재는 걸레를 놓았다.

은재: ……어떻게 알았어요

다혜.: 은재.

은재: 네

다혜.: 자요.

은재는 잤다. 아니, 누웠다. 내일 세 시. 열여덟 시간. 은재는 손목을 잡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