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만
세 시 정각에 벨이 울렸다.
은재는 문을 열기 전에 심호흡을 세 번 했다. 문을 열었다. 다혜가 서 있었다. 검은 니트가 아니라 회색 셔츠였고, 손에는 편의점 봉지가 하나 들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다혜가 봉지를 내밀었다. 은재가 받아서 열어봤다. 바나나우유 두 개.
"책에 당 보충 나와서."
은재는 웃음이 터졌다. 긴장이 반쯤 빠져나갔다. 다혜는 웃지 않았는데 눈이 조금 풀렸다.
"들어와요, 언니."
원룸은 나흘 동안 닦은 그대로였다. 다혜는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 방을 한 번 봤다. 침대, 책상, 러그, 책상 위의 노트. 다혜의 눈이 노트에서 멈췄다. 펼쳐져 있었다. 그 페이지에 캡처가 붙어 있었다. '협상은 계약이 아니라 지도예요.' 그리고 그 밑에 '네.'
다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 봤다.
두 사람은 러그에 앉아서 보리차를 마셨다. 처음 십 분은 수요일 콜 얘기를 했다. 하루가 한 질문, 제이가 반박한 것, 모카가 올린 짤. 은재는 자기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다는 걸 알았고 다혜는 평소보다 더 말이 없었다. 둘 다 서로가 그렇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다혜가 컵을 내려놓았다.
소리가 났다. 유리컵이 나무 바닥에 닿는 소리. 아주 작은 소리인데 은재는 그 소리에서 방의 공기가 바뀌는 걸 느꼈다. 다혜가 컵을 내려놓는 방식이 달라졌다. 정확히 필요한 자리에, 정확히 필요한 힘으로.
"은재."
"…네."
"일어나."
은재는 일어났다.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정모 때 그 맥주집에서처럼.
다혜는 앉은 채로 은재를 올려다봤다. 그 눈이 정모 때 미닫이문에서 은재를 찾던 눈이었다. 알아보려고.
"옷 벗어. 천천히. 내가 보게."
목소리는 낮았고 느렸다. 명령문인데 명령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냥 다음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명령이었다.
은재는 니트 밑단을 잡았다. 손이 떨렸다. 천천히. 다혜가 천천히라고 했으니까 천천히 올렸다. 머리 위로 벗고 바닥에 놓았다. 다혜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바지 단추를 풀었다. 지퍼. 다혜의 눈이 은재의 손을 따라 내려갔다. 청바지를 벗었다. 브라. 팬티.
다 벗고 나서 은재는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손 내려."
내렸다.
다혜는 아무 말 없이 은재를 봤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서두르지 않고. 은재는 밝은 방에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보인 적이 없었다. 밝을 때 해요. 은재가 못 보는 게 많아져요. 나도. 다혜는 지금 다 보고 있었다.
"무릎."
은재는 러그에 무릎을 꿇었다.
다혜가 일어났다. 은재는 그 소리를 들었다. 다혜가 은재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뒤에서 멈췄다. 은재는 등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다혜의 손이 머리에 닿았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다음 손이 턱으로 내려와서 얼굴을 위로 들었다. 은재는 다혜를 올려다봤다.
"색깔."
"초록."
"좋아."
손이 턱에서 목으로, 목에서 쇄골로 내려왔다. 손가락 끝만으로. 쇄골을 따라 한 번 그리고, 어깨를 지나서, 팔을 타고 내려와서 손목을 잡았다. 한 바퀴. 엄지가 맥 위에.
"빠르네."
"…네."
"괜찮아. 그게 맞아."
다혜가 은재 앞으로 왔다. 무릎을 꿇은 은재 앞에 서서, 두 손으로 은재의 가슴을 잡았다. 그냥 잡았다. 무게를 재는 것처럼. 그리고 엄지로 젖꼭지를 한 번 스쳤다.
은재의 숨이 끊겼다.
"소리 내도 돼."
다혜가 말했다. 엄지가 다시 스쳤다.
"참지 마. 참는 건 다른 데서 할 거야."
다혜가 젖꼭지를 잡고 비틀었다. 세게 아니었다. 그런데 은재는 소리를 냈다. 참지 말라고 했으니까. 다혜가 그 소리를 듣고 조금 더 비틀었다. 은재의 허리가 앞으로 나갔다.
"가만히."
은재는 가만히 있으려고 했다. 다혜는 은재의 젖꼭지를 두 손으로 잡고 굴리고 당기고 놓고 다시 잡았다.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 은재는 몰랐다. 다혜는 급하지 않았다. 다혜는 한 번도 급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다혜가 침대 끝에 앉았다.
"이리 와. 무릎으로."
은재는 무릎으로 다혜 앞까지 갔다. 다혜의 두 다리 사이에. 다혜는 셔츠를 입은 채였고 청바지를 입은 채였고 은재는 아무것도 안 입은 채로 그 사이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차이가 은재를 더 젖게 했다.
"다리 벌려."
은재는 무릎 사이를 벌렸다.
다혜의 손이 내려왔다. 은재의 허벅지 안쪽을 타고 올라와서, 멈췄다. 손가락 하나가 은재를 갈랐다.
"젖었네."
은재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고개를 숙이려고 했는데 다혜의 다른 손이 턱을 잡았다.
"좋은 거야. 숨기지 마."
손가락이 움직였다. 아주 천천히. 클리토리스 위를 한 번, 그 아래로 한 번, 다시 위로. 은재는 다혜의 무릎을 잡았다. 청바지 천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셀 거야."
다혜가 말했다.
"내가 넣을 때마다 세. 소리 내서. 하나부터."
손가락이 들어왔다.
"하…나."
빠져나갔다가 다시.
"둘."
은재는 셌다. 셋. 넷. 다혜의 손가락은 한 번 들어올 때마다 조금씩 깊어졌고 다섯에서 두 개가 됐다. 은재는 "다섯"을 말하다가 소리가 갈라졌다. 여섯. 일곱. 손가락이 안에서 구부러졌다. 여덟. 은재의 허리가 움직이려고 했다.
"움직이지 마. 내가 움직여."
아홉. 열.
다혜가 손을 멈췄다.
손가락은 안에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은재는 그 안에서 자기가 다혜의 손가락을 조이는 걸 느꼈다. 멈추지 말라고 몸이 말하고 있었다.
"언니……"
"안 돼."
"…네."
"내가 하라고 하기 전엔."
다혜가 손가락을 뺐다. 은재는 소리를 냈다. 참지 말라고 했으니까. 다혜는 그 소리를 듣고, 젖은 손가락으로 은재의 클리토리스를 아주 가볍게 한 번 눌렀다가, 뗐다.
"다시. 하나부터."
두 번째는 더 힘들었다.
은재는 셌다. 하나. 둘. 다혜의 손가락은 아까보다 빨랐다. 셋. 넷. 다섯. 은재는 다섯에서 다혜의 무릎을 세게 잡았다. 여섯. 일곱. 다혜가 손바닥으로 클리토리스를 누르면서 안쪽을 눌렀다. 여덟. 은재는 "여덟"이 아니라 다른 소리를 냈다.
"여덟이야."
"여, 덜……"
"아홉."
"아홉……"
"열."
멈췄다.
"언니 제발."
은재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부끄러울 여유가 없었다. 다혜의 손가락이 은재 안에 있었고 은재는 거기 매달려 있었다.
"색깔."
"초록. 초록. 제발……"
다혜는 한참 은재를 봤다. 은재는 그 눈에서 다혜가 뭘 보고 있는지 알았다. 은재가 참는 걸. 다혜가 원한다고 했던 그거. 내가 하라고 하기 전까지 참는 거.
"이번엔 세지 마."
다혜가 말했다.
"그냥 느껴."
손가락이 움직였다. 이번엔 멈추지 않았다. 안쪽을 누르면서 손바닥으로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면서, 다혜의 다른 손이 은재의 손목을 잡았다. 한 바퀴. 엄지가 맥 위에. 은재는 그 엄지 밑에서 자기 맥이 얼마나 빠른지 다혜가 다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
은재는 왔다.
소리가 났다. 은재의 소리였다. 은재는 다혜의 무릎에 이마를 대고 다혜의 손가락 위에서 흔들렸다. 다리가 떨렸고 허리가 떨렸고 다혜는 손을 빼지 않았다. 다 끝날 때까지. 손목도 놓지 않았다. 은재가 다혜의 손가락을 조이는 게 느려질 때까지.
그리고 다혜가 은재를 들었다.
침대 위로. 담요가 은재를 덮었다. 다혜가 은재 뒤에 누웠다. 셔츠를 입은 채로. 팔이 은재의 허리를 감았다. 손바닥이 은재의 배 위에 놓였다.
은재는 떨고 있었다. 추운 게 아니었다. 그냥 몸이 그랬다. 다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은재의 배 위에 손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은재는 느꼈다.
그 손이 떨고 있었다.
다혜의 손이. 은재의 배 위에서. 아주 조금. 은재가 떠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다혜 것이었다.
나 손 떨릴 수 있어요. 처음이라서. 그거 보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
은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 손을 다혜의 손 위에 올렸다. 다혜의 손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떨었다. 은재는 그 위에 손을 두고 있었다.
삼십 분.
다혜가 일어나서 바나나우유를 가져왔다. 빨대를 꽂아서 은재 입에 댔다. 은재는 담요 속에서 그걸 마셨다. 웃음이 났다. "언니 이거 진짜 책에 나와요?" "당 보충은 나와. 바나나우유는 안 나와." "그럼 언니가 만든 거네요." "…응."
여섯 시에 컵라면을 끓였다. 두 사람은 러그에 앉아서 담요를 같이 덮고 먹었다. 은재는 아직 아무것도 안 입었고 다혜는 옷을 다 입었고 그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직하게."
다혜가 말했다. 라면을 다 먹고 나서.
"뭐가 아니었어."
은재는 생각했다. 정직하게. 좋았다고만 하지 말고.
"…언니가 제 뒤에 누운 거요."
다혜가 은재를 봤다.
"저 언니 얼굴 보고 싶었어요. 끝나고요. 근데 언니가 뒤에 있어서 못 봤어요."
다혜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억할게."
"네."
"다른 건."
"다 좋았어요. 진짜로요. 세는 거, 언니가 멈추는 거, 손목……"
은재는 담요를 조금 더 끌어올렸다.
"제발이라고 한 거요. 저 그거 할 줄 몰랐어요. 언니가 시켰어요."
"안 시켰어."
"시켰어요. 멈춰서."
다혜가 아주 조금 웃었다. 은재는 그걸 처음 봤다.
아홉 시에 다혜가 일어났다.
"내일 아침에 문자할게. 내가 먼저."
"네."
"자기 전에 물 한 잔 더 마시고."
"네."
다혜가 신발을 신었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돌아봤다.
"은재."
"네."
"잘했어."
문이 닫혔다.
은재는 담요를 두르고 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잘했어. 두 글자. 그게 오늘 다혜가 한 말 중에 제일 낮은 목소리였다. 마침표가 아니라 그냥 끝. 은재는 그 두 글자를 손목에 감고 침대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