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주세요

그 주 수요일 챕터는 뉴 바터밍 북 7장, 애프터케어였다.

은재는 지난주 DM에서 다혜에게 그 챕터가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론은 알겠는데 그림이 안 그려진다고. 끝난 뒤에 안아주고 물 주고 담요 덮어주는 건 알겠는데, 그게 왜 '플레이의 일부'인지, 그냥 친절한 게 아니라 왜 구조의 일부인지 모르겠다고.

다혜는 그때 "수요일에 들어봐요."라고만 했다.

밤 열 시. 음성채널.

"이번 장은 좀 다르게 해볼게요."

율이 말했다.

"요약 말고 낭독. 문단 나눠서 돌아가면서 읽을게요. 이 장은 요약하면 다 날아가는 장이라서요. 읽는 사람 손 들어주세요. 아, 마이크 켜면 손 든 걸로."

"저요."

제이가 먼저 켰다. 그다음 하루가 떨리는 목소리로 "저도 해볼게요" 했다. 모카가 "나 발음 안 좋은데" 하면서 켰다.

은재도 켰다. "저요."

그리고 잠깐 정적이 있었다.

밑줄 · #수요-밑줄-채팅

모카: 다혜님 8개월째 잠수 ㅋㅋㅋ 오늘도 관엽식물 컨셉 유지

제이: 모카님 그만ㅋㅋ

하루: 다혜님 채팅은 하시던데

은재는 채팅을 보면서 이상하게 화가 났다. 관엽식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여덟 달 동안 여러분이 못 알아들은 질문에 저 사람만 답했다고. 그런데 그건 은재가 말할 게 아니었다.

"강요는 안 할게요. 읽을 사람은 충분—"

마이크 아이콘이 하나 더 켜졌다.

"…저도 할게요."

은재는 노트 위에 올려둔 손을 멈췄다.

낮은 목소리였다. 생각보다 낮았다. 그리고 느렸다. 급하게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문장 끝을 정확한 자리에 내려놓는 목소리. 채팅의 마침표가 그대로 소리가 된 것 같았다.

밑줄 · #수요-밑줄-채팅

모카: ????????

모카: 관엽식물이 말을 함

제이: 오 다혜님 목소리 처음 들음

하루: 안녕하세요!!!

"다혜님 감사해요."

율은 별일 아니라는 듯 넘어갔다. 은재는 그게 고마웠다.

"그러면 순서대로. 제이님부터."

낭독이 시작됐다. 제이는 빠르고 정확했다. 하루는 두 번 더듬었고 모카는 중간에 "아 이 단어 뭐라고 읽어요" 하고 물어서 다들 웃었다. 은재 차례에는 자기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려서 한 문단 읽는 동안 세 번 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혜.

"애프터케어는 플레이가 끝난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첫 문장에서 은재는 형광펜을 놓았다.

"플레이 중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무게를 넘겨준다. 몸의 무게가 아니라, 결정의 무게, 판단의 무게,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의 무게를. 그것을 받은 사람은 플레이가 끝났다고 해서 그 무게를 바닥에 내려놓지 않는다. 천천히, 상대가 다시 자기 발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받쳐 든 채로 기다린다."

다혜는 급하지 않았다. 쉼표에서 진짜로 쉬었고 마침표에서 진짜로 멈췄다. 은재는 그 사이의 침묵에서 다혜가 숨을 고르는 소리를 들었다. 이어폰을 꽂고 있어서 그 소리가 귀 바로 안쪽에서 났다.

"그러므로 애프터케어는 친절이 아니다. 그것은 넘겨받은 것을 돌려주는 방식이다. 떨어지는 사람을 받쳐주는 것, 그것이 처음부터 이 일의 절반이었다."

낭독이 끝났다.

"…와."

모카였다. 처음으로 밈을 붙이지 않았다.

"다혜님 목소리 좋으시네요."

제이가 말했고 하루가 "진짜요" 하고 따라 붙였다. 율이 "감사해요. 다음 문단 은재님" 하고 진행을 이어갔는데 은재는 자기 차례라는 걸 삼 초 뒤에 알았다.

"아, 네. 죄송해요."

은재는 읽었다. 무슨 문단이었는지 나중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콜은 열한 시 반에 끝났다. 은재는 노트북을 닫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귓속에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목소리가 아니라 목소리의 속도가. 쉼표에서 진짜로 쉬는 방식이. 은재는 눈을 감고 그 속도를 따라 다혜의 문장을 다시 들어봤다. 그것을 받은 사람은 그 무게를 바닥에 내려놓지 않는다.

받쳐 든 채로 기다린다.

은재는 자기가 뭘 상상하고 있는지 알아채기 전에 이미 상상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은재한테 말하는 것. 같은 속도로. 같은 마침표로. '천천히.' '거기까지.' '기다려.' 문장이 짧을수록 좋았다. 다혜는 긴 문장을 쓰지 않으니까.

은재는 이불 속에서 잠옷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미 젖어 있었다. 그게 조금 창피했고, 창피한 게 더 뜨거웠다. 은재는 팬티 위로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급하게 하지 않았다. 다혜의 속도로. 쉼표에서 쉬고.

'천천히.'

손가락을 팬티 안으로 넣었다. 미끄러웠다. 클리토리스를 검지 끝으로 아주 조금만 눌렀다. 다혜라면 조금만 하라고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만하라고 하기 전까지 그 조금만을 유지하라고.

'거기까지.'

은재는 손가락을 멈췄다. 숨이 가빠졌다. 멈춘 채로 속으로 셋을 셌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시킨 것처럼 셌다. 셋이 되기 전에 손가락이 움직이려고 해서 다른 손으로 손목을 잡았다.

손목.

그 자리가 이상하게 뜨거웠다. 은재는 자기 손목을 잡은 자기 손의 힘을 다혜의 손이라고 생각해봤다. 다혜가 어떤 손을 가졌는지 모르는데, 상관없었다. 손목을 잡고 '기다려.'라고 하는 손이면 됐다.

'기다려.'

셋. 넷. 다섯.

'이제.'

은재는 손가락을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조금만이 아니었다. 두 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면서 다른 손은 손목에서 떼지 않았다. 다리가 이불 속에서 뻣뻣해졌다. 소리가 날 것 같아서 은재는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어 입을 막았다. 원룸이었다. 벽이 얇았다.

목소리가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떨어지는 사람을 받쳐주는 것.

은재는 손바닥 안으로 소리를 내면서 왔다. 허리가 들렸다가 떨어졌고 다리가 몇 번 떨렸다. 손가락은 한참 뒤에야 뺐다. 천장이 어두웠다.

그리고 바로 창피해졌다.

같은 스터디 사람이었다. 책을 읽어준 것뿐이었다. 그 사람은 지금 은재가 무슨 생각으로 자기 목소리를 들었는지 모른다. 알면 안 된다. 은재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그런데 이불 속에서 손가락에 아직 미끄러운 게 남아 있어서 창피함이 오래가지 못했다. 몸은 창피해하지 않았다. 몸은 그냥 좋았다.

새벽 한 시 이십 분에 은재는 폰을 들었다.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안 보내면 이 밤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다혜. ↔ 은재

은재: 목소리 좋으시더라구요

보냈다. 최대한 평범하게. 모카도 제이도 한 말이니까.

답은 바로 왔다. 다혜도 안 자고 있었다.

다혜.: .

다혜.: 고마워요. 처음 켜봤어요.

은재: 알아요 8개월 만에

은재: 왜 오늘요?

다혜.: 은재 씨가 애프터케어 챕터 어렵다고 했잖아요. 지난주에.

다혜.: 그림이 안 그려진다고.

다혜.: 요약하면 날아가는 장이라서 읽는 게 낫겟다고 생각했어요.

은재는 폰을 든 채로 한참 멈춰 있었다.

그러니까 여덟 달 동안 켜지 않은 마이크를, 은재 한 사람이 한 챕터를 어려워한다는 이유로 켰다는 거였다. 다혜는 그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세 줄로 말했다. 오타까지 있었다. 다혜는 오타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은재를 더 이상하게 했다.

은재: 그림 그려졌어요

은재: 이제 알겠어요 그게 왜 친절이 아니라 구조인지

다혜.: 다행이에요.

은재: 언니

다혜.: 네.

은재: 아니에요 잘 자요

다혜.: 잘 자요.

은재는 폰을 엎어놓았다. '언니' 뒤에 쓰려던 말은 쓰지 않았다. 그 말은 채팅으로 할 게 아니었다. 아니, 아직은 어디서도 할 게 아니었다.

대신 은재는 이불 속에서 다시 손목을 만졌다. 아무 자국도 없는 자기 손목을. 거기 아무것도 없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