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
밑줄 서버에는 수요일 콜 말고도 나름의 생태계가 있었다.
#잡담 채널은 모카의 영역이었다. 모카는 하루에 짤을 열 개쯤 올렸고 그중 셋은 고양이였다. #밑줄-공유는 각자 읽다가 그은 문장을 사진으로 올리는 채널이었는데, 제이가 형광펜으로 세 줄씩 긋고 "이건 현실이랑 다름"이라고 반박을 달아두는 곳이기도 했다. #질문은 사실상 은재의 개인 채널이었다. 모카가 "질문봇 전용 채널 개설했음"이라고 만들었는데 정말로 은재 말고는 아무도 안 썼다.
그리고 현이 있었다.
현은 원래 콜에 가끔 들어오는 사람이었다. 서른둘, 태그는 돔, 자기소개 채널에 "실전 6년, 이론은 여기서 보충"이라고 써둔. 말이 많지는 않은데 말을 하면 다들 조금 조용해지는 사람이었다. 경험이 있다는 게 목소리에서 났다.
그 현이 그 주부터 은재의 질문에 답을 달기 시작했다.
밑줄 · #질문
은재: 5장에서 온라인 D/s 얘기 나오잖아요. 만난 적 없는 사람 사이에도 진짜 D/s가 성립한다는 부분요. 저는 이게 맞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그러면 뭐가 다른지 모르겟어요. 그냥 롤플레잉이랑 뭐가 달라요?
제이: 다르긴 뭐가 달라. 몸이 없는데.
모카: 제이님 또 시작
제이: 아니 진짜로. 무게 넘겨준다 어쩐다 하는데 만난 적도 없으면 뭘 넘겨줌. 텍스트 넘겨주는 거지
모카: 그러면 편지로 연애한 사람들은 다 연애 안 한 거임?
제이: 연애랑 D/s가 같냐
모카: 몰라 나 지금 개똥철학 짤 찾는 중
현: 은재님 질문 좋다. 롤플레잉이랑 다른 지점은 '취소 가능성'이에요. 롤플레잉은 끝나면 없던 일이 되는데 D/s는 끝나도 관계에 남아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이건 글로 하기 아까운 얘기라 나중에 따로 얘기해줄게요.
은재: 아 감사합니다!! 취소 가능성… 메모
은재는 "나중에 따로"가 조금 걸렸지만 그냥 고맙다고 했다. 현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경험 있는 사람이 경험 없는 사람한테 설명해주는 것. 이 방의 목적이 그거였다.
그런데 은재는 그날 밤 DM을 확인하면서 다혜가 #질문에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걸 알았다. 다혜는 은재의 질문에는 항상 뭐라도 썼다. 한 줄이라도.
열두 시가 넘어서 DM에 사진 한 장이 왔다.
책 페이지였다. 종이가 조금 누렇고 여백에 연필 자국이 있었다. 문장 하나에 연필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형광펜이 아니라 연필로, 한 번에, 자를 댄 것처럼 곧게.
'본인이 원하는 것을 모르면 협상은 상대의 것이 된다. 상대가 아무리 선의여도.'
다혜. ↔ 은재
다혜.: 은재 씨. 과제.
은재: ??? 과제요???
다혜.: 다음 수요일까지. 본인 리밋 리스트.
다혜.: 하드 / 소프트 / 궁금한 것. 세 칸.
다혜.: 나한테 보내지 말고. 본인용.
은재: 아 ㅋㅋㅋㅋ 언니 갑자기 선생님
다혜.: 5장 질문 답이에요.
다혜.: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본인이 뭘 원하는지 모르면 다 남의 거예요. 그거부터 알아야 해요. 롤플레잉이랑 뭐가 다른지는 그다음에.
은재는 사진을 확대해서 연필 밑줄을 봤다. 자를 댄 것처럼 곧은데 자를 댄 게 아니었다. 손이 곧은 거였다.
은재: 왜 언니한테 보내지 말라고 해요?
다혜.: 나한테 보여줄 걸 쓰면 나한테 맞춰서 쓰게 되니까요.
다혜.: 본인만 볼 거라고 생각하고 써야 진짜 나와요.
은재: ……알겟어요. 할게요
다혜.: .
은재: !
은재는 사흘 동안 그 리스트를 썼다.
처음엔 쉬울 줄 알았다. 3년 전 그날 이후로 자기가 뭘 싫어하는지는 안다고 생각했다. 하드 칸에 첫 줄을 썼다. '노랑을 무시하는 것.' 그런데 그건 리밋이 아니라 그냥 규칙 위반이었다. 지웠다.
다시 썼다. 하드: 사진. 영상. 실명 부르는 것. 목 조르는 것. 이건 확실했다.
소프트에서 막혔다. '눈 가리기'를 썼다가 지웠다가 다시 썼다. 무서운데 무서운 게 싫은 건 아니었다. 이게 소프트인지 궁금한 것인지 모르겠어서 은재는 노트를 덮고 하루를 보냈다.
목요일 밤에 다시 열었다. '눈 가리기' 옆에 '(무서움. 근데 왜 무서운지 모름)'이라고 썼다. 그렇게 쓰고 나니 그건 소프트가 맞았다. 무서운 이유를 모르는 건 아직 열어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궁금한 것 칸은 제일 어려웠다. 은재는 그 칸을 쓰면서 자기가 지금 누구를 생각하며 쓰는지 알았다. 보여줄 게 아니라고 했는데도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더 정직하게 쓰려고 했다. 그 사람은 정직하지 않은 문장을 알아볼 테니까.
궁금한 것.
1. 이름을 불리는 것. 명령할 때. (별명 아니고 이름.)
2. 셈. 숫자 세라고 하는 것. 소리 내서.
3. 손목. 잡히는 것. 세게 아니어도. 그냥 잡고 안 놔주는 것.
3번을 쓰고 은재는 펜을 놓았다. 지난주 밤에 자기 손목을 자기가 잡았던 게 떠올랐다. 그건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 거였다. 다혜한테 보내지 않을 리스트라서 쓸 수 있었다.
금요일 밤. 리스트가 끝났다. 하드 다섯 줄, 소프트 네 줄, 궁금한 것 여섯 줄. 은재는 노트를 사진으로 찍었다.
그리고 찍은 사진을 한참 봤다.
보내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보내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다혜가 이걸 보는 게 아니라, 다혜가 '이걸 봤다'는 상태가 되는 게 필요했다. 3번을 다혜가 아는 상태. 은재가 이걸 썼다는 걸 다혜가 아는 상태.
은재는 한 시간을 망설이다가 보냈다.
다혜. ↔ 은재
은재: (사진)
은재: 언니
은재: 다 썼어요
한참 답이 없었다. 은재는 폰을 엎어놨다가 뒤집었다가 엎어놨다. 십오 분.
다혜.: 안 보내도 된다고 했는데.
은재: 봐주세요.
입력 중… 이 떴다가 사라졌다. 다시 떴다. 다시 사라졌다. 은재는 그 '입력 중…'이 뜨고 사라지는 걸 보면서 심장이 목 밑까지 올라와 있는 걸 느꼈다. 다혜가 무슨 말을 고르고 있다. 다혜는 말을 고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정해진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다혜.: 봤어요.
다혜.: 잘 썼어요.
은재는 숨을 내쉬었다.
다혜.: 궁금한 것 3번.
은재의 손이 멈췄다.
다혜.: 왜 궁금해요?
은재는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그냥 궁금하다고, 책에서 봤다고. 그런데 이 사람은 거짓 문장을 알아본다. 그리고 이 사람한테 안 보낼 거라고 생각하고 쓴 문장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거짓말을 하면 리스트 전체가 거짓이 됐다.
은재: 지난주에요
은재: 언니가 책 읽어준 날 밤에
은재: 제가 혼자 제 손목을 잡았어요. 다른 손으로. 왜 그랬는지 모르겟는데 그게 제일 좋았어요. 그래서요
보내고 나서 은재는 폰을 던지고 싶었다. 이건 사실상 그날 밤 뭘 했는지 말한 거였다. 다혜는 바보가 아니었다.
답은 삼십 초 뒤에 왔다.
다혜.: 알겠어요.
다혜.: 기억할게요.
은재는 침대에 누워서 그 두 줄을 봤다.
기억할게요.
그 말은 손 같았다. 은재가 쓴 걸 다혜가 손으로 집어서 어딘가에 넣어두는 것. 그리고 그 어딘가는 다혜만 아는 곳이고, 다혜는 필요할 때 그걸 꺼낼 거고, 그때 은재는 자기가 이걸 썼다는 사실을 다시 만날 거다.
은재는 그 상상만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다혜.: 은재 씨.
은재: 네
다혜.: 과제 하나 더.
다혜.: 다음 콜까지 현님 답변에 "나중에 따로"가 왜 필요한지 생각해봐요. 글로 못 할 얘기가 있는 건지, 글로 안 하고 싶은 건지.
은재는 눈을 깜빡였다.
은재: ……언니 봤어요? #질문
다혜.: 다 봐요.
다혜.: 잘 자요.
은재: 잘 자요
은재는 폰을 끄고 어두운 천장을 봤다. 다 본다. 다혜는 여덟 달 동안 말을 안 하고 다 봤다. 은재의 질문을, 다른 사람들의 대답을, 대답이 질문 옆을 어떻게 지나가는지를.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그 옆을 지나간 사람 하나를 은재한테 짚어줬다. 손가락으로 가리키지도 않고, 그냥 생각해보라고만 해서.
은재는 그게 무서웠다. 좋은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