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모 공지

밑줄 · #공지

율: 밑줄 첫 오프라인 정모 합니다.

율: 날짜: 다음 주 토요일 저녁 7시
장소: 합정, 이자카야 (안쪽 룸 예약, 상세 주소는 참석자에게 DM)
인원: 8명까지
규칙: 실명 안 묻기, 사진 안 찍기, 취해서 남 태그 캐묻지 않기. 오프라인이어도 여기 규칙 그대로 갑니다.
참석은 이 메시지에 이모지로.

공지가 올라온 건 목요일 오후 세 시였고, 은재는 회사 화장실에서 그걸 봤고, 삼 초 안에 이모지를 눌렀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너무 빨랐다. 공지 올라온 지 삼 초 만에 누른 사람은 누구든 알 수 있었다.

밑줄 · #잡담

모카: 정모?????? 나 감 나 무조건 감

모카: 드레스코드: 아무도 서로 알아보면 안 됨

제이: 그건 드레스코드가 아니라 그냥 상황임

하루: 저 가도 돼요…? 저 신입인데

율: 신입이라서 오시면 더 좋아요.

현: 갑니다. 차 가져가니까 늦게 끝나면 태워드릴게요.

모카: 은재님 이모지 속도 개빠름 ㅋㅋㅋㅋ 공지 뜨자마자 눌렀네

은재: 아 ㅋㅋㅋㅋㅋ 그냥 눌렀어요

은재는 이모지 누른 사람 목록을 열어봤다. 율, 모카, 제이, 하루, 현, 은재.

다혜는 없었다.

퇴근하고 지하철에서 다시 봤다. 없었다. 집에 와서 봤다. 없었다. 은재는 저녁을 먹으면서 다혜가 원래 이런 걸 누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여덟 달 동안 마이크도 안 켠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이크는 켰다. 3주 전에. 은재 때문에.

밤 아홉 시에 결국 DM을 보냈다.

다혜. ↔ 은재

은재: 언니 정모 가요???

답이 없었다. 다혜는 답이 늦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 줄이어도 십 분 안에는 왔다.

열 시. 열한 시. 은재는 폰을 세 번 재부팅했다.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알면서.

새벽 한 시 십 분에 답이 왔다.

다혜.: 고민 중.

은재: 왜요

다혜.: 나 거기 가서 할 말이 없어요.

다혜.: 다들 경험 얘기할 텐데. 제이님도 현님도. 나는 책 얘기밖에 못 해요.

은재는 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걸 처음 봤다. 다혜는 '모르니까요' 같은 말은 했다. '해본 게 없어서'도 했다. 그건 사실이었고 다혜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할 말이 없어요'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건 무서운 사람이 하는 말이었다.

은재: 언니

은재: 저도 책 얘기밖에 못 해요. 저 경험 한 번 있는데 그거 얘기 안 할 거잖아요

은재: 그리고 저는 경험 얘기 들으러 가는 거 아니에요

다혜.: 그럼 뭐 하러 가요.

은재: 언니 보러 가는 건데요

보내고 나서 은재는 숨을 멈췄다. 이건 너무 직접적이었다. 은재는 직접적인 문장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혜랑 얘기하면 자꾸 그렇게 됐다. 다혜가 문장을 끝내니까 은재도 끝내게 됐다.

'입력 중…'이 떴다.

사라졌다.

떴다.

다혜.: …갈게요.

은재는 침대에서 소리 없이 발을 찼다. 그리고 이모지 목록을 다시 열었다. 새벽 한 시 십칠 분에 다혜의 이모지가 추가됐다. 은재는 그 시각을 캡처했다.

다혜.: 조건이 있어요.

은재: 뭔데요

다혜.: 나 거기서 말 안 해도 은재 씨가 이상하게 생각 안 하기.

은재: 언니가 말 안 하는 건 언니 기본값인데 뭘 이상하게 생각해요 ㅋㅋㅋㅋ

다혜.: .

은재: !

은재: 잘 자요 언니. 온다고 해줘서 고마워요

다혜.: 은재 씨가 오라고 했잖아요.

다혜.: 잘 자요.

금요일 아침에 은재는 다른 DM을 받았다.

현 ↔ 은재

현: 은재님 정모 가죠? 이모지 속도 보고 웃었어요 ㅋㅋ

은재: 아 ㅋㅋㅋ 네 가요

현: 어디 살아요? 대충 방향만. 끝나고 늦으면 데려다줄게요. 합정에서 대중교통 끊기면 택시비 아까우니까

은재: 아 저는 괜찬아요! 그렇게 안 늦을 것 같아서요

현: 그래도 여자 혼자 밤에 위험하니까. 편하게 말해요.

은재: 감사해요 근데 진짜 괜찬아요 ㅎㅎ

은재는 폰을 내려놓고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현은 친절했다. 이 서버에서 제일 경험 많은 사람이 신입한테 차를 태워주겠다고 하는 건 아무 문제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은재는 거절하면서 죄책감을 느꼈고, 그 죄책감이 이상했다. 은재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지난주 다혜가 준 과제가 떠올랐다. '나중에 따로'가 왜 필요한지. 글로 못 할 얘기가 있는 건지, 글로 안 하고 싶은 건지.

은재는 현이 여자 혼자 밤에 위험하다고 한 문장을 다시 봤다. 이 서버에는 여자가 여러 명이었다. 제이도 하루도 율도 아마 여자였다. 현은 그 사람들한테 DM을 보냈을까.

모르겠다. 은재는 그냥 그 창을 닫았다.

토요일 아침부터 은재는 옷장을 열어놓고 살았다.

'아무도 알아보면 안 됨'이라는 모카의 드레스코드가 자꾸 생각났다. 그건 농담이었다. 그런데 은재는 진짜로 뭘 입어야 할지 몰랐다. 스터디 정모에 입고 가는 옷이 뭔지 몰랐다. 소개팅도 아니고 회식도 아니고 동창회도 아니었다. 디스코드에서 여덟 달 동안 책 얘기만 한 사람들을 처음 만나는 자리. 그 사람들 중 한 명은 은재가 새벽에 그 목소리로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

검은 바지랑 하늘색 셔츠를 입어봤다. 너무 회사 같았다. 원피스를 입어봤다. 너무 소개팅 같았다. 청바지에 니트를 입어봤다. 이건 그냥 평소 은재 같았고, 그래서 결국 그걸로 정했다.

토요일 밤 열한 시에 DM이 왔다.

다혜. ↔ 은재

다혜.: 내일 뭐 입어요?

은재는 침대에 앉아서 그 메시지를 봤다. 다혜가 먼저 보낸 DM은 지금까지 두 번이었다. 과제 사진, 그리고 이거.

은재: 왜요 ㅋㅋㅋㅋ

다혜.: 알아보려고.

은재는 웃었다. 그리고 웃음이 멈추고 나서도 한참 그 두 글자를 봤다. 알아보려고. 여덟 명이 있는 방에 들어가서 은재를 먼저 찾으려고.

은재는 청바지에 니트를 입고 전신거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얼굴은 잘랐다. 사진 금지가 규칙이었고, 얼굴은 아직 아니었다. 니트 목선부터 운동화까지만.

은재: (사진)

은재: 이렇게요. 그냥 평소 저예요

한참 답이 없었다. 은재는 사진을 다시 봤다. 니트가 너무 헐렁한가. 바지가 너무 평범한가. 다혜는 이런 데 관심 없는 사람인데 왜 물었을까.

다혜.: .

다혜.: 예쁘네요.

은재는 폰을 가슴에 대고 침대에 쓰러졌다.

다혜는 예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형용사를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침표를 먼저 찍고, 그다음에 예쁘다고 했다. 그건 말을 고르고 나서 정한 거였다. 다혜는 정하지 않은 말을 하지 않으니까.

은재: 언니는요

다혜.: 나는 검은색.

은재: 그게 다예요???

다혜.: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다혜.: 잘 자요.

은재: 못 자요

다혜.: 자요.

두 글자였다. 명령문. 은재는 그걸 보고 진짜로 눈을 감았다. 자라고 하니까. 물론 자지 못했다. 새벽 세 시까지 천장을 보고 있었고, 그 사이에 자기가 다혜의 목소리를 실제로 듣게 될 거라는 사실을 열 번쯤 다시 깨달았다.

이어폰 밖에서. 마침표를 진짜 공기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