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밤 열 시, 마이크는 꺼두세요

디스코드 서버 '밑줄'의 고정 공지는 여덟 달 전 그대로였다.

밑줄 · #공지

율: 매주 수요일 밤 10시, 음성채널 '수요 밑줄'. 한 주에 한 챕터. 마이크는 말할 때만 켭니다. 실명·직장·얼굴 금지. 경험 없는 사람한테 경험 강요 금지. 이론 얘기하러 모인 방이니까 이론 얘기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은재는 그 공지를 처음 읽던 날 밤을 기억한다. 다른 앱에서 딱 한 번, 별로 좋지 않게 끝난 경험 뒤에 도망치듯 찾아 들어온 곳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방이 아니라 책을 읽는 방이라는 게 안심이 됐다. 책은 리밋을 무시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여덟 달이 지난 지금, 은재는 이 서버에서 '질문봇'이라는 역할을 달고 있었다. 모카가 장난으로 만들어 붙여준 노란색 역할이었다. 부끄러웁긴 한데 떼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밤 아홉 시 오십칠 분. 은재는 은평구 원룸 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무릎에 올리고, 왼손에는 형광펜을 들고 있었다. 이번 주 챕터는 뉴 토핑 북 3장, 협상. 미리 두 번 읽었고 포스트잇을 여섯 개 붙였다.

음성채널에 사람들이 하나씩 들어왔다. 율, 모카, 제이, 하루, 그리고 이름 끝에 마침표가 붙은 사람.

다혜.

은재는 그 사람이 마이크를 켜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여덟 달 내내 음성채널에는 꼬박꼬박 들어와 있는데, 말은 하지 않았다. 채팅도 거의 없었다. 프로필 태그는 '스위치'. 모카는 언젠가 "다혜님은 서버의 관엽식물"이라고 했고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자, 시작할까요."

율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낮고 차분했다. 서버장인 율은 목소리로만 아는 사람이었다. 나이도, 성별도 짐작만 할 뿐이었는데 그게 이 방의 규칙이라서 아무도 묻지 않았다.

"3장 협상. 다들 읽었죠. 제이님이 요약 맡아주셨는데."

"네. 짧게 할게요."

제이는 실전파였다. 말투에 '나는 이걸 해봤다'는 냄새가 있어서 은재는 제이의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위축됐다.

"핵심은 협상은 플레이 전에 끝내는 게 아니라 플레이 전체를 감싸는 거라는 거. 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 궁금한 것 세 칸으로 나누고, 신호 정하고, 끝난 뒤 뭐가 필요한지도 미리 정하고. 여기까지."

밑줄 · #수요-밑줄-채팅

모카: 근로계약서보다 빡셈 ㅋㅋㅋㅋ

하루: 저 처음 읽었는데 이거 진짜 다 하는 거예요…?

제이: 다 하는 사람도 있고 안 하는 사람도 있고

모카: 안 하는 사람은 여기 안 옴

은재는 형광펜을 입에 물었다가 뺐다. 손을 들 수 없는 방이라 그냥 마이크를 켰다.

"잠깐 질문 있어요."

"네, 은재님."

율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은재가 마이크를 켜면 다들 조금 웃는다. 그게 놀림은 아니라는 걸 알아서 은재도 웃었다.

"협상을 그렇게 다 했는데, 하는 중에 마음이 바뀌면요? 아니 그건 신호로 멈추면 되는 거고요. 제 질문은, 협상 끝나고 며칠 지나서 마음이 바뀌는 건요. 그때 '아 그거 하기 싫어졌어' 하면 이미 정해놓은 게 다 무효가 되는 거예요? 그럼 협상이라는 게 의미가 있나 싶어서요. 계속 바뀌는 걸 왜 굳이 문서로…"

"음."

율이 잠깐 생각했다.

"협상은 고정된 약속보다는 서로가 지금 어디 서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게 맞아요. 바뀌면 다시 얘기하는 거고요."

"그니까 그러면 다시 얘기하면 되는 거네요. 근데 그러면 처음 협상은 왜…"

"은재님 지금 뫼비우스 띠 타고 계심."

모카였다. 다들 웃었다. 은재도 웃었는데, 사실 답을 못 받은 기분이었다. 항상 그랬다. 질문을 하면 다들 친절하게 대답해주는데, 대답이 은재가 낸 질문의 옆을 지나갔다.

"일단 넘어갈게요. 다음, 하드 리밋과 소프트 리밋 구분이…"

율이 진행을 이어갔다. 은재는 마이크를 끄고 노트를 내려다봤다. 형광펜으로 그어놓은 문장 위에 물음표를 하나 더 그렸다.

그때 채팅창이 한 번 올라갔다.

밑줄 · #수요-밑줄-채팅

다혜.: 협상은 계약이 아니라 지도예요. 지도는 길이 바뀌면 다시 그려요. 다시 그릴 수 있으려면 처음 지도가 있어야 하고요.

은재는 화면을 봤다.

한 줄이었다. 문장 세 개. 마침표 세 개.

음성채널에서는 율이 하드 리밋 얘기를 하고 있었고, 모카가 채팅에 고양이가 절벽 끝에 서 있는 짤을 올렸고, 하루가 "ㅋㅋㅋㅋ" 하고 있었다. 다혜의 한 줄은 그 사이에 끼어 아무렇지 않게 위로 밀려 올라갔다.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은재만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처음 지도가 있어야 다시 그릴 수 있다. 그러니까 바뀌는 게 문제가 아니라, 바뀌었다는 걸 알아볼 수 있게 처음 걸 그려두는 거다. 은재가 물었던 건 바로 그거였다. 협상이 왜 필요하냐가 아니라, 바뀔 걸 알면서 왜 굳이 적어두냐. 그리고 이 사람은 은재의 질문 옆을 지나가지 않고 정확히 질문 위에 발을 올렸다.

은재는 스크롤을 올려서 그 줄을 다시 봤다. 다혜. 마침표.

여덟 달 동안 이 사람이 채팅을 쓴 걸 본 게 손에 꼽았다. 그런데 쓸 때마다 이런 식이었나. 은재는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관심이 없었으니까. 관엽식물이었으니까.

콜은 열한 시 이십 분에 끝났다.

"다음 주 4장. 안전과 신호. 하루님 요약 맡아주실 수 있어요?"

"네, 네! 해볼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씩 빠져나갔다. 다혜의 아이콘도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은재는 노트북을 닫지 못하고 한참 앉아 있었다. 열한 시 사십 분. 열한 시 오십 분. 형광펜 뚜껑을 열고 닫고 열고 닫았다.

다혜의 프로필을 눌렀다. 가입 여덟 달 전. 은재보다 삼 주 먼저였다. 태그 스위치. 상태 메시지 없음. 프로필 사진은 연필 한 자루가 책 위에 놓인 사진.

메시지 보내기.

은재는 입력창에 커서를 올렸다.

'아까 그 말'

지웠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죄송한데'

지웠다.

'저 질문봇인데요'

이건 좀 웃겨서 잠깐 뒀다가 지웠다.

열두 시 십 분에 결국 보냈다.

다혜. ↔ 은재

은재: 안녕하세요!! 아까 채팅에 쓰신 거, 지도 얘기요. 저 그거 스크린샷 해서 노트에 붙여도 돼요? 제가 물어본 거 딱 그거였는데 아무도 안 알아듣고 다혜님만 알아들으셔서요 ㅠㅠ

보내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ㅠㅠ'가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아니, 하나였다. 그래도 많은 것 같았다.

은재는 폰을 엎어놓고 씻으러 갔다. 나와서 폰을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에 누웠다. 열두 시 반. 열두 시 사십 분.

폰이 한 번 울렸다.

다혜. ↔ 은재

다혜.: .

은재는 그 마침표 하나를 삼 초쯤 보고 있었다. 이게 뭐지. 잘못 보낸 건가. 화난 건가.

그리고 오 초 뒤에 하나 더 왔다.

다혜.: 네.

은재는 어두운 방에서 폰을 가슴에 올려놓고 웃었다. 뭐가 웃긴지 모르겠는데 웃음이 났다. 마침표를 먼저 보내고 대답을 보내는 사람. 문장 끝을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찍고 싶은 사람.

'네.'

두 글자와 마침표 하나를 은재는 캡처했다. 지도 얘기랑 같이 노트에 붙일 생각이었다.

그날 밤 은재는 잠들기 전까지 다혜의 채팅 기록을 여덟 달 치 거슬러 올라가 읽었다. 스물세 줄이었다. 전부 저런 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