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틀린 날
형이 혼자 왔다. 수요일 오후 세 시. 브레이크 타임. 형수도 어머니도 없이. 형이 혼자 옥이네에 온 건 십일 년 만에 처음이었다.
"사장님, 잠깐 시간 되십니까."
형은 카운터 앞에 섰다. 앉지 않았다. 옥주가 장부에서 눈을 들었다.
"앉으세요."
형이 앉았다. 초록 의자에. 달그락. 형은 그 소리를 못 들었다. 성호는 들었다. 마늘을 까던 손이 멈췄다.
"회사에서요. 권고사직을……"
형은 말을 오래 했다. 성호는 마늘을 까면서 들었다. 마흔여섯에 권고사직. 퇴직금 육천. 치킨 프랜차이즈 가맹비 오천에 인테리어 이천에 보증금 이천. 삼천이 모자랐다. 은행은 안 됐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집은 형 명의로 돼 있는데 그건 팔 수 없었다. 어머니가 거기 살았다.
"은희는 몰라요. 여기 온 거."
형이 말했다. 성호는 형수 이름을 형 입에서 그렇게 작게 들은 게 처음이었다.
옥주는 다 들었다. 끊지 않고. 옥주는 손님이 고기 질 따질 때도 끝까지 듣는 사람이었다. 다 듣고 나서 옥주가 서랍을 열었다.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볼펜을 꺼냈다.
"차용증 쓰세요."
"……네?"
"삼천만 원. 무이자. 이십사 개월. 매달 백이십오만 원. 첫 달은 가게 오픈하고 석 달 뒤부터."
형이 옥주를 봤다. 성호도 봤다. 옥주는 장부 보던 얼굴 그대로였다.
"사장님……"
"성재 씨."
옥주가 볼펜을 카운터 위에 놓았다.
"내가 이십 년 전에 친정 오빠한테 돈 빌렸어요. 그때 오빠가 차용증 쓰라고 했어요. 무이자로. 나는 그때 서운했어요. 친오빠가 종이를 받나. 근데 그 종이 덕에 갚았어요. 종이가 없었으면 안 갚았을지도 몰라요. 사람이 그래요."
형이 볼펜을 잡았다. 손이 조금 떨렸다. 형 손이 떨리는 걸 성호는 처음 봤다.
"그리고 성재 씨."
"네."
"치킨은 튀기는 소리 들어야 돼요. 급하면 안 돼요."
"……네?"
"됐어요. 쓰세요."
형이 썼다. 이름, 주소, 금액, 날짜. 옥주가 그걸 받아 두 번 읽고 서랍에 넣었다. 장부 옆에. 그리고 은행 갈 채비를 했다. 카디건.
"성호야."
형이 성호를 불렀다. 옥주가 문을 밀고 나간 뒤에.
"응."
"너는 좋겄다."
"뭐가."
"마누라가 결정 다 해주고. 나는 은희한테 여기 온 것도 말 못 했어. 눈치 보느라. 너는 눈치 볼 게 없잖아. 시키는 대로 하면 되잖아. 잡혀 사는 게 편하긴 편하겄어."
형은 웃었다. 늘 하는 그 웃음. 아무 뜻 없이 하는 말. 부천으로 갖고 가는 말. 그런데 성호는 그날은 웃지 않았다.
"형."
"응."
"나 잡혀 살아. 형 말 맞아."
형이 성호를 봤다. 성호는 마늘을 놓았다. 손을 앞치마에 닦았다.
"근데 형이 생각하는 거랑 달라. 형은 형수 눈치 보잖아. 여기 온 것도 말 못 하고. 나는 눈치 안 봐. 사장님이 다 말해. 좋으면 좋다, 틀리면 틀렸다, 화나면 화났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하고, 틀리면 벌 받고, 맞으면 상 받아. 그게 잡혀 사는 거면 나는 잡혀 사는 게 좋아."
"……"
"형은 눈치 보면서 자유롭고, 나는 잡혀서 편해. 뭐가 나은 건지는 모르겄어. 근데 나는 이게 좋아. 형이 웃을 때마다 나도 웃었는데, 이제 안 웃을게. 형 말이 맞으니까. 맞는 말에는 안 웃어도 되잖아."
형은 오래 말이 없었다. 초록 의자가 달그락거렸다. 형이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벌 받는다고?"
"계산 틀리면."
"뭘로."
문이 열렸다. 옥주가 들어왔다. 은행 봉투를 들고. 형과 성호를 한 번 보고, 다시 봤다.
"손으로요."
옥주가 말했다. 봉투를 형 앞에 놓으면서.
형이 웃었다. 어색하게. 농담인 줄 알고. 옥주는 웃지 않았다. 성호도 웃지 않았다. 형 웃음이 혼자 남았다가 사라졌다.
"성재 씨, 고기 더 구울까요? 저녁 전이라 손님 없어요."
"……아니요. 은희한테 가야."
형이 봉투를 들고 일어섰다. 문 앞에서 돌아봤다. 성호를. 그리고 옥주를. 뭐라고 하려다가 안 했다. 그냥 갔다. 유리창 너머로 형이 길을 건너 화끈고기 앞을 지나가는 게 보였다. 화끈고기는 그 주에 문을 닫았다. 두 달 만에. 옥주 말대로.
그날 밤 열한 시. 마감. 미자 이모가 갔다. 성호가 대걸레를 밀었다. 옥주가 장부를 폈다. 계산기에 손을 올렸다.
"만 원 빕니다."
성호가 말했다. 옥주가 계산기를 두드리기 전에.
옥주가 손을 멈췄다. 성호를 봤다. 그리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딱, 딱, 딱. 잠깐 쉬고, 딱.
"빈다."
"네."
"앞치마 주머니."
성호가 왼쪽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옥주가 손을 안 내밀었다. 성호도 안 갔다. 둘이 만 원짜리를 가운데 두고 봤다.
"너 일부러."
"네."
"왜."
성호가 대걸레를 세웠다.
"형 앞에서 말하고 나니까요."
"뭐가."
"받고 싶어서요. 말한 게 진짜라는 걸."
옥주가 장부를 덮었다. 천천히. 그리고 일어섰다. 초록 의자를 안 끌어왔다.
"일부러 틀린 건 규칙에 없어."
"네."
"그럼 새로 만들어야겄네."
옥주가 카운터를 돌아 나왔다. 성호 앞에 섰다. 성호보다 한 뼘 작은 옥주가 성호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성호는 내려다보는 기분이 안 났다. 십이 년 동안 한 번도 안 났다.
"일부러 틀리면 두 배."
"……이십 대요?"
"그리고 소리 내서 세. 한 대마다 왜 맞는지도 말해."
"네."
"오늘은 의자 아니야."
옥주가 카운터를 손바닥으로 툭 쳤다. 이십 년 된 카운터. 옥주가 이십 년 기대 선 카운터.
"여기 엎드려."
성호가 갔다. 카운터에 엎드렸다. 상체를 카운터에 대고, 얼굴 밑에 장부가 있었다. 검은 표지. 성호는 그 위에 뺨을 댔다. 옥주가 뒤에 섰다. 앞치마를 걷고, 바지를 내리고, 팬티를 내렸다. 성호는 카운터 모서리를 잡았다.
첫 대.
"하나. 일부러 틀렸습니다."
둘.
"둘. 일부러 틀렸습니다."
옥주는 천천히 쳤다. 골고루. 성호가 말을 다 하고 나서 다음 걸 쳤다. 말이 늦으면 기다렸다. 홀이 그 소리를 돌려줬다. 착, 그리고 성호 목소리, 그리고 착.
"일곱. 일부러 틀렸습니다."
"왜."
"……받고 싶어서요."
"그것도 말해."
"여덟. 일부러 틀렸습니다. 받고 싶어서요."
성호 목소리가 갈라졌다. 옥주 손이 무거웠다. 화난 무거움이 아니었다. 이건 다른 거였다. 성호가 원해서 받는 무거움. 성호는 딱딱해졌다. 카운터 모서리에 눌려서. 아팠다. 아픈데 더 딱딱해졌다.
"열둘. 일부러…… 열셋."
"틀렸어. 열둘 다시."
"열둘. 일부러 틀렸습니다. 받고 싶어서요."
"됐어."
열셋, 열넷, 열다섯. 성호 눈에서 뭐가 흘러 장부 표지에 떨어졌다. 검은 표지가 더 검어졌다.
"열여덟. 일부러 틀렸습니다. 받고 싶어서요."
옥주가 멈췄다. 손을 얹었다. 뜨거운 데.
"섰냐."
"……네."
"많이."
"네."
열아홉. 스물.
"끝."
옥주가 손을 안 뗐다. 그러다 성호 허리를 잡고 돌렸다. 성호가 카운터에 등을 대고 섰다. 바지가 무릎에. 앞치마가 들려 있었다. 옥주가 그걸 봤다. 그리고 자기 몸빼를 내렸다. 팬티도. 발로 차서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카운터에 올라앉았다. 성호 옆으로. 이십 년 된 카운터가 삐걱 소리를 냈다. 옥주 몸무게를 받아냈다. 이십 년 받아낸 무게였다.
"와."
옥주가 다리를 벌렸다. 성호가 그 사이에 섰다. 옥주가 성호 것을 잡았다. 딱딱하고 뜨거웠다. 옥주가 그걸 자기한테 댔다. 젖어 있었다. 스무 대 치는 동안 이랬던 거다.
"들어와."
성호가 들어갔다. 서서. 옥주는 카운터에 앉아서. 높이가 맞았다. 이십 년 된 카운터 높이가 그렇게 딱 맞다는 걸 둘 다 십이 년 만에 알았다.
옥주 손이 성호 턱을 잡았다. 꽉.
"눈 감지 마."
성호가 눈을 떴다. 감으려던 걸 떴다.
"봐. 누가 니 정산 보는지 봐."
성호가 봤다. 옥주 눈. 눈 안 피하는 눈. 성호가 움직였다. 옥주가 턱을 놓지 않았다. 성호는 그 손아귀 안에서 옥주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카운터가 삐걱거렸다. 장부가 옥주 엉덩이 밑에서 밀렸다. 계산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둘 다 안 봤다.
"사장님."
"왜."
"싸도 돼요?"
"말해. 왜 싸고 싶은지."
"……사장님이 봐주니까요."
옥주가 갔다. 그 말에. 성호 턱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 옥주 안이 조여왔고, 옥주가 소리를 냈다. 카운터에 앉아서. 성호 눈을 보면서.
"돼."
성호가 쌌다. 서서. 옥주 안에. 다리가 풀려서 카운터를 잡았다. 옥주가 성호 머리를 끌어안았다. 젖가슴 사이에. 성호는 거기서 숨을 쉬었다. 옥주 심장 소리가 났다. 빨랐다. 옥주 심장도 빨라지는 거였다. 십이 년 만에 그걸 그렇게 가까이서 들었다.
한참 뒤에 옥주가 성호를 밀어냈다. 살짝. 그리고 카운터에서 내려왔다. 몸빼를 주워 입었다. 그리고 자기가 앉았던 자리를 봤다. 장부가 있었다. 밀려서 반쯤 접혔다. 표지에 얼룩이 있었다. 성호 눈물 자국. 그리고 다른 것.
옥주가 장부를 펴서 손바닥으로 폈다. 두 번, 세 번.
"장부에 얼룩 나면 그것도 벌이야."
"……그건 사장님이 앉아서……"
"내가 앉았지. 니가 울었고."
"……"
"둘 다 벌."
옥주가 장부를 서랍에 넣었다. 차용증 옆에. 딸깍.
성호는 바지를 올렸다. 엉덩이가 뜨거웠다. 스무 대. 앞으로 사흘은 의자에 조심해서 앉아야 할 거였다. 김기사가 알아볼지도 몰랐다. 김기사는 그런 것까지 알았다. 성호는 그것도 좋았다.
"사장님."
"왜."
"형이요."
"응."
"이제 웃을 것 같아요?"
옥주가 카디건을 걸쳤다. 위에서부터 단추를 채웠다.
"모르지. 지 입으로 한 말은 지가 갖고 가는 거니까."
"네."
"근데 오늘은 뭘 갖고 갔는지 몰라서 안 웃었잖아. 그럼 됐어."
옥주가 주방 불을 끄러 갔다.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옥주가 말했다.
"그리고 성호."
"네."
"일부러 틀리는 거, 자주 하지 마."
"……네."
"가끔은 하고."
성호는 어둠 속에서 웃었다. 옥주는 못 봤다. 봤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