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서만
싱가포르였다. 다시.
일 년 두 달 전 첫 봉투를 열었던 도시. 호텔은 달랐다. 이번엔 오차드 로드 쪽, 창밖으로 바다 대신 쇼핑몰 지붕들이 보이는 방. 그래도 창이 공항의 자동문이 열릴 때 그 젖은 공기가 얼굴에 닿는 순간 예나는 웃었다. 첫 봉투를 손에 들고 침대 끝에 앉아 떨었던 자기가 생각나서.
이제 그녀는 떨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했다. 캐리어를 열기 전에 방문을 잠갔다. 신발을 벗었다. 커튼을 열었다. 도시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다음 캐리어를 열었다. 순서가 몸에 있었다.
봉투가 있었다. 그리고 봉투 옆에 검은 상자가 하나.
싱가포르. 방에 도착해서 열 것. 상자는 봉투 다 읽고.
예나에게.
일 년 두 달. 처음 봉투를 넣은 도시에 다시 가네. 그때 네가 그 호텔 방에서 어떤 얼굴이었을지 나는 자주 생각해. 못 봤으니까.
뉴욕 뒤로 규칙 하나가 늘었지. 잘 지키고 있어. LA 뒤로 내가 기억하는 이름도 하나 있고. 그 사람 이번 출장에 없는 거 확인했어. 네 일정표 보여 준 거, 고마워.
상자를 열어.
그 안에 있는 건 네 몸 안에 넣는 거야. 앱으로 연결돼. 내 폰에도 깔았어. 네가 그걸 켜면 내 폰에 알림이 와. 그때부터 강도는 내가 정해. 네 손은 필요 없어.
규칙. 이건 중요해.
방 안에서만. 호텔 방 문을 잠근 뒤에만. 회사 자리에서, 부스에서, 클라이언트 앞에서, 택시 안에서, 절대 안 돼. 네 일은 네 거야. 그 안에 나를 넣지 않아. 그건 내가 지키는 규칙이야.
내일 밤 열 시, 그곳 시간. 영상통화. 그 전에 넣어 두고 문 잠그고 앱 켜.
그리고 숙제 하나 더. 이번엔 네가 지시서를 써. 나한테. 네가 돌아오는 날 뭘 원하는지, 명령형으로. 잘 쓰려고 하지 말고 원하는 걸 문장으로 만들어. 어색할 거야. 그래도 써.
잘 자.
— 준서
상자 안에는 부드러운 실리콘으로 된 것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부분과, 밖에서 그 위를 덮는 부분이 하나로 이어진 모양. 손바닥에 올려 놓으니 가볍고 따뜻했다. 그녀는 그것을 오래 보았다. 그가 이것을 고르는 얼굴을 상상했다. 어떤 표정으로 상자를 열어 확인하고, 앱을 깔고, 자기 폰과 연결해 봤을까.
첫날 밤은 늘 그렇듯 만지지 않고 잤다. 이제 그것은 쉬운 일이었다. 쉽다는 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녀는 가끔 생각했다.
둘째 날. 부스 미팅이 아홉 시 반에 끝났다. 호텔까지 십오 분. 그녀는 방문을 잠갔다. 샤워를 했다. 침대 옆 램프 하나만 켰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그것을 자기 안으로 밀어 넣었다. 미끄럽게 들어갔다. 이미 젖어 있었기 때문에. 안쪽이 낯선 부피에 맞춰 조여들었고 바깥 부분이 예민한 곳 위에 정확히 얹혔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 폰을 들어 앱을 켰다. 연결됨. 초록색 점.
만 킬로미터 밖에서 그의 폰이 울렸을 것이다.
열 시 정각. 영상통화.
그는 서울의 그 침대에 있었다. 열한 시. 상의는 벗은 채. 그가 화면을 보고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앉아 있는지 보는 것 같았다. 벌거벗은 채, 목에 은 원판, 다리를 모으고, 얼굴이 이미 붉은.
"넣었어?"
"네."
"알림 왔어. 초록불 켜지는 거 봤어."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았다. "손은 머리 위에. 침대 헤드 잡아."
그녀는 팔을 올려 헤드보드를 잡았다. 그러자 몸이 다 드러났다. 가슴, 배, 벌어지지 않은 허벅지.
"다리 벌려. 내가 넣은 거 보여."
그녀는 벌렸다. 램프 불빛에 실리콘의 검은 끝부분이 보였다. 그가 화면 너머에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오늘은 네 손 안 써. 내 손만. 알았지."
"네, 대디."
그가 자기 폰을 들었다. 화면 속에서 그의 손가락이 무언가를 눌렀다.
그녀 안에서 진동이 시작됐다. 낮게. 아주 낮게. 안쪽 벽을 따라 울리는 것과 바깥의 예민한 곳 위에서 떨리는 것이 동시에.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헤드보드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때."
"…떨려요. 안이랑… 밖이랑…"
"더 말해."
"약해요. 대디. 더―"
그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진동이 한 단계 올랐다. 그녀의 허리가 저절로 들렸다. 소리가 났다. 그가 그것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손가락이 만들고 있었다. 만 킬로미터 밖에서. 종이가 아니라.
"이게 내 손이야. 지금."
"네― 네…"
"뉴욕에서 네가 종이라고 했던 거. 이건 종이 아니지."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가 한 단계 더 올렸다.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안쪽에서 울리는 것이 배 전체로 퍼졌다. 밖에서 떨리는 것이 그녀를 너무 정확하게 찾아냈다. 그가 고른 것이었다. 그가 어디에 닿을지 알고 고른 것이었다.
"가까워?"
"네, 대디, 가까워요―"
진동이 뚝 끊겼다.
그녀는 헐떡였다. 몸이 절정 바로 앞에서 던져진 채 떨렸다.
"대디―"
"아직. 첫 번째야."
"…네."
"말해. 뭘 원하는지. 문장으로."
그녀는 헤드보드를 잡고 그를 보았다. 얼굴이 뜨거웠다. 문장으로. 숙제. 원하는 것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
"…다시 켜 주세요."
"그거 말고. 진짜 원하는 거."
"…끝내게 해 주세요. 대디 손으로. 지금."
"아직."
그가 다시 켰다. 이번엔 처음부터 높았다.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허벅지가 떨렸다. 손이 헤드보드에서 미끄러지려 했다.
"손 놓지 마."
"놓지 않아요― 대디―"
두 번째로 끊겼다. 그녀는 거의 울었다. 세 번째. 그는 그것을 천천히 올렸다. 아주 천천히. 한 단계마다 몇 초씩. 그녀가 문장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
"말해."
"대디… 제발… 끝내게 해 주세요… 대디 보면서… 소리 내면서… 대디 이름 부르면서…"
"좋아. 잘 만들었어."
그가 잠깐 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가 처음 보는 것을 했다. 카메라 앵글을 내렸다. 그의 배, 그리고 그 아래. 그의 것이 그의 손안에 있었다. 단단하고, 이미 끝이 젖어 있는. 그가 그것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에게 보여 주면서.
"오늘은 보여 줄게. 네가 본 적 없지."
"…없어요…"
"네 소리 들으면서 이러고 있었어. 런던에서도.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도쿄에서도. 나만 안 보여 줬어."
"왜요…"
"네가 나 없이 잠들 수 있게 하려면 내가 무너지는 걸 보여 주면 안 됐어. 이제는 괜찮아. 넌 뉴욕에서 살아남았고 서울에서 걸었으니까."
그는 폰을 다시 들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진동이 가장 높은 단계로 올라갔다.
"지금. 나 보면서."
그녀는 그를 보았다. 그의 얼굴과 그의 손을. 화면이 둘로 나뉘어 있었다. 그녀 안에서 그의 손가락이 만든 진동이 그녀를 밀어 올렸다. 헤드보드를 잡은 채로, 손을 쓰지 않고, 그가 정한 것만으로. 그녀는 왔다. 길게. 소리가 방을 채웠고 그의 이름이 그 안에 있었다. 준서, 준서, 대디―
그리고 그녀는 그가 오는 것을 보았다. 그의 손이 빨라지고, 그의 이가 물리고, 그의 목에서 그녀의 이름이 갈라져 나오고, 그의 배 위에 하얗게 쏟아지는 것. 처음 보는 것. 그가 무너지는 것.
진동이 꺼졌다.
방이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숨소리만 화면을 오갔다.
"…빼. 씻고 와."
그녀는 다리에 힘이 없는 채로 욕실에 갔다 왔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이불을 덮고, 물을 마시고. 그가 그것을 다 보았다.
"지시서 썼어?"
"…네. 아직 다 못 썼어요."
"읽어 봐. 지금."
"지금요?"
"응. 나한테 쓴 거니까 내가 들어야지."
그녀는 침대 옆 메모지를 들었다. 얼굴이 아까보다 더 붉어졌다. 그를 보면서 끝내는 것보다 이것이 더 어려웠다.
준서에게.
이건 지시서예요. 대디가 쓰라고 했으니까요.
돌아오는 날 공항에 오세요. 뉴욕 때처럼. 캐리어는 대디가 들어요.
차 안에서는 제 손을 잡고 있어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저도 안 할게요.
집에 가면 캐리어를 먼저 열지 마세요. 저를 먼저 열어요.
그리고, 이건 지시가 아니고 부탁인데요. 다음 봉투에도 오늘처럼 보여 주세요. 대디가 무너지는 거. 저만 무너지는 거 이제 싫어요.
여기까지밖에 못 썼어요. 명령형 어려워요.
— 예나
그녀는 종이를 내렸다. 그를 보지 못했다.
"…읽었어."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달랐다.
"전부 할게."
"…네."
"마지막 거 빼고."
그녀가 그를 보았다.
"그건 지시가 아니라 부탁이라고 했지. 부탁은 내가 정해. 그래도 대답은 해 줄게. 그렇게 할 거야. 이제부터."
그녀는 웃었다. 그가 웃었다. 그가 화면 속에서 웃는 것을 그녀는 그렇게 오래 본 적이 없었다.
"내일 그거 캐리어 안쪽 주머니에 넣어 와. 종이로. 앱 말고."
"네."
"잘 자, 예나."
"잘 자요, 대디."
화면이 꺼졌다. 그녀는 초록불이 꺼진 앱을 보았다. 그것을 닫고, 상자를 캐리어 안쪽에 넣고, 그 옆에 봉투를 넣었다. 자기가 쓴 지시서가 든 봉투를 그 옆에.
일 년 두 달 전 같은 도시에서 그녀는 봉투 한 장을 손에 들고 떨었다. 오늘은 두 장을 넣었다. 하나는 그가 쓴 것, 하나는 그녀가 쓴 것. 그리고 그 사이에 검은 상자가 있었다. 종이가 아닌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