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시의 규칙
로스앤젤레스는 열여섯 시간이 어긋나 있었다.
그녀의 밤 열한 시가 그의 오후 네 시였다. 그가 회의 중이거나 현장에 있거나 클라이언트와 통화하는 시간. 그녀의 아침 일곱 시가 그의 밤 열두 시였다. 그가 잠들 시간. 두 사람의 하루가 서로를 스쳐 지나가기만 하고 겹치는 곳이 거의 없었다.
봉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LA. 방에 도착해서 열 것.
예나에게.
이번엔 내가 못 받을 시간이 많아. 네 밤이 내 낮이고, 네 낮이 내 밤이야. 그래서 이번 규칙은 하나야.
밤 열한 시, 그곳 시간엔 방에 있어. 어디에 있든, 누구랑 있든, 열한 시엔 네 방 문을 잠그고 있어. 내가 전화를 못 해도. 그 시간에 네가 거기 있다는 걸 내가 알 수 있게.
그 시간에 내가 걸 수 있으면 걸게. 못 걸면 그냥 자. 만지는 건 내가 허락하는 날만.
둘째 장은 마지막 날 밤에 열어.
잘 자.
— 준서
둘째 장은 따로 접혀 있었다. 그녀는 열지 않고 캐리어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닷새 일정이었다. 컨벤션 센터에서 열리는 뷰티 박람회. 한국 브랜드 열두 곳의 공동관, 아틀라스에서 나온 사람은 예나와 태윤 선배, 후배 둘. 태윤은 예나보다 다섯 해 위였고 작년에 이혼했고 그 뒤로 출장 때마다 저녁 이후에 한 잔 더, 를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 밤에 혼자 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못 견디는 사람이었고, 예나는 그 마음을 알아서 두 번쯤은 같이 앉아 주었다.
셋째 날 밤이었다. 웨스트 할리우드의 바. 후배들은 열 시에 먼저 들어갔다. 태윤이 잔을 들었다.
"한 잔만 더."
"저 열한 시에 들어가야 해요."
"무슨 통금이야. 여기 LA인데."
"그냥, 그 시간에 방에 있어야 해서."
태윤이 그녀를 보았다. 그 눈빛에 무언가 있었다. 오래 같이 일한 사람들끼리 서로의 사생활을 안 묻는 것으로 지켜 온 선. 그가 그것을 넘어오려는 것 같았다.
"남자 친구?"
"네."
"그 사람이 시켰어?"
"…네."
"통화도 안 되는 시간이라며. 아까 그랬잖아. 시차 때문에 낮이라고."
"그래도요."
그는 웃었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조금 부럽고 조금 쓸쓸한 웃음.
"방에 있는지 어떻게 알아. 확인도 못 하는데."
예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시계는 열 시 사십 분이었다.
"확인 못 하니까 지키는 거예요."
그녀는 일어났다. 태윤이 따라 일어나 계산을 했고 호텔까지 같은 우버를 탔고 로비에서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그가 말했다.
"한 잔 더 하려면 내 방으로―"
"선배."
그녀는 그를 돌아보았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저 열한 시에 제 방에 있어야 해요. 선배 방 아니고요. 내일 부스에서 봐요."
문이 닫혔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화가 난 것도 겁이 난 것도 아니었다. 이상하게 차분했다. 열한 시라는 숫자가 그녀를 붙잡아 준 것 같았다. 봉투 한 장이. 확인도 못 하는 규칙 하나가.
열 시 오십칠 분에 그녀는 방문을 잠갔다. 침대에 앉아 시계가 열한 시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서울에서 오후 네 시일 것이다. 회의 중이거나 현장이거나.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가 못 걸어도 그 시간에 여기 있는 것. 그게 규칙이었다. 그리고 그 규칙이 오늘 그녀를 어디에서 데리고 나왔는지 그녀는 알았다.
그날 밤 그녀는 잠이 오지 않았다. 태윤에게 말할지, 준서에게 말할지. 아니, 태윤이 아니라 준서에게 말할지. 말하면 그가 어떻게 할까. 아무것도 못 할 것이다. 여기서 만 킬로미터 떨어진 서울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러면 말해서 뭐 하나. 그를 불안하게만 하는 게 아닐까.
솔직하게 말하기. 첫 번째 규칙.
그런데 그 규칙이 지금 이렇게 무겁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새벽 다섯 시. 그의 밤 열 시. 폰이 울렸다.
"자?"
"아니요. 깼어요."
"목소리가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침묵.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캐묻는 사람도 아니었다.
"어제 열한 시에 방에 있었어?"
"네."
"문 잠갔어?"
"네."
"잘했어."
그 말에 목이 막혔다. 그녀는 얼굴을 옆으로 돌려 숨을 삼켰다.
"상 줄게. 영상 켜."
그녀는 켰다. 그는 서울의 그 침대에, 스탠드 불빛 아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가 잠깐 눈을 가늘게 했다. 무언가를 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묻지 않았다.
"옷 벗어. 다 벗고 이불 위에 누워."
그녀는 벗었다. 새벽의 방은 차가웠다. 화면 속의 그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안 정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볼게."
"…대디가 정해 주세요."
그가 잠깐 멈췄다.
"오늘은 정해 주는 게 좋아?"
"네."
"알았어."
그는 정해 주었다. 다리를 벌리게 하고, 손을 내리게 하고, 두 개를 넣게 하고, 엄지로 위를 문지르게 했다. 그녀는 그가 시키는 것 하나하나에 매달렸다. 그의 목소리가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어젯밤의 엘리베이터가, 태윤의 웃음이, 잠 못 든 시간이 조금씩 지워졌다. 그가 멈추라고 하면 멈췄고, 다시 하라고 하면 다시 했고, 지금이라고 했을 때 그녀는 그를 보면서 왔다. 소리를 내면서. 그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소리를 내면서.
"잘했어."
그녀는 이불을 덮고 화면을 보았다. 그는 아직 그녀를 보고 있었다.
"예나."
"네."
"말 안 해도 돼. 지금은."
"…."
"봉투 둘째 장. 마지막 날에 열어. 그때 쓰고 싶은 거 써."
"네, 대디."
"잘 자. 거긴 아침이지만."
"잘 자요."
마지막 날 밤. 짐을 다 싼 뒤 그녀는 둘째 장을 열었다.
이 장은 마지막 날에 읽으라고 했지.
닷새 동안 나한테 말하기 가장 어려웠던 것 하나를 적어. 메모지에. 봉투에 넣어 와.
내가 못 받는 시간이 많아서 네가 혼자 정리한 게 있을 거야. 나한테 걸어야 하나, 걸어서 뭐 하나, 그런 거. 그거 하나만 적어. 잘 쓰려고 하지 말고.
이 출장 잘 버텼어. 내일 보자.
잘 자.
예나는 오래 앉아 있었다. 그가 이것을 그녀가 출발하기도 전에 썼다는 것. 그녀가 무엇을 혼자 정리하게 될지 모르면서, 혼자 정리하게 될 것만은 알았다는 것.
그녀는 썼다.
대디에게.
셋째 날 밤, 태윤 선배가 한 잔 더 하자고 했어요. 열한 시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더니 그 사람이 시켰냐고, 확인도 못 하는데 왜 지키냐고 했어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자기 방으로 오라고 했어요. 안 갔어요. 열한 시에 제 방 문 잠갔어요.
말하기 어려웠던 건 그 일이 아니에요. 그건 그냥 있었던 일이에요.
어려웠던 건, 그걸 말하면 대디가 서울에서 아무것도 못 하면서 불안해할 거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안 하려고 했어요. 그게 대디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쓰면서 알았어요. 그건 대디를 위한 게 아니고 제가 편하려고 한 거였어요. 대디가 첫 번째 규칙을 왜 그걸로 정했는지 이제 알아요.
열한 시 규칙 덕분에 나왔어요. 확인 못 하는데 지켰어요. 그게 저한테 뭔지 대디는 알 거예요.
잘 자요, 대디.
— 예나
인천에 내려 그의 차에 탔을 때 그는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고 아무 말 없이 운전했다. 집에 도착해 캐리어를 열고 안쪽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읽었다. 예나는 그의 옆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이 종이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다 읽고 그는 봉투를 접었다.
"말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그 사람 이름 기억해 둘게."
그것뿐이었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고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그날 밤 그는 그녀를 평소보다 오래 안고 있었고, 그녀가 잠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한 번, 아주 낮게 말했다.
"네가 방에 있는 거 알았어. 열한 시에. 나 회의 중이었는데 알았어."
그녀는 자는 척했다. 자는 척하면서 울지 않으려고 이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