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 안의 회색 봉투

창이 공항의 자동문이 열리자 공기가 먼저 달라졌다. 미지근하고 무거운, 젖은 수건을 얼굴에 덮은 것 같은 공기. 예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고쳐 잡고 잠깐 서 있었다. 열두 번째 해외 출장이었고, 혼자 오는 것도 처음은 아니었다. 다만 준서와 사귀고 나서는 처음이었다.

넉 달. 그 넉 달 동안 그녀는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국내 전시 두 건, 지방 컨벤션 한 건. 회사에서는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예나 자신은 알고 있었다. 자기가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미루고 있었는지. 어떤 사람과 새로 시작한 사람은 그 사람이 없는 방에서 잠드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하고, 그녀는 그 수업을 계속 결석하고 있었다.

인천에서 준서는 별말이 없었다. 출국장 앞에서 캐리어를 받아 들며 "무거우니까 내가 끌게" 하고는 체크인 카운터까지 걸었다. 뒤에서 보는 그의 어깨는 평소보다 조금 굳어 있었다. 짐을 부치고 돌아섰을 때 그는 그녀의 뒷머리를 한 번 쓸어 내리고, 그게 다였다. 잘 다녀와. 도착하면 연락하고. 연인이라기엔 너무 건조하고, 그래서 더 그다운 배웅.

호텔은 마리나 베이 쪽이었다. 스물세 층, 통유리, 커튼을 닫아둔 채로 방은 어둡고 서늘했다. 예나는 신발을 벗고 캐리어를 침대 옆에 눕혔다. 지퍼를 열고, 개어 넣은 블라우스 사이로 손을 넣다가 멈췄다.

회색 봉투였다.

그녀가 넣은 게 아니었다. 두꺼운 종이, 각이 살아 있는 봉투. 앞면에 만년필로 눌러 쓴 짙은 남색 글씨.

싱가포르. 방에 도착해서 열 것.

예나는 봉투를 들고 침대 끝에 앉았다. 손이 조금 떨렸다. 웃음이 나왔는데 웃음이 아닌 것도 같았다. 출국장 앞에서 그가 캐리어를 끌고 가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넣었을까. 아니면 전날 밤, 그녀가 짐을 싸다 잠든 사이에.

봉투를 열었다.

예나에게.

지금 이걸 읽고 있으면 방에 도착한 거겠지. 신발 벗었어? 벗었으면 됐어.

먼저 커튼을 열어. 그 도시를 한 번 봐. 사진 한 장 찍어서 보내. 네가 어떤 창문 앞에 있는지 알고 싶어.

그다음, 캐리어 맨 아래 검은 파우치. 그것도 내가 넣었어. 열어 봐.

샤워하고, 그 안에 있는 걸 목에 걸어. 자기 전까지 벗지 마. 내일도 벗지 마. 돌아올 때까지.

오늘 밤은 만지지 마. 혼자 있는 첫날 밤을 그냥 통과해 봐. 그게 오늘의 숙제야.

밤 열 시, 그곳 시간에 전화할게. 받아.

잘 자.

— 준서

예나는 편지를 두 번 읽었다. 만지지 마, 라는 문장에서 두 번 다 멈췄다. 그가 이 문장을 쓰면서 어떤 얼굴이었을지 알 것 같았다. 그의 서재, 제도용 스탠드 불빛 아래, 입술을 살짝 안으로 물고 눌러 쓰는 얼굴.

그녀는 시키는 대로 커튼을 열었다. 유리창 너머로 바다와 다리와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건물들이 늦은 오후의 빛 속에 있었다. 사진을 찍어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서울은 저녁 여섯 시, 그는 아직 사무소에 있을 것이다.

캐리어 바닥의 검은 파우치. 그 안에는 가느다란 은 체인이 있었다. 손톱만 한 원판이 하나 달려 있었고, 뒤집으니 뒷면에 아주 작게 J가 새겨져 있었다. 화려한 물건이 아니었다. 회의 자리에서 블라우스 안에 넣으면 아무도 모를 만한 것.

그는 왜 이걸 직접 걸어주지 않았을까. 예나는 샤워기 아래에서 그 생각을 했다. 인천에서 걸어줄 수도 있었다. 전날 밤 그의 침대에서 걸어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녀가 혼자 있는 방에서, 혼자 스스로 걸도록 두었다.

물기를 닦고 거울 앞에서 체인을 걸었다. 걸쇠를 잠그는 데 세 번 실패했다. 잠기는 순간 원판이 쇄골 사이로 내려앉았고, 차가웠고, 곧 차갑지 않게 되었다.

밤 열 시 정각에 전화가 왔다.

"열어 봤어?"

인사도 없었다. 낮고 고른 목소리. 예나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은 채 눈을 감았다.

"네."

"걸었어?"

"네, 대디."

사귀고 나서 그 호칭을 입에 올린 건 세 번째였고, 전화기 너머로는 처음이었다. 짧은 침묵이 있었다. 숨을 고르는 소리.

"만져 봐. 목에 있는 거."

그녀는 원판을 손끝으로 눌렀다.

"차가워?"

"아니요. 이제 따뜻해요."

"네 체온이야." 그가 말했다. "내가 거기 있는 방식이 그거야. 그러니까 벗지 마."

"안 벗어요."

"오늘 만지고 싶었어?"

예나는 대답을 미뤘다. 편지를 읽은 뒤부터, 샤워를 하면서, 체인을 걸면서, 그리고 지금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허벅지 안쪽이 이미 뜨거웠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그들 사이의 첫 번째 규칙이었다.

"…네. 지금도요."

"알아. 그러라고 쓴 거야."

"그러면 왜―"

"네가 혼자 있는 방에서 그게 누구 건지 기억하라고."

그녀는 이불을 쥐었다. 목 아래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그가 볼 수 없다는 게 다행이었고, 동시에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눕자. 이불 덮고."

예나는 누웠다.

"손은 이불 위에. 배 위에 포개."

"…네."

"오늘 밤은 그대로야. 나 없이 네가 그걸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봐. 내일도 못 만져. 내가 허락할 때까지."

"대디."

"응."

"이건 벌이에요?"

"아니."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이건 네가 낯선 방에서 처음 자는 밤에 잠을 못 잔다는 걸 내가 안다는 뜻이야. 뭔가 붙잡을 게 있어야 하잖아. 그래서 주는 거야. 참는 것도 붙잡는 거야."

예나는 천장을 보았다. 눈이 뜨끈해질 것 같아서 몇 번 빠르게 깜빡였다. 그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말한 적이 없는데.

"스피커로 해. 폰은 베개 옆에."

그녀는 그렇게 했다. 그는 끊지 않았다. 대신 오늘 사무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성수동 현장의 콘크리트 타설이 비 때문에 밀렸다는 것, 점심에 국수를 먹었다는 것, 그녀의 컵이 싱크대에 그대로 있다는 것.

"안 씻었어요?"

"네가 돌아오면 씻을 거야."

그 말이 왜 그렇게 아팠는지 예나는 알 수 없었다. 손은 배 위에 포갠 채였다. 허벅지를 조금 붙였다. 그가 들을 수 없는 방식으로 몸이 그를 원하고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 그의 목소리에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예나."

"네…"

"잘 자."

"잘 자요, 대디."

전화는 끊기지 않았다. 사천육백 킬로미터 너머에서 그가 숨 쉬는 소리가 베개 옆에 있었다. 예나는 그 소리에 맞춰 숨을 쉬다가, 어느 순간 자기가 잠들었다는 것도 모르고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