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 콜
밤 아홉 시. 잠원동 지하 1층. 페이스랩.
간판은 작았다. 계단을 내려오면 유리문이 있고 그 안에 트레드밀 두 대, 거울 벽, 마사지 테이블 하나, 폼롤러와 밴드가 걸린 선반, 심박계와 젖산 측정기가 놓인 책상. 형광등 대신 노란 전구를 달았다. 새벽에 오는 사람들이 형광등 아래에서 자기 몸을 보는 걸 싫어해서였다.
민혁은 아홉 시 정각에 왔다. 회색 후드, 검은 조거 팬츠, 러닝화가 아닌 운동화. 손에 뭘 들고 오지 않았다. 지안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뭘 사 들고 오는 사람은 이게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앉아."
마사지 테이블 옆 스툴. 그가 앉았다. 지안은 책상 의자를 끌어와 마주 앉았다. 거리는 1미터 반. 손을 뻗으면 닿고, 안 뻗으면 안 닿는 거리.
"먼저 내 얘기 할게. 그다음 네 얘기. 그다음 규칙."
"네."
"나는 사람이 한계에 닿는 순간을 보는 게 좋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야. 그거 보려고 7년 동안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대표팀 있을 땐 내가 그 지점에 가는 게 좋았고, 아킬레스 끊어진 뒤로는 남을 거기 보내는 게 좋아. 이건 코치라면 다 어느 정도 그래. 그런데 나는 어느 정도가 아니야."
그녀는 물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목이 마른 게 아니었다. 다음 문장 앞에 놓을 쉼표가 필요했다.
"내가 정한 페이스로, 내가 정한 만큼,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누가 아파하는 걸 내가 조절하는 거. 그게 나야. 스포츠 밖에서도. 아니, 스포츠 밖에서 먼저였어. 스포츠는 그걸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곳이었을 뿐이고."
"...사디스트."
"응. 그 단어 써도 돼."
그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무너지는 숨이 아니었다. 뭔가가 맞아 들어가는 숨.
"네 얘기."
"저는."
그가 손을 내려다봤다.
"스물셋 때 처음 알았어요. 그때 만나던 사람이랑. 제가 좀 더 세게 해달라고 했는데, 아프게. 그 사람이 이상하게 봤어요. 그 뒤로 말을 안 했어요. 그냥 러닝을 시작했어요. 러닝은 아파도 아무도 이상하게 안 보니까."
"트랙에서 통증을 대신 받아온 거네."
"네. 근데 아까 말한 것처럼, 혼자서는 거기까지 못 가요. 그리고 코치님이 오시고 나서."
그가 그녀를 봤다.
"코치님은 저를 거기 보낼 줄 아시잖아요. 그리고 거기서 꺼내는 것도."
"마조히스트."
"...네. 그 단어 써도 돼요."
지안은 노트를 폈다. 훈련 노트가 아니었다. 새 노트였다. 표지가 검은색인.
"규칙."
그녀는 쓰면서 말했다.
"하나. 세이프워드. 러닝 용어로 한다. 크루 앞에서 써도 아무도 모르게. '페이스 다운'은 강도 낮춰. 지금 하는 걸 멈추는 게 아니고 약하게. '디엔에프'는 전부 즉시 중단. 질문 없이. 이유 안 물어. 그 자리에서 끝."
DNF. Did Not Finish. 완주 실패. 러너에게 가장 무거운 세 글자. 그녀는 그 세 글자를 그가 가장 안전한 말로 갖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스플릿'이라고 물으면 숫자로 답해. 1에서 10. 1은 아무것도 아니고 10은 더 못 가. 거짓말하면 끝이야. 낮게 말하는 것도 거짓말이고 높게 말하는 것도 거짓말이야. 알았어?"
"네."
"둘. 하드 리밋. 얼굴 안 때려. 호흡 안 막아. 넌 러너고 폐는 네 장비야. 피 안 나. 다리에 큰 자국은 훈련 48시간 전에 안 만들어. 대회 전 주는 완전 휴식. 여기도, 트랙도."
"네."
"셋. 이건 네가 제일 안 지키는 거."
그녀는 볼펜을 세웠다.
"내가 멈추라고 하면 멈춰. 여기서도, 트랙에서도. 오늘 아침에 '조금만'이라고 했지. 그거 여기서는 안 돼. 트랙에서도 이제 안 돼. 이 둘은 같은 규칙이야. 하나만 지키는 건 없어."
민혁의 목이 움직였다. 침을 넘기는 소리가 났다.
"...네."
"넷. 심박계 착용해. 세션 중에. 200 넘으면 내가 멈춰. 네가 원해도."
"다섯. 크루는 몰라. 수아도, 태경 오빠도, 아무도."
"여섯. 이건 내 거. 여기서 벌은 없어. 훈련만 있어. 네가 뭘 잘못해서 아픈 게 아니야. 내가 원해서 아픈 거야. 이걸 헷갈리면 내가 멈춘다."
그가 그 문장을 한참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물었다.
"코치님은 뭘 원하세요. 저한테서."
지안은 노트를 덮었다.
"네가 버티는 거. 내가 정한 만큼. 그리고 네가 '스플릿' 물으면 정직하게 숫자 말하는 거. 그거면 돼. 나머진 내가 가져가."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무릎 꿇어."
그가 스툴에서 내려왔다. 고무 바닥 위. 후드 차림으로, 무릎을 꿇고, 양손을 허벅지 위에 올렸다. 시키지 않았는데 손을 그렇게 뒀다. 그녀는 그것도 봤다.
지안은 그의 앞에 섰다. 손을 뻗어 그의 목에 두 손가락을 댔다. 경동맥. 세었다.
"88."
"...네."
"안정 시 얼마야?"
"52요."
"지금 두 배 가까이 뛰고 있네. 안 뛰었는데."
그가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그의 턱을 손가락 하나로 들어올렸다. 세게 아니고, 방향만.
"눈은 나 봐. 트랙에서처럼. 정면."
그가 봤다.
"바지 내려. 속옷은 두고."
그가 조거 팬츠를 무릎까지 내렸다. 회색 속옷. 허벅지가 드러났다. 러너의 허벅지였다. 굵지 않고 길고, 대퇴사두근이 무릎 위에서 뚜렷하게 갈라지고, 안쪽에 정맥이 푸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속옷 앞이 이미 부풀어 있었다. 그는 그걸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감출 수 있는 자세가 아니었다.
"몸이 정직하네."
비웃는 톤이 아니었다. 젖산 수치를 읽어주는 톤이었다.
"허벅지. 손바닥으로. 10개씩 세 세트. 회복 30초. 세는 건 너야. 소리 내서."
"네."
첫 세트. 그녀는 오른쪽 허벅지 앞을 쳤다. 손바닥을 펴서. 살이 손바닥을 받는 소리가 지하실 안에서 짧고 납작하게 났다.
"하나."
두 번째. 조금 더 세게.
"둘."
셋, 넷, 다섯. 그녀는 힘을 세트 안에서 올렸다. 400 열 개짜리 세트와 같다. 처음은 여유 있게, 마지막은 남은 걸 다 쓰게.
여덟. 그의 허벅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홉. 그가 숨을 참았다.
"숨. 내쉬면서 받아. 참으면 근육이 잠겨."
열. 그가 내쉬면서 받았다. 소리가 달랐다. 공기가 빠지는 것과 함께 뭔가가 같이 빠졌다.
"스플릿."
"...4."
"거짓말이야?"
"아니에요."
"좋아. 30초."
그녀는 시계를 봤다. 그는 무릎을 꿇고 있었고 허벅지에 손바닥 모양이 다섯 개쯤 겹쳐 붉게 떠 있었다. 속옷 앞은 더 부풀어 있었고 천 위로 젖은 자리가 동그랗게 번지고 있었다. 지안은 그걸 봤다. 그가 그녀가 보는 걸 봤다. 두 사람 중 누구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두 번째 세트. 왼쪽."
이번엔 처음부터 더 셌다. 첫 세트의 6부터 시작하는 힘. 그가 '하나'를 말할 때 목소리가 떨렸다. '넷'에서 어깨가 올라왔다.
"어깨."
내려갔다.
'일곱'에서 그가 눈을 감았다.
"눈."
떴다. 그녀는 그의 눈을 봤다. 아침 트랙에서 봤던 그것이 거기 있었다. 맑아진 눈. 벽 너머에서 나오는 눈.
여덟. 아홉. 열.
"스플릿."
"6."
"좋아."
세 번째 세트. 그녀는 양쪽을 번갈아 쳤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세트가 가장 힘든 지점. 그가 '다섯'을 말하고 나서 신음을 냈다. 아침에 400미터 라인을 넘으면서 냈던 것과 같은 소리. 아픈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아픈 걸 받은 사람의 소리.
'여덟'에서 그의 허벅지가 떨렸다. 근육이 스스로 뛰었다. '아홉'에서 그가 앞으로 살짝 기울었고 그녀는 그의 어깨를 한 손으로 밀어 세웠다. '열'.
"스플릿."
"...7."
"진짜?"
"7이에요. 8 아니에요."
"좋아. 끝."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숨을 쉬었다. 허벅지 두 개가 붉었다. 균일하게. 그녀는 그 붉은 색을 보면서 자기 몸 안에서 그 방의 문이 이제 손바닥 하나 너비만큼 열린 걸 느꼈다. 그 안에서 나오는 열이 아랫배에 고여 있었다. 다리를 살짝 모았다. 그가 보지 않는 곳에서.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속옷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냥 얹었다. 움직이지 않고. 천 아래에서 그의 성기가 딱딱하게 서 있었고, 그 위에 그녀의 손바닥이 놓였고, 그녀는 거기서 그의 맥을 느꼈다. 목에서 잡은 것과 같은 맥. 이번엔 훨씬 빨랐다.
"140 정도 뛰네."
그가 숨을 들이켰다. 허리가 저절로 앞으로 밀렸다. 그녀는 손을 뗐다.
"움직이지 마."
"...네."
"오늘은 워밍업이야. 페이스는 내가 정해. 넌 오늘 아무것도 안 해. 이것도 안 하고 저것도 안 해. 집에 가서도 안 해."
그가 그녀를 봤다. 항의가 아니었다. 이해였다. 아까 아침에 '늦춰'라고 했을 때와 같은 얼굴.
"코치님은요."
"나?"
"코치님은 오늘 아무것도 안 받으셨는데."
지안은 웃었다. 오늘 처음이었다.
"나는 충분히 받았어. 네 허벅지 색깔로. 네가 '7'이라고 말하는 목소리로. 그거면 오늘은 돼."
그녀는 냉장고에서 아이스팩 두 개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가 바지를 올리고 아이스팩을 받았다.
"양쪽 15분씩. 자기 전에. 내일 새벽 훈련 나와. 5시 반."
"...네."
"그리고 민혁."
그가 문 앞에서 돌아섰다.
"오늘 아침에 '조금만'이라고 한 거. 그거 마지막이야. 트랙에서. 다음에 내가 늦추라고 하면 늦춰. 그게 여기 규칙 3번이고, 그걸 지키는 걸 내가 트랙에서 볼 거야. 그게 다음 세션 조건이야."
그가 아이스팩을 든 채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동작.
"네, 코치님."
문이 닫혔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 훔치는 발. 그리고 정적.
지안은 스툴에 앉았다. 그가 무릎 꿇었던 자리의 고무 바닥에 땀 자국이 두 개 나 있었다. 무릎 모양으로. 그녀는 그걸 봤고, 검은 노트를 펴서 오늘 날짜를 적었다.
세션 0. 손바닥. 10×3. 스플릿 4/6/7. 심박 추정 140. 거짓말 없음.
그리고 그 아래에 한 줄 더.
내 것: 72 → 96.
자기 손목을 짚어보고 쓴 숫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