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명단에 없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서영은 그걸 사흘 동안 생각했다. 식탁 끝에 커피잔으로 눌린 구겨진 종이를 볼 때마다. 열네 명 중에 그녀가 삼 년 전 이전부터 알던 사람은 없었다. 그건 당연했다. 이 종이는 그런 종이였다. 그런데 자꾸 걸렸다.
"언니한테 말할까 해요."
수요일 밤 침대에서 그녀가 말했다. 도훈은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내려놓지 않고 물었다.
"부르려고?"
"아니요. 부르는 건 아니에요. 언니는 못 와요. 오면 안 돼요, 아마. 그냥... 말하려고요."
"왜."
그녀는 천장을 봤다. 그가 만든 천장은 아니었지만 그가 만든 침대에서 보는 천장이었다.
"삼 년 동안 언니한테 주인님을 '남자친구'라고 했어요. 그게 거짓말은 아니었는데, 다도 아니었어요. 이제 사람들 앞에서 목줄을 채우는데, 우리 열네 명 앞에서요, 그러고 나서 명절에 언니 집 가서 '남자친구 잘 지내' 하는 건... 뭔가 반이 없어요."
도훈이 책을 덮었다.
"내가 시켜서 하는 거 아니야."
"알아요."
"이건 내가 명령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야. 네 언니고 네 입이야."
"알아요. 그래서 물어본 게 아니라 말한 거예요."
그가 그녀를 봤다. 그러다 손을 뻗어 그녀 목의 사슬을 한 번 당겼다. 밤 인사였다.
"그럼 가."
*
지현의 아파트는 일산이었다. 조카는 유치원에 갔고 형부는 출근했다. 지현이 김치찌개를 끓여놨다. 둘이 밥을 먹는 건 반년 만이었다.
"얼굴 좋다. 그 사람이랑 잘 지내나 보네."
"응."
"결혼은 안 하고?"
"결혼은 안 해."
"왜, 그 사람이 싫대?"
"내가 안 해. 우리가 안 해."
지현이 젓가락을 멈췄다. 서영은 젓가락을 나란히 놓았다. 손이 그렇게 했다.
"언니. 나 뭐 하나 말할 게 있어."
그녀는 카디건 단추를 풀고 목을 보였다. 지현은 늘 그걸 목걸이로 봤다. 명절마다 "그 목걸이 예쁘네" 했다.
"이거 그 사람이 채운 거야. 이 년 전에. 자물쇠야. 열쇠는 그 사람이 갖고 있어."
지현이 사슬을 봤다. 자물쇠를 봤다.
"뭔 소리야."
"우리 관계가... 언니가 생각하는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아니야. 그 사람은 내 주인이야. 나는 그 사람 거야. 삼 년 됐어. 다음 달에 우리 아는 사람들 앞에서 정식으로 해. 이거보다 굵은 거를 채워. 그날 이후로는 안 빼."
말이 나왔다. 삼 년 동안 밖에 나온 적 없는 문장들이 지현의 식탁 위에 김치찌개 냄새와 함께 놓였다. 서영은 그게 이렇게 짧을 줄 몰랐다.
지현은 한참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러다 물었다.
"그거 그... 그런 거야? 사람 묶고 때리고 그런 거?"
"그런 것도 있어."
"너를?"
"응."
"네가 좋아서?"
"응."
지현이 일어났다. 싱크대로 가서 물을 마셨다.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서영은 젓가락을 한 번 더 맞췄다.
"엄마가 살아 계셨으면."
"언니."
"엄마가 살아 계셨으면 뭐라고 했을까 지금 생각하고 있어."
"엄마는 언니가 형부 만난다고 했을 때 그 사람 뭐 하는 사람이냐고만 물었어."
"그거랑 이거랑 같아? 넌 지금 개목걸이를—"
지현이 말을 멈췄다. 자기가 한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래도 취소하지 않았다.
서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릴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삼 년이었다. 하연이 화요일마다 술을 먹여준 그 겨울이 있었고, 유진의 "맞는 건지는 나도 몰라"가 있었고, 매년 삼월 십일일에 다시 읽는 계약서가 있었다. 그 문장을 처음 들은 사람은 서영이 아니었다. 서영은 그 문장을 자기 안에서 백 번쯤 들어본 사람이었다.
"언니. 언니 결혼할 때 뭐 약속했어."
"뭐?"
"기억나? 주례 앞에서."
"...평생 서로 아끼고 뭐 그런 거지."
"나도 그런 거 약속하는 거야. 방식이 다를 뿐이야."
"다르지. 다르지 않아? 넌 무릎을 꿇잖아. 그 사람 앞에서."
"응. 꿇어."
"그게 어떻게 같아."
서영은 언니를 봤다. 등을 돌린 채 싱크대를 잡고 있는 언니. 세 살 위. 엄마 장례식에서 상주 노릇을 다 한 사람. 서영이 대학 다닐 때 등록금을 반 내준 사람.
"언니. 언니가 나를 본 것 중에, 내가 스스로 정한 게 이거 말고 뭐가 있어."
지현이 돌아섰다.
"전공도 엄마가 정했고, 사서 시험 본 것도 안정적이라고 언니가 하라고 했고, 그 전 남자도 언니가 소개했어. 나 다 했어. 다 했잖아. 이건 내가 정했어. 내가 찾아갔고 내가 골랐고 내가 삼 년 있었어. 무릎 꿇는 것도 내가 정했어. 그 사람이 시켜서 꿇는 게 아니고, 내가 꿇겠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받아준 거야."
지현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이해해 달라는 거 아니야. 그냥 알아 달라는 거야. 언니가 모르는 채로 그날 서 있고 싶지 않았어."
서영은 카디건 단추를 다시 채웠다. 가방을 들었다. 지현이 붙잡지 않았다. 문 앞에서 서영이 돌아봤다.
"찌개 맛있었어."
*
지하철에서 손이 떨렸다. 아파트에서는 안 떨렸는데 지하철 손잡이를 잡으니까 떨렸다. 그녀는 도훈에게 전화하지 않고 메시지를 보냈다. "말했어요." 답이 바로 왔다. "공방으로 와."
공방 문이 열려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만들고 있지 않았다. 작업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들어가자 일어나서 문을 잠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았다. 톱밥 냄새. 오일 냄새. 그의 냄새.
"공방인데요."
"오늘은 그냥 안는 거야."
그녀는 그의 셔츠에 얼굴을 묻었다. 울지 않았다. 울 줄 알았는데 안 나왔다. 대신 몸이 계속 떨렸다.
그가 그녀를 작업대 옆 의자에 앉히고 위층에 올라가 차를 내려왔다. 그리고 바닥에 앉았다. 그가. 그녀 발치에. 그녀는 놀라서 그를 봤다.
"주인님."
"공방이야. 여기서는 친구."
"그래도—"
"마셔."
그녀는 차를 마셨다. 그가 그녀 발을 자기 무릎에 올려놓고 신발을 벗겼다. 양말을 벗기고 발을 주물렀다. 삼 년 동안 그가 그녀 발을 만진 건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는 처음이었다.
"언니가 개목걸이라고 했어요."
그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 살아 계셨으면 어쩌겠냐고요."
"너는."
"언니가 나를 본 것 중에 내가 스스로 정한 게 이거밖에 없다고 했어요."
그가 고개를 들었다. 오래 봤다.
"그렇게 말했어?"
"네."
"그 말이 나올 줄 알았어?"
"아니요. 나오고 나서 알았어요. 그게 진짠 거."
그가 그녀 발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 앞에 서서 그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제가 잘못했어요?"
"아니."
"언니 마음 아프게 했어요."
"그래. 그래도 아니. 네가 우리를 숨기지 않기로 한 거야. 그건 내가 시켜서 될 일이 아니었어. 삼 년 동안 한 번도 못 시킨 거야."
그녀는 그때 울었다. 공방 바닥에 톱밥이 있었고 그가 만든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가 서서 그녀 얼굴을 잡고 있었다. 그날 밤 명단은 열네 명 그대로였다. 바뀐 건 없었다. 그런데 뭔가가 온전해졌다.
밤 열한 시에 지현의 메시지가 왔다.
"네가 행복하다는 건 알겠어. 이해는 못 하겠어. 시간 줘."
서영은 그걸 도훈에게 보였다. 그가 읽고 핸드폰을 돌려줬다.
"답장은 뭐라고 해요?"
"네 언니야."
그녀는 한참 생각하고 썼다.
"응. 시간 줄게. 찌개 진짜 맛있었어."
그날 밤 침대에서 그가 그녀 목에 손을 얹고 잤다. 사슬 위에. 누르지 않고. 그냥. 그녀는 그 손 밑에서 오래 깨어 있다가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