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와 나무
도훈의 공방은 집 아래층이었다. 계단 열두 개를 내려가면 톱밥 냄새가 먼저 오고, 그다음에 기계 기름 냄새, 마지막으로 그가 쓰는 오일 냄새가 왔다. 서영은 그 순서를 눈 감고도 알았다.
토요일 오후, 그는 작업대에 도화지를 펴놓고 있었다. 가구 도면이 아니었다. 종이 위에는 원이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굵기가 다른 원, 이음새가 다른 원, 앞쪽이 살짝 두꺼운 원.
"목이야."
"제 목이요?"
"네 목."
그녀는 작업대 옆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 공방에서는 의자에 앉아도 됐다. 여기서 그녀는 손님이었다. 첫해에 그가 정한 것이었다. "공방은 내 일터야. 여기서는 네가 내 것이기 전에 내 친구 서영이야." 그래서 공방은 이 집에서 그녀가 그에게 반말을 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쓰지는 않았지만.
"가죽으로 하면 부드러워요. 유진 언니 것도 가죽이잖아요."
"유진 씨 건 십오 년 됐어. 하연이가 태오한테 준 것도 가죽이고. 근데 가죽은 닳아. 늘어나고. 나는 네가 십오 년 뒤에도 그날 그 굵기를 느끼길 바라."
"쇠요."
"쇠."
그녀는 목의 사슬을 만졌다. 이 년 동안 몸의 일부처럼 걸고 있었지만 얇았다. 샤워할 때 잠깐 빼놓으면 그 무게가 없다는 걸 알 만큼만 있었다. 도훈이 그리고 있는 원은 그것보다 훨씬 굵었다. 손가락 하나 폭.
"안 빠져야 해요."
"응."
"제 손으로는요. 주인님 손으로만."
"그렇게 만들 거야. 나사가 하나 들어가는데 그 나사에 맞는 공구가 세상에 하나뿐이야. 내가 갖고."
"잃어버리면요."
"그럼 네가 평생 차는 거지."
그녀가 웃었고, 그가 웃지 않았다. 그가 원 하나를 짚었다. 앞쪽에 작은 네모가 그려져 있었다.
"여기에 나무 넣을 거야."
"쇠에 나무를요?"
"이수 씨한테 물어봤어. 하연이가 아는 금속공예 하는 분. 쇠 판에 홈을 파서 나무 심을 수 있대. 두께가 얇아서 나무가 갈라질 수 있는데 물푸레나무는 괜찮을 거래."
물푸레나무. 그녀는 위층의 무릎판을 생각했다. 이 년 전 침대 옆에 놓인 그 판.
"무릎판 나무요."
"그거 만들 때 남은 거 있어. 같은 널에서 나온 거."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가 종이를 접었다.
"이수 씨 화요일에 시간 된대. 문래동."
*
이수의 작업실은 철공소 골목 삼층이었다. 철을 두드리는 소리가 골목 전체에 깔려 있어서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서영은 심장이 밖에서 뛰는 것 같았다.
이수는 사십 대 여자였고 앞치마에 은가루가 묻어 있었다. 인사를 하고 차를 내오고 도화지를 봤다. 오래 봤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다.
"뭔지는 안 물을게요."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즈랑 각인만 정확히 주세요. 그럼 됩니다."
"제가 잴게요."
도훈이 줄자를 꺼냈다. 이수가 잠시 그를 보다가 자기 줄자를 앞치마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서영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 도훈이 그녀 뒤에 서서 사슬을 옆으로 밀고 줄자를 목에 둘렀다. 손가락 하나가 줄자 아래로 들어갔다.
"숨 쉬어."
그녀가 숨을 쉬었다. 그가 숫자를 읽었다. 이수가 받아 적었다.
"밥 먹었을 때랑 안 먹었을 때 다르고, 여름이랑 겨울도 달라요." 이수가 말했다. "손가락 하나는 여유 두시는 게 맞아요."
"손가락 하나요."
"어느 손가락?" 이수가 처음으로 살짝 웃었다.
"제 손가락." 도훈이 자기 손을 들었다.
이수가 그의 손을 보고 다시 적었다. 그리고 물었다.
"각인은요."
도훈이 서영을 봤다. 여기까지는 둘이 정하지 못한 것이었다. 지난 며칠 밤 침대에서 몇 번 얘기했다. 그는 날짜를 넣자고 했고 그녀는 날짜는 계약서에 있으니 됐다고 했다. 그녀는 "돌아온다"를 넣자고 했고 그는 그 말이 떠나는 걸 전제한다고 했다. 그는 그녀 이름을 넣자고 했고 그녀는 자기 이름을 자기 목에 걸고 다니는 게 이상하다고 했다.
"안쪽에 한 글자만." 도훈이 말했다.
"뭐라고요."
"집."
이수가 적었다. 서영은 그 한 글자를 입 안에서 굴렸다. 집.
"이거 만지면 어디 있든 거기가 집이라고 느끼라고." 그가 그녀 보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이수에게 사이즈를 말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래서 더 그랬다.
이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종이를 정리했다. 삼 주 걸린다고 했다. 나무는 도훈이 가져다주기로 했다. 계단을 내려오며 이수가 뒤에서 말했다.
"두 분. 이런 거 몇 번 만들어 봤어요. 다들 그 말은 안 하고 사이즈만 줘요. 그래도 알아요. 오래 차는 거라는 거."
*
집에 돌아왔을 때 아직 해가 있었다. 도훈은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공방 문을 열었다. 서영이 따라 들어갔다. 그가 문을 잠갔다.
"여기서는 네가 내 친구지."
"네."
"오늘은 아니야."
그녀의 등줄기가 서는 게 느껴졌다. 삼 년 동안 공방에서 그가 이 말을 한 건 손에 꼽았다. 그녀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톱밥이 무릎에 붙었다.
"일어나. 작업대."
그녀는 일어나 작업대로 갔다. 그가 도화지를 치웠다. 물푸레나무 널이 그대로 있었다. 무릎판을 만들고 남은 것. 다음 주에 이수에게 갈 것.
"손 짚어."
그녀는 널 위에 두 손을 짚었다. 그가 뒤에서 그녀 치마를 허리까지 걷어 올리고 속옷을 한 번에 내렸다. 발목에 걸렸다. 그의 손바닥이 엉덩이를 한 번 쓸었다.
"이 나무 만지고 있어. 손 떼면 다시 시작이야."
첫 손바닥이 떨어졌다. 소리가 공방 천장에 부딪혔다. 그녀는 나무를 짚었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는 셀 필요가 없다고 했다. 오늘은 숫자가 아니라고. 그녀는 엉덩이가 뜨거워지는 것과 손바닥 아래 나무결이 도드라지는 것을 동시에 느꼈다. 열 번쯤에서 다리가 떨렸다. 그가 멈추고 손가락으로 그녀 다리 사이를 확인했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맞으면서 이렇게 흘려."
"죄송해요."
"죄송하지 마. 이수 씨 앞에서 목 재는 동안 이랬지."
"...네."
"그 사람 알았을 거야."
그녀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가 손가락을 빼고 자기 바지를 풀었다. 그리고 한 번에 그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나무를 붙잡았다. 손톱이 결에 걸렸다.
작업대가 흔들렸다. 그가 만든 작업대였고 튼튼했지만 흔들렸다. 톱밥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그녀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녀 목이 늘어났다. 다른 손이 목의 사슬을 잡았다.
"이거 곧 없어져."
"네—"
"그날 밤엔 이거보다 열 배 무거운 게 여기 있어."
그가 박아 넣었다. 그녀는 무릎이 꺾일 것 같았고 작업대 모서리가 배를 눌렀다. 아팠고 좋았다. 그 두 개를 구분하지 않게 된 것도 이 집에서였다.
"그거 차고 여기 이렇게 엎드려 있을 거야. 내가 나무 자르는 동안 옆에서 무릎 꿇고 있을 거고, 손님 오면 위층 올라가서 기다릴 거고, 손님 가면 내려와서 다시 꿇을 거야."
"네, 주인님—"
"삼 년 동안 그랬는데 다를 게 있어?"
"있어요."
그가 잠시 속도를 줄였다.
"뭐가."
"사람들이 알아요. 제가 어디 있는지."
그가 그녀 안 깊은 곳에서 멈춰 있었다. 그러다 그녀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나무 위에서 두 손이 겹쳤다.
"그래. 그게 달라."
그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말이 없었다. 그녀는 나무와 그 사이에서 눌렸다. 그가 뒤에서 그녀 음핵을 찾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녀가 나무에 이마를 댔다. 절정이 올 때 그녀는 나무에 이마를 대고 있었고, 그가 그녀 안에서 사정하는 걸 느꼈고, 톱밥 냄새와 오일 냄새와 그의 냄새가 하나였다.
그가 빠져나온 뒤에도 그녀는 손을 떼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손 떼도 돼."
"조금만요."
그는 기다렸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물푸레나무 결을 한 번 더 쓸었다. 삼 주 뒤 이 나무는 쇠 안에 들어가 그녀 목 앞에 있을 것이다. 그때 만지는 건 그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