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온 사람

딸이 온 것은 낮이었다.

십이월 중순, 명훈이 다음 불을 준비하며 초벌 그릇에 유약을 입히던 오후였다. 마당으로 승용차 한 대가 들어섰고, 지수가 내렸다. 서른둘의 딸은 서울에서 결혼해 살았고, 명절이 아니면 산에 잘 오지 않았다. 그날은 미리 연락도 없이 왔다. 근처에 시댁 일로 왔다가 들렀다고 했다.

명훈은 반가웠지만, 마음 한구석이 조여 왔다. 공방 안쪽 방에 연희의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희는 전날 밤 불 넣는 것을 보고 새벽에 서울로 내려갔는데, 미처 챙기지 못한 물건들이 있었다. 두 손으로 감싸던 그 사발, 벽에 걸린 삼베 목도리, 그리고 작업대 위, 다른 도구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놓인 밀랍 덩어리와 뼈붓과 놋쇠 촛대.

지수는 어릴 때부터 이 공방에서 자란 아이였다. 아버지의 도구가 어디 있어야 하는지, 무엇이 원래 이 집에 있던 것인지 몸으로 아는 아이. 그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몇 가지가 달라졌음을 곧 알아챘다.

"아빠, 여기 웬 목도리야?" 지수가 삼베 목도리를 손끝으로 건드리며 물었다. 목소리가 가벼웠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손님이 두고 간 거다." 명훈이 말했다.

지수는 대답하지 않고 작업대로 걸어갔다. 사발 하나가 다른 사발들과 떨어져, 창가 볕이 드는 자리에 따로 놓여 있었다. 누군가 아끼는 자리에 둔 것이 분명했다. 그 곁에 놓인 촛대와 밀랍을, 지수는 잠깐 보았다. 발수에 쓰는 밀랍이야 원래 공방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촛대가 새것이었고, 밀랍 덩어리에 붓질한 자국이 여러 번 겹쳐 있었다. 유약을 막는 데 쓰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여러 번.

"손님이 자주 와?" 지수가 물었다.

"가마 식는 걸 보러 오는 사람이 있다." 명훈은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었다. "차를 하는 사람이야. 그릇을 아는 사람이고."

지수가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그 눈에 여러 가지가 지나갔다. 놀람, 그리고 그 아래 무언가 더 오래된 것. 어머니가 죽은 지 여덟 해였다. 지수에게 이 공방은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집이었고, 아버지가 홀로 늙어 가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다른 여자의 사발이 볕 드는 데 놓여 있었다.

"몇 살인데." 지수가 물었다.

"그런 걸 왜 묻냐."

"아빠." 지수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엄마 방 아직 그대로 두잖아. 이불도 그대로고. 근데 여기는… 여기는 벌써 딴사람 물건이 이렇게 놓여 있고."

명훈은 유약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덟 해 동안 그는 아무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았다. 이제 처음으로, 설명해야 했다. 그런데 설명할 말이 없었다. 연희와 그가 나누는 것은 낮의 언어로 옮길 수 없는 것이었다. 밤의 언어, 온도의 언어였다.

"지수야." 그가 천천히 말했다. "네 엄마 방은 그대로 둘 거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건 다른 거야."

"뭐가 다른데." 지수가 말했다. 이제 눈에 물기가 어렸다. "아빠 외로운 거 아는데, 아는데…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엄마 자리에 딴사람 오는 거."

"엄마 자리에 오는 게 아니야." 명훈이 말했다. 이 말만은 분명했다. "그 사람은 그 사람 자리에 있어. 엄마 자리는 아무도 못 와. 그건 네 엄마 자리로 남을 거야. 하지만… 사람한테는 자리가 한 개만 있는 게 아니다, 지수야. 가마 안에도 자리가 여러 개야. 어느 자리에 두느냐에 따라 그릇이 다르게 나와. 그 사람은 그 사람 자리에 있는 거다."

지수는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겨울 산이 희끗희끗 눈을 이고 있었다. 이윽고 지수가 삼베 목도리를 조심스럽게 원래 자리에 걸어 놓았다. 손끝이 그 결을 스쳤다.

"아빠가 행복하면… 나는 그걸로 됐어." 지수가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근데 나 아직은 그 사람 못 만나겠어. 다음에. 다음에 마음 되면."

"그래." 명훈이 말했다. "천천히 하자. 서두르면 금이 가니까."

지수가 돌아가고 난 뒤, 명훈은 오래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창가에 놓인 연희의 사발이 저녁 볕을 받아 옆구리의 재 자국이 도드라졌다. 그는 그 사발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연희가 늘 그러듯이.

그날 밤, 명훈은 처음으로 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편지가 아니라 전화였다. 급한 마음이 편지의 느린 속도를 견디지 못했다.

"딸이 왔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날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했다. 감추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연희는 오래 말이 없었다. 명훈은 그 침묵의 온도를 재려 애썼다.

"제가 명훈 씨 삶에." 연희가 마침내 말했다.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금을 내고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명훈이 말했다.

"딸한테 저는… 엄마 자리를 넘보는 여자겠죠. 근데 명훈 씨, 저는 그런 자리 원한 적 없어요. 저는 그냥… 밤에 가마 식는 거 같이 보는 사람이면 됐는데. 그런데 그게 낮으로 나오니까 이렇게 되네요. 우리가 밤에만 만난 게, 어쩌면 이런 걸 알아서였을까요."

명훈은 그 말에 오래 대답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밤에만 만난 것은, 어쩌면 낮의 세상에 이 관계를 둘 자리가 없어서였다. 그건 편안한 도피이기도 했다. 그러나 낮은 결국 왔다. 낮은 언제나 온다.

"연희 씨." 그가 말했다. "우리가 밤에만 만나는 건, 이제 좀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두 사람은 각자의 어둠 속에서 오래 깨어 있었다. 산에서는 가마가 식었고, 서울에서는 눈이 내렸다. 처음으로, 두 사람 사이에 옅은 금 하나가 지나갔다. 아직 깨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온도가 잘못 내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