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물레
그해 겨울, 명훈은 불을 넣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날이 너무 추워 흙이 얼었다고, 장작이 젖었다고, 그럴듯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하나였다. 불을 넣으면 봉통을 봉한 밤이 오고, 그 밤이면 연희가 와야 하는데, 연희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희는 연락이 뜸해졌다. 편지도 짧아졌다. 딸의 일이 있고 나서, 연희는 스스로 뒤로 물러섰다. 그건 명훈을 원망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명훈을 아껴서였다. 연희는 자신이 이 사람의 삶에, 딸과 죽은 아내가 있는 이 오래된 자리에 금을 내는 존재가 될까 봐 두려웠다. 마흔여섯의 여자가, 스무 해 넘게 한 여자를 기리며 산 남자의 삶에 끼어들 자격이 있는가. 밤에는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 그러나 낮은, 낮은 그런 것을 묻게 했다.
'명훈 씨. 이번 달은 못 갈 것 같아요. 번역 마감이 겹쳤어요.' 연희의 편지는 그렇게 짧았다. 마감이 겹쳤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두 사람 다 알았다.
명훈은 그 편지를 받고, 물레 앞에 앉았다.
겨울의 공방은 추웠다. 손끝이 곱았다. 그는 흙을 이겨 물레에 올리고, 발로 물레를 돌리며, 사발을 뽑았다. 하나, 또 하나. 흙이 손안에서 벽을 세우고 올라왔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흔들리면 한쪽으로 쓰러졌다. 물레 위에서 흙은 정직했다. 마음이 흔들리면 흙도 흔들렸다. 명훈은 그날 열두 개의 사발을 뽑았고, 열두 개를 다 무너뜨렸다.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하나도 온전하지 않았다.
여덟 해 동안 그는 이 물레 앞에서 마음을 다스렸다. 흙은 그에게 규율이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도, 딸을 홀로 키운 고단함도, 물레 앞에 앉으면 손끝의 일이 되었다. 흙을 만지는 동안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를 살렸다. 그런데 이번 겨울에는, 물레가 그를 다스려 주지 못했다. 흙을 만지는 손끝에 자꾸 다른 온도가 어른거렸다. 밀랍이 지나간 등, 사발을 감싸던 두 손, 어둠 속에서 젖어 있던 눈.
그는 흙 묻은 손으로 창가의 사발을 감쌌다. 연희가 두고 간 사발. 옆구리에 재가 흐른 자국이 앉은 것. 그 자국을 손끝으로 오래 문질렀다.
그 사이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수는 명훈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을 알아챘다.
"아빠, 무슨 일 있어?"
"아니다." 명훈이 말했다.
"…그 사람이랑 무슨 일 있는 거지." 지수가 잠깐 말이 없다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지난번의 날카로움이 없었다. "내가 그날 아빠한테 너무 세게 말했나."
"네가 잘못한 거 없다." 명훈이 말했다. "네 마음도 옳다. 다 옳아. 그래서 어려운 거지, 누가 틀려서 어려운 게 아니라."
전화 너머로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아빠. 엄마가 아프기 전에… 나한테 그런 말 한 적 있어. 자기 없으면 아빠 혼자 두지 말라고. 아빠는 혼자 있으면 굳어 버리는 사람이라고. 그릇처럼 딱딱해져서, 나중엔 아무도 못 만지게 된다고. 나 그 말 그동안 잊고 있었어."
명훈은 수화기를 든 채 눈을 감았다.
"엄마가 그런 말을." 그가 겨우 말했다.
"응. 나 그때 어려서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이번에 아빠 목소리 들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지수가 말했다. "아빠, 그 사람… 다음에 데려와. 명절 말고, 그냥 아무 날에. 나 볼게. 못 만나겠다고 한 거, 취소야."
명훈은 오래 말하지 못했다. 창밖으로 겨울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여덟 해 동안 굳어 온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온도를 얻었다.
그날 밤 명훈은 연희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편지는 부치지 않았다. 봄에 사발을 부치지 않았듯이. 대신 그는 이번에는 다른 것을 했다. 짐을 챙겨, 물레에서 뽑아 초벌해 둔 사발 하나를 신문지에 싸서, 이튿날 첫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여덟 해 만에 처음으로, 명훈이 산을 내려가 연희를 찾아갔다. 밤이 아니라 낮에. 연희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이 한 번도 내주지 않았던 자신의 낮을 들고.
연희의 원룸은 오래된 책들로 가득했다. 문을 연 연희는 명훈을 보고 얼어붙었다. 산의 사람이 도시의 낮에, 자신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연희 씨." 명훈이 신문지에 싼 사발을 내밀며 말했다. 손이 조금 떨렸다. "제가 낮에는 준비가 안 됐다고 했지요. 그거… 거짓말이었습니다. 준비가 안 된 게 아니라, 겁이 났던 겁니다. 여덟 해 동안 낮을 아무한테도 안 열었으니까요. 그런데 열어 보니까, 별거 아니었습니다. 문을 여니까 그냥 연희 씨가 있네요."
연희의 눈에서 물기가 번졌다. 낮의 빛 속에서, 처음으로.
"들어오세요." 연희가 말했다. "밖이 추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