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번째 열쇠
새벽 두 시 십사 분, 도영은 엑셀 셀 하나에 갇혀 있었다.
정확히는 시트 세 개에 걸친 재고 자산 평가손실 항목이었는데, 숫자는 맞았고 공식도 맞았고 각주도 맞았다. 그런데 손이 저장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그냥 얼어 있었다. 뭐가 문제냐고 누가 물으면 문제는 없다고 답했을 것이다. 문제는 없는데 몸이 안 움직였다.
결산 시즌 육 주째였다. 회계법인 6층 창밖으로 아직 불 켜진 건물이 셋 보였다. 도영은 그 건물들이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고 상상하는 걸 위안 삼았다가, 위안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그만뒀다.
목이 뻐근했다. 넥타이는 이미 풀어놓은 지 오래였는데도 셔츠 칼라가 목을 조이는 것 같았다. 그는 손을 올려 목덜미를 문질렀다. 요즘 자꾸 하는 버릇이었다.
저장을 누르고 노트북을 닫고 택시를 잡았다. 택시 뒷자리에서 그는 휴대폰을 켰다. 회사 메일은 열지 않았다. 대신 반년 전부터 즐겨찾기에 넣어둔 게시판을 열었다.
처음 그 글을 읽은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새벽에 잠이 안 와서 커뮤니티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퍼피플레이 첫 파티 후기'라는 제목을 클릭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다. 강아지 코스튬 파티 같은 건가 했다.
글쓴이는 서른 몇 살 직장인이라고 했고, 어떤 클럽 지하에서 열리는 파티에 처음 갔다고 했다. 무릎 패드를 차고 네 발로 기어 다녔고, 핸들러라는 사람이 공을 던져줬고, 세 번째 공을 물어오다가 갑자기 머리가 꺼졌다고 했다.
머리가 꺼졌다.
도영은 그 표현에서 스크롤을 멈췄다. 그 밑에 글쓴이는 이렇게 썼다. "내일 뭐 해야 하는지, 지난주에 뭘 잘못했는지, 내가 지금 어떻게 보이는지, 그런 게 전부 한 번에 꺼졌어요. 남은 건 공이 어디 있는지랑 저 손이 날 쓰다듬어줄 거라는 확신뿐이었어요."
그날 이후 도영은 그 게시판의 퍼피플레이 카테고리를 전부 읽었다. 결산 시즌 새벽마다 하나씩. 신입 FAQ, 파티 규칙, 팔찌 색깔이 뭘 의미하는지, 핸들러와 오너가 어떻게 다른지, 하네스를 처음 사면 어떤 걸 사야 하는지에 대한 마흔두 개짜리 댓글 논쟁. 마흔두 개를 다 읽었다. 그는 회계사였다. 뭐든 자료를 다 읽은 뒤에야 움직였다.
그런데 자료를 다 읽었는데도 신청서는 석 달을 열어놨다가 닫았다.
택시가 아파트 앞에 서고 그는 문을 닫고 계단을 올랐다. 현관에서 구두를 벗고, 재킷을 벗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면서 거울을 봤다. 서른네 살, 회계사, 늘 정장, 늘 정확, 늘 괜찮음. 거울 속 남자는 옷을 벗고 있는데도 아직 정장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정장이 피부처럼 붙어 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들고 신청서를 열었다. 다음 파티는 이번 토요일. 클럽 '언더독' 지하 3층. 신입은 운영진이 핸들러를 배정한다는 안내 문구가 있었다. 닉네임 칸이 비어 있었다.
도영은 닉네임 칸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대신 비고란에 이렇게 썼다. "처음입니다. 이름은 아직 못 정했습니다. 규칙은 전부 읽었습니다."
전송을 눌렀다. 손은 떨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곳이 떨렸다.
---
토요일 밤 아홉 시, 언더독은 홍대 뒷골목에서도 한 번 더 꺾어 들어가야 나오는 건물 지하에 있었다. 지상 1층엔 평범한 칵테일 바가 있었고, 바 뒤편 계단으로 내려가면 지하 1층은 창고, 지하 2층은 일반 파티룸, 지하 3층이 오늘의 장소였다.
도영은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세 번 멈췄다. 두 번째 멈췄을 때 뒤에서 누가 "먼저 가세요" 하고 웃으며 지나갔다. 검은 하네스 위에 후드를 걸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도영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3층 입구에는 접이식 테이블 하나와 그 뒤에 앉은 남자가 있었다. 삼십대 후반쯤, 팔뚝에 작은 뼈다귀 타투, 태블릿과 팔찌 상자.
"신입? 이름 미정, 처음이라고 쓴 분?"
"네."
"나 재호. 오늘 여기 운영이고, 파티 내내 저 구석 카운터에 있을 거야. 불편한 거 있으면 무조건 나한테 와. 사람이건 물건이건 소리건. 알았지?"
"네."
"팔찌부터." 재호가 상자를 열어 보였다. 초록, 노랑, 빨강. "초록은 터치 환영. 노랑은 물어보고 터치. 빨강은 보기만. 오늘은 뭐로 할 거야? 신입은 대부분 노랑으로 시작해."
"노랑으로요."
재호가 노랑 실리콘 팔찌를 손목에 채워줬다. 사이즈가 맞았다. 그는 이어서 열쇠 하나를 건넸다. 작은 나무 태그가 달려 있었고 거기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27.
"사물함 27번. 정장은 거기 넣고, 파티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와. 안내 메일대로 검은 반바지랑 티셔츠면 돼. 하네스 없어도 돼, 첫날엔. 신발은 벗어. 무릎 패드는 담당 핸들러가 줄 거야."
"담당은……"
"우진이. 오래 했고 신입 많이 봤고 말이 느려. 좋은 뜻으로." 재호는 태블릿을 툭툭 치더니 덧붙였다. "그리고 하나만 미리 말해줄게. 여기서 본 얼굴은 여기서 끝이야. 나가면 아무도 아무것도 못 본 거야. 그게 이 파티 첫 번째 규칙이고, 너를 지키는 규칙이기도 해."
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규칙은 게시판에서 열 번쯤 읽었다. 그런데 누가 직접 말해주니까 다르게 들렸다.
---
사물함은 파티룸 옆 좁은 통로에 있었다. 학교 체육관 탈의실 같은 회색 철제 사물함이 두 줄. 여기저기 열쇠가 꽂혀 있었고, 어떤 건 열려 있었고, 어떤 건 잠겨 있었다. 안에는 청바지가, 운동복이, 그리고 놀랍게도 정장이 몇 벌 걸려 있었다.
도영은 27번 앞에 섰다. 열쇠를 넣고 돌렸다. 딸깍. 비어 있었다.
재킷을 벗었다. 걸었다. 넥타이를 풀었다. 손이 매듭에서 두 번 미끄러졌다. 세 번째에 풀렸다. 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풀었다. 옷장 거울 같은 게 없어서 다행이었다. 셔츠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그 위에 넥타이를 얹었다. 바지를 벗었다. 구두를 벗어 바닥에 놨다. 양말도.
가방에서 검은 반바지와 검은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온라인에서 산 것이었다. 사이즈만 보고 샀는데 반바지가 생각보다 짧았다. 허벅지가 서늘했다.
그는 사물함 안을 봤다. 옷걸이 하나에 정장 한 벌, 그 아래 구두 한 켤레. 그게 다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안에 사람 하나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서른네 살 회계사, 늘 정확, 늘 괜찮음.
문을 닫았다. 열쇠를 돌렸다. 딸깍.
열쇠를 반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가 얕아서 열쇠 끝이 밖으로 나왔다. 그는 그걸 두 번 밀어 넣었다.
"27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급하지 않았다.
도영은 돌아섰다. 통로 입구에 남자가 서 있었다. 삼십대 중반쯤. 회색 티셔츠에 검은 조거 팬츠, 맨발. 하네스도 팔찌도 눈에 띄는 건 없었다. 다만 왼쪽 손목에 검은 목줄 하나가 두 번 감겨 있었고, 손에는 무릎 패드 한 쌍이 들려 있었다.
"우진이야. 오늘 네 담당."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름 아직 없다고 들었어. 괜찮아. 오늘은 정하지 마."
우진이 통로 안으로 들어와서 도영 앞에 무릎 패드를 내밀었다. 검은색, 안쪽에 두꺼운 폼. 도영이 받았다.
"바닥이 매트긴 한데 오래 기면 무릎 아파. 아프면 말해. 말 안 나오면 나 두 번 두드려. 손이든 어깨든 어디든. 두 번."
"두 번."
"응. 그리고 하나." 우진이 도영의 반바지 주머니를 슬쩍 봤다. 열쇠 끝이 또 나와 있었다. "그거 내가 갖고 있을까? 기어 다니다가 흘리는 사람 많아."
도영은 잠깐 망설였다. 저 열쇠는 사물함 27번을 여는 유일한 열쇠였고, 그 안엔 정장이 있었고, 그 정장은 월요일 아침에 반드시 필요했다.
그는 열쇠를 꺼내 우진에게 건넸다.
우진은 그걸 조거 팬츠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올렸다. 지퍼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됐다. 이제 이건 내가 책임질게. 너는 오늘 밤 저거 신경 안 써도 돼."
우진이 파티룸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문 너머로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누군가 신나게 짖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들어가자. 규칙은 안에서 앉아서 천천히 말해줄게. 무릎 패드는 그 다음."
도영은 맨발로 우진을 따라 걸었다. 바닥이 차가웠다. 그런데 목은, 오늘 처음으로, 아무것도 조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