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첫날은 잠을 자지 못했다.

암막커튼을 쳤는데도 방이 밝았다. 밝은 것은 방이 아니라 머릿속이었다. 현수는 여덟 시에 누웠고 아홉 시에 일어나 영수증을 다시 봤고 열 시에 다시 누웠다. 열한 자리 숫자를 휴대폰에 입력해봤다. 저장하지는 않았다. 저장하면 이름을 써야 하는데 쓸 이름이 없었다. 입력한 숫자를 지웠다.

지시.

그는 그 단어를 두고 자기가 얼마나 모르는지 생각해봤다. 모르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스물여섯 해를 살면서 여자와 잔 적은 두 번이었고 두 번 모두 대학 때였고 두 번 모두 상대가 먼저 다가왔다. 그 두 번 사이에, 그리고 그 뒤로 이 년 동안, 그는 혼자였고 혼자인 사람은 상상을 한다. 상상 속에서 그는 언제나 하라는 대로 하는 쪽이었다. 그걸 누구한테 말한 적은 없었다. 말할 문장이 없었다. 그런데 그 문장이 영수증 뒷면에 적혀 있었다. 자기가 십일 개월 동안 두유를 앞으로 꺼내놓은 여자의 글씨로.

오후 두 시에 엄마 전화가 왔다.

"자니."

"아니요."

"목소리가 왜 그래."

"안 잤어요."

"이번 주말에 내려올 수 있어? 김장하는데."

"근무예요."

"하루도 못 빼?"

"네."

엄마는 한숨을 쉬지 않았다. 엄마는 한숨을 쉬는 사람이 아니었다. 밥은 먹었느냐고 물었고 현수는 먹었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그는 도시락을 먹었다. 어젯밤 폐기된 것이었다. 차가웠다.

그날 밤 세 시 사 분에 차임이 두 번 울렸다.

회색 코트였다. 여자는 냉장고로 갔고 두유를 꺼냈고 성분표를 읽었다. 초코바는 사지 않았다. 계산대에 두유를 올려놓았다. 동전 천사백 원.

"영수증 드릴까요."

"네."

현수는 영수증을 건넸다. 손이 떨렸다. 조금이었지만 종이가 떨리는 건 눈에 보인다. 여자는 영수증을 받아 반으로 접어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현수의 손을 보지 않았다. 아니, 봤다. 아주 짧게.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유 팩의 몸통을 잡고 돌아섰다. 차임이 두 번 울렸다.

어제 일은 없었던 것처럼.

현수는 그게 어떤 뜻인지 계산대에 서서 생각했다. 없었던 일이 아니었다. 영수증은 그의 책상 위에 있었다. 그런데 여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연락했느냐고, 왜 안 했느냐고, 읽었느냐고. 그냥 두유를 사고 영수증을 받고 나갔다. 그러니까 그건 이런 뜻이었다. 네가 연락할 때까지 나는 세 시 사 분에 두유를 산다. 그게 지시의 첫 번째였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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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그는 네 시에 계산대에서 휴대폰을 봤다.

손님이 없는 시간이었다. 검색창에 단어를 넣었다. 처음 넣은 단어는 너무 넓었고 두 번째 단어는 너무 좁았다. 세 번째에 커뮤니티가 나왔다. 회원 가입을 해야 읽을 수 있는 글이 많았다. 가입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글만 읽었다.

규칙이라는 말이 계속 나왔다. 신호라는 말도. 그만하라는 뜻으로 정해둔 단어가 있다는 것. 미리 이야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 해도 되는 것과 절대 하지 않는 것을 종이에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가 상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는데 훨씬 더 사무적이었다. 계약서 같았다. 그게 이상하게 그를 안심시켰다.

어떤 글은 자기 얘기 같아서 끝까지 읽지 못했다. 누가 시켜주기를 오래 기다렸다는 글. 시키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원하지 못하겠다는 걸 서른이 넘어서 알았다는 글. 현수는 휴대폰을 뒤집어 계산대에 놓았다. 대로 건너편 창을 셌다. 두 개.

열한 달이었다. 그는 열한 달 동안 매일 세 시에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두유를 앞으로 꺼내놓고, 이천육백 원을 미리 계산하고, 영수증 드릴까요, 라는 말을 준비했다. 그게 자기 밤의 유일한 약속이었다. 그 여자가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여자는 물은 게 아니라 확인한 것이었다.

그날 밤도 세 시 사 분에 차임이 울렸다.

두유. 천사백 원. 영수증 드릴까요. 네.

여자는 영수증을 받으면서 그를 봤다. 어제보다 한 박자 길었다. 그 한 박자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현수는 알 수 없었다. 묻는 것도 재촉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보는 것이었다. 성분표를 읽듯이.

여자는 나갔다. 차임이 두 번 울렸다.

현수는 여자가 계산대를 짚었던 자리를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손가락을 그 자리에 댔다.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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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에는 오지 않았다.

세 시 사 분에 차임은 울리지 않았다. 현수는 냉장고 앞줄에 둔 두유를 봤다. 유통기한이 삼 주 남은 초록색 팩. 세 시 십 분. 세 시 십오 분. 대리기사 한 명이 들어와 캔커피를 사고 취식대에 서서 마셨다. 그는 세 시 이십 분에 나갔다. 세 시 삼십 분.

현수는 자기 몸이 어떻게 되는지 봤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계산대 아래에서 발을 옮겼다. 창을 셌다. 하나. 왜 하나인지. 세 개였는데.

여자는 아파서 안 올 수도 있었다. 일이 있어서. 여행을 가서. 그냥 오늘은 두유가 필요하지 않아서. 그는 이 모든 이유를 순서대로 떠올렸고 순서대로 믿지 않았다. 열한 달 동안 그 여자는 세 시 사 분에 왔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추석 연휴에도. 오지 않은 날은 없었다.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알았다. 자기가 사흘을 준 게 아니라 그 여자가 사흘을 준 것이었다. 사흘째 밤에 오지 않는 것도 그 사흘의 일부였다. 그 여자가 없는 세 시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라는.

알았다. 그것은 열한 달 동안 그가 살았던 밤과 똑같은 밤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세 시. 창문을 세는 세 시. 그런데 견딜 수 없었다. 열한 달 동안 견뎠던 것을 하루 견딜 수 없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그는 알았다. 영수증이었다. 기다림에 이름이 붙으면 그건 더 이상 기다림이 아니라 갈증이 된다.

네 시가 지났다. 다섯 시가 지났다. 물류 상자는 정리했고 폐기는 뺐고 바닥은 닦았다. 다섯 시 오십 분에 아침 교대가 왔다. 사장 대신 며칠 전부터 나오는 여자였다. 현수와 비슷한 나이였고 이름표에 유진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진은 안녕하세요, 라고 했고 현수는 네, 라고 했다. 앞치마를 벗어 걸었다.

여섯 시 이 분에 문을 밀고 나갔다. 차임이 등 뒤에서 두 번 울렸다.

밖은 어두웠다. 십일월의 여섯 시는 밤과 다르지 않다. 대로에 첫 버스가 지나갔다. 현수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건너편 아파트 단지. 불 켜진 창이 몇 개 있었다. 어느 창인지 몰랐다.

휴대폰을 꺼냈다. 영수증은 책상에 있었지만 숫자는 외우고 있었다. 사흘 동안 입력하고 지우기를 반복하면 외우게 된다. 숫자를 입력했다. 무슨 말을 써야 할지 사흘을 생각했는데 결국 나온 것은 준비된 문장이 아니었다.

준비가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알고 싶어요.

전송을 눌렀다. 여섯 시 삼 분이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그는 건너지 않았다. 다시 신호가 바뀌기 전에 휴대폰이 울렸다.

그거면 돼.

그리고 곧바로 한 통 더.

목요일 오전 열 시. 자고 와.

그리고 아파트 이름, 동, 호수.

현수는 건너편을 봤다. 어느 창인지 여전히 몰랐다. 그러나 그 창 중 하나에서 누군가가 지금 휴대폰을 내려놓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 사람은 세 시에 오지 않고 여섯 시 삼 분에 답장을 했다. 그러니까 깨어 있었다. 세 시에도, 지금도. 그가 창을 세는 동안 그 여자도 깨어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현수는 집으로 갔다. 여자가 자고 오라고 했으니까.

그날은 여덟 시에 눕자마자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