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노트
목요일 오전 열 시에 낮이 있었다.
현수는 여섯 시에 퇴근해서 집에 갔고 자지 않았다. 자고 오라고 했는데 자지 못했다. 샤워를 두 번 했다. 옷을 세 번 갈아입었다. 결국 처음 입었던 검은 니트와 청바지로 돌아갔다. 아홉 시 반에 집을 나섰다. 대로에는 차가 많았다. 그는 이 대로가 이렇게 넓은 줄 몰랐다. 새벽에는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 좁아 보였다.
아파트는 지은 지 십오 년쯤 된 곳이었다. 칠 층.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자기 얼굴을 봤다. 잠을 안 잔 얼굴이었다. 칠공삼 호 앞에 서서 숨을 한 번 쉬고 벨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회색 코트가 아니었다. 검은 스웨터에 머리를 묶고 있었다. 그리고 낮이었다. 등 뒤로 창이 있었고 창으로 빛이 들어왔다. 현수는 이 여자를 형광등 아래에서만 봤다. 빛 아래에서 여자는 서른여덟쯤으로 보였고 피곤해 보였고, 그리고 괜찮아 보였다. 그게 그가 떠올린 단어였다. 괜찮아 보인다.
"들어와. 신발 벗고. 식탁에 앉아."
집은 깨끗했다. 깨끗하다기보다 물건이 적었다. 거실 한쪽 벽에 책상이 있고 모니터가 두 대, 헤드폰이 하나 걸려 있었다. 소파는 회색이었다. 식탁은 사인용이었는데 의자 하나만 바닥에 자국이 있었다. 나머지 의자 셋 중 하나가 지금 막 빼놓은 것처럼 비스듬했다. 현수는 그 의자에 앉았다.
"커피 마셔?"
"네."
여자는 커피를 내렸다. 기계 소리가 났다. 그동안 현수는 손을 어디에 둘지 몰라 무릎에 두었다. 컵이 앞에 놓였다. 여자는 맞은편에 앉았다. 자국이 있는 의자였다. 그리고 검은 스프링 노트를 식탁 위에 올렸다. 펜도.
노트를 펴고 첫 장 맨 위에 무언가를 썼다. 노트를 돌려 현수 쪽으로 밀었다.
서지혜.
"내 이름. 이제 알았지."
"네."
"네 이름 써."
현수는 펜을 받아 그 아래에 썼다. 김현수. 글씨가 삐뚤었다. 여자는, 지혜는, 노트를 다시 가져갔다.
"먼저 말해둘게. 낮에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고 당분간은 마지막이야. 규칙은 밝을 때 쓰는 거야. 밝을 때는 그것만 해. 나머지는 밝을 때 안 해."
"네."
"왜 연락했어."
현수는 커피를 봤다.
"모르겠어서요. 뭔지."
"뭔지 모르는데 연락했어?"
"알고 싶어서요."
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답이 됐다는 뜻으로 보였다.
"이런 거 해본 적 있어."
"없어요."
"상상은."
현수는 잠깐 멈췄다. 이 사람 앞에서 거짓말을 하면 무엇이 되는지 그는 몰랐다. 그런데 하고 싶지 않았다.
"있어요."
"그럼 하나씩 물을게. 사실대로 대답해. 그게 첫 번째 규칙이야."
지혜는 노트에 썼다. 소리 내어 읽으면서 썼다.
하나. 그녀가 물으면 사실대로 답한다.
"둘. 세 시의 편의점에서 우리는 손님과 알바생이야. 그 이상은 없어. 거기서 나한테 아무것도 하지 마. 눈으로도."
둘. 세 시의 편의점에서는 손님과 알바생이다.
"셋. 연락은 자정 넘어서만.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하지 마. 내가 먼저 하는 일도 없을 거야."
셋. 연락은 자정에서 여섯 시 사이에만.
"넷. 신호. 초록, 노랑, 빨강. 초록은 계속. 노랑은 잠깐 멈추고 얘기해. 빨강은 전부 멈춰. 누가 말해도. 내가 말해도."
"…지혜 씨도요?"
"나도 사람이야."
넷. 초록, 노랑, 빨강. 빨강이면 누가 말하든 전부 멈춘다.
"다섯."
지혜는 잠깐 그를 봤다.
"내가 허락하지 않은 사정은 없어. 여기서든, 집에서든, 혼자든."
현수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지혜는 기다렸다. 그가 뭐라고 말하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열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썼다.
다섯. 그녀가 허락하지 않은 사정은 하지 않는다.
"여섯. 몸에 남는 흔적은 내가 만드는 것만. 다른 사람이 만드는 건 낮에 해."
"다른 사람요?"
"넌 스물여섯이야. 낮이 있어. 있어야 해.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다만 그 사람이 여기 오는 건 아니지."
여섯. 몸의 흔적은 그녀만 남긴다.
"일곱. 언제든 그만둘 수 있어. 너도 나도. 그만둘 때는 말하고 그만둬. 사라지지 마."
지혜는 그 문장을 쓰는 동안 조금 느려졌다. 현수는 그것을 봤다.
일곱. 그만둘 때는 말하고 그만둔다. 사라지지 않는다.
"이게 내 규칙이야. 이제 네 차례."
"제 차례요?"
"안 되는 것. 하고 싶지 않은 것. 지금 말해."
현수는 모른다고 했다. 정말로 몰랐다. 지혜는 그럴 거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씩 말했다.
"묶는 것."
"…괜찮을 것 같아요."
"말로 하는 것. 명령. 그런 거."
"네."
"보게 하는 것. 네가 보기만 하는 것."
"…네."
"참게 하는 것."
현수는 다섯 번 규칙을 생각했다. "네."
"때리는 것."
침묵이 있었다.
"모르겠어요."
지혜는 노트에 썼다. 보류. 다른 것은 쓰지 않았다.
"내 것도 말할게. 얼굴은 안 때려. 사진, 영상 없어. 이 집 밖에서는 안 해. 다른 사람 안 섞어. 그리고 네가 노랑이라고 하면 나는 무조건 멈춰서 물어. 이건 규칙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하는 거야."
지혜는 노트 아래쪽에 자기 이름을 썼다. 노트를 돌려 그에게 밀었다. 현수는 그 아래에 이름을 썼다. 이번에는 조금 덜 삐뚤었다.
지혜가 노트를 닫았다.
"일어나."
현수는 일어났다.
"코트 벗어. 의자에 걸어."
그는 코트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다시 앉아. 손은 식탁 위에."
앉았다. 손을 식탁 위에 올렸다. 손바닥을 아래로. 나무가 차가웠다. 지혜는 그 손을 봤다. 오래 봤다. 그가 열한 달 동안 이 여자의 손을 봤던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가 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보는 방식이었다.
"떨려."
"네."
"괜찮아."
지혜가 손을 뻗었다. 두 손가락을 현수의 왼쪽 손목 안쪽에 댔다. 맥이 뛰는 자리였다. 손가락은 차가웠다. 두유 팩을 감아 잡던 손이었다. 그 손가락이 그의 맥을 세는 동안 현수는 숨을 쉬는 법을 잊었다가 다시 기억했다.
지혜가 손을 뗐다.
"다음 목요일. 퇴근하고 바로 와. 해 뜨기 전에. 씻지 말고 와. 여기서 씻어."
"네."
"그리고 오늘 밤 세 시에 내가 가면 넌 알바생이야."
"네."
지혜가 아주 조금 웃었다. 눈가에 있던 자리가 맞았다. 웃음이 지나간 자리였다.
"그 '네'. 그거 좋아. 당분간 나한테 하는 말은 그거만 해."
"…네."
"됐어. 가서 자."
현관에서 현수가 신발을 신는 동안 지혜는 뒤에 서 있었다.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 지혜의 손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손바닥 전체가. 삼 초쯤. 그리고 떨어졌다.
문이 닫혔다.
현수는 칠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손목 안쪽이 아직 차가웠다. 목덜미는 뜨거웠다. 두 온도가 몸 안에서 만나지 않고 각자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열한 시였다. 햇빛이 아스팔트에 그대로 떨어졌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시간의 도시는 그가 모르는 곳이었다. 유치원 버스가 지나갔다. 택배 기사가 카트를 밀었다. 카페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모두가 무언가를 하고 있었고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보지 않았다.
그는 대로를 건너 편의점 앞을 지났다. 안에 사장이 있었다. 사장은 그를 보지 못했다. 낮의 편의점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집에 들어가 커튼을 쳤다. 눕기 전에 휴대폰을 봤다. 자정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쓰지 않았다. 그게 첫 번째로 지킨 규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