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속의 관객
마지막 밤, 혜림은 서준에게 아무 옷도 고르지 않았다.
"오늘은 규칙이 없어?" 그가 물었다. 조금 불안한 눈치였다. 규칙 없는 게임을 이 남자는 견디지 못했다.
"규칙은 하나야. 오늘은 딱 하나." 혜림이 그의 앞에 섰다. "오늘 넌 관객을 확인해도 돼."
서준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껏 절대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확인하는 순간 상상이 죽는다는 걸 두 사람 다 알았으니까. 그녀가 지금 그 금기를 스스로 열고 있었다.
"밖을 보라고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라고요?" 그의 목소리에 배신감 비슷한 게 섞였다. "그럼 다 끝나잖아요. 그럼 이건 그냥…"
"밖을 보라는 게 아니야." 혜림이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돌아봐. 유리를."
그녀는 조명을 다시 배치해 두었다. 오늘은 쇼윈도를 정면으로 비추지 않았다. 대신 서준의 뒤쪽, 매장 안을 밝게 하고 유리 밖 거리를 완전한 암흑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하면 유리는 창이 아니라 거울이 된다. 낮에는 세상을 보여주던 그 유리가, 밤이 되고 조명이 바뀌면 오직 이쪽만을 되비춘다.
서준이 천천히 유리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거기, 검은 유리 안에, 그가 있었다. 조명 아래 완전히 드러난 자기 자신이. 지금껏 그는 이 유리를 통해 밖을 상상했다. 저 어둠 어딘가의 없는 관객을. 그런데 오늘 그 유리는 그에게 단 한 명의 관객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기 자신.
"봐." 혜림이 그의 뒤에 서서 어깨에 턱을 얹었다. 그녀의 모습도 유리에 함께 비쳤다. "네가 그렇게 보여지고 싶었던 그 사람. 저 어둠 속에서 널 보고 있다고 상상한 그 관객. 그게 누구였는지 알아? 처음부터 너였어. 넌 남한테 보여지고 싶었던 게 아니야. 네가 이렇게 좋은 걸, 네 눈으로 보고 싶었던 거야."
서준은 유리 속의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혜림의 손이 뒤에서 그를 감싸는 것도, 그 손이 만드는 감각도, 전부 유리에 비쳤다. 이번엔 상상이 아니었다. 각도로 감춘 비밀도 아니었다. 다 보였다. 그에게. 오직 그에게.
"이게 진짜 관객이야." 혜림이 그를 천천히 애무하며 속삭였다. 그녀의 손이 만드는 모든 것이 검은 유리 위에서 재생됐다. "널 가장 열심히 보는 사람. 널 가장 원하는 사람. 지금껏 네가 어둠 속에 만들어 세운 그 모든 관객이 사실은 이 한 사람이었어."
서준의 숨이 무너졌다. 그는 유리에서 눈을 떼려 했지만 뗄 수 없었다. 자기가 무너지는 걸 보는 것, 혜림의 손 안에서 자기 얼굴이 풀어지는 걸 보는 것, 그건 지금껏 없는 관객에게 상상으로만 내주던 자신을 처음으로 자기 눈으로 목격하는 일이었다. 부끄러움과 도취가 동시에 밀려왔다. 그는 손을 들어 유리에 짚었다. 유리 속의 자기 손과 맞닿았다.
"보여요." 그가 겨우 말했다. "저요. 다 보여요."
"좋아?"
"…네. 좋아요. 무서울 만큼."
혜림은 그를 유리 앞에 세운 채로,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리듬을 늦추지 않았다. 서준이 끝을 향해 갈수록 유리 속의 남자도 함께 무너져 갔고, 그는 그 두 개의 자신 — 실제의 몸과 유리 속의 상 — 사이에서 완전히 길을 잃었다. 어느 쪽이 보는 쪽이고 어느 쪽이 보여지는 쪽인지. 마침내 그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그는 검은 유리 속 자기 눈을 똑바로 마주 본 채였다. 없는 관객이 아니라, 있는 자기 자신을. 그리고 그 뒤에서 그를 안고 함께 비친, 실재하는 단 한 사람의 관객을.
한참 뒤, 두 사람은 유리 앞 바닥에 나란히 앉았다. 서준의 등이 유리에 닿아, 그의 체온이 찬 유리를 데웠다. 밖은 여전히 어둠이었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고,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제 없는 관객은 필요 없겠네." 혜림이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 조금은 서운한, 조금은 후련한 목소리로.
서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웃었다. 마감 후의 그 나른하고 만족스러운 웃음.
"아니요. 이제 알았으니까, 상상이 더 재밌어질 것 같아요. 저 어둠 속에 누가 있든 없든, 진짜로 보고 있는 건 나랑 누나라는 걸 아니까. 없는 관객은 양념이에요. 진짜 요리는 이거고."
혜림은 그 말에 오래 웃었다. 이십 년 동안 유리 안에 마네킹을 세워왔지만, 이렇게 잘 진열된 것은 처음이었다. 살아 있고, 그녀를 사랑하고, 보여지는 법을 마침내 스스로 이해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명을 껐다. 유리가 다시 창으로 돌아왔다. 텅 빈 청담동 골목이, 어둠 너머로 조용히 드러났다.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혜림은 셔터를 내렸다. 철컹. 세상이 닫혔다. 그리고 이번엔, 그 소리가 그냥 하루가 끝나는 소리처럼 들렸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매장을 나섰다. 내일 아침이면 이 유리 안엔 다시 진짜 마네킹이 설 것이다. 옷을 입고, 표정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아무도 그 유리 앞에서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것이다.
그게 좋았다. 아는 사람은 둘뿐인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