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지나가는 사람
문제는, 상상 속 관객만 있으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골목에는 진짜 사람이 지나갔다. 정확히는, 지나가다 말았다.
시작은 평소와 같았다. 혜림이 고른 건 트렌치코트였다. 클래식한 카멜색, 벨트만 헐겁게 묶고 안에는 아무것도. 서준은 그 코트가 마음에 든 눈치였다. 마네킹치고는 격이 있다고. 그는 유리 상자 안에서 코트 깃을 세우고,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완벽한 실루엣을 만들었다. 잡지 화보 속 남자처럼.
"오늘 관객은 누구야?" 혜림이 어둠 속에서 물었다.
"아직 안 정했어요. 오늘은 그냥… 기다려 볼래요. 누가 올 것 같아요."
혜림은 그 말을 흘려들었다. 서준의 예감 같은 건 언제나 자기가 보여지고 싶다는 소망의 다른 이름이었으니까. 그녀는 코트 안으로 손을 넣어 벨트 매듭을 풀었다. 코트 앞자락이 벌어지며 조명이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서준의 숨이 깊어졌다.
바로 그때, 골목 끝에서 발소리가 났다.
진짜 발소리였다. 하이힐. 또각, 또각. 상상이 만들어낸 리듬이 아니라, 불규칙하게 취기가 묻은 진짜 걸음. 혜림의 손이 멈췄다. 서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한 여자가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늦은 시각에 어울리지 않게 화사한 원피스, 손에는 벗어 든 구두 한 짝. 아마 이 근처 술자리에서 나와 택시를 잡으려는 참인 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환하게 빛나는 쇼윈도로 향했다.
"움직이지 마." 혜림이 낮게, 그러나 이번엔 완전히 다른 무게로 속삭였다. 이건 게임의 규칙이 아니라 진짜 지시였다. "지금 움직이면 그냥 변태 커플이야. 안 움직이면 넌 그냥 마네킹이고."
서준은 얼어붙었다. 진짜로. 이번엔 규칙 때문이 아니라 심장이 멎어서. 코트 앞자락은 벌어져 있고, 그 안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조명은 무자비하게 밝았다. 여자가 유리 앞에 멈춰 섰다.
혜림은 어둠 속 각도로 몸을 완전히 낮췄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서준은 온전히 보였다. 벌어진 코트째로.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취기 어린 눈으로 유리 속 남자를 뜯어봤다. 혜림은 숨도 못 쉬고 지켜봤다. 서준의 인생 최고의 연기가 지금 필요했다. 그리고 서준은 — 해냈다. 그는 마네킹이 되었다. 시선을 한 점에 고정하고, 눈도 깜빡이지 않고, 숨조차 배 아래로 삼켰다. 벌어진 코트 안의 명백한 진실을, 그는 대리석의 무표정으로 덮었다.
여자가 유리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우와…" 하는 감탄이 유리를 넘어 희미하게 들렸다. "요즘 마네킹 진짜 잘 만드네."
그러더니 그녀는 핸드폰을 꺼냈다.
혜림의 등골에 서늘한 것이 지나갔다. 사진. 여자가 이 진열창을, 벌어진 코트를 입은 이 마네킹을 찍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이게 SNS에 올라가서 누군가 확대해서 본다면 —
서준이 딱 그 순간, 규칙을 어겼다.
아주 미세하게, 그는 코트 자락을 여몄다. 마네킹이 절대 할 수 없는 동작을. 여자가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어머!" 하는 비명. 그녀는 두어 걸음 물러났다가, 취기 속에서 자기가 뭘 본 건지 자신을 못 하고, 결국 도망치듯 골목을 빠져나갔다. 또각또각 소리가 멀어졌다.
정적.
혜림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웃음이 터졌다. 참으려 했지만 도저히 안 됐다. 배를 잡고 웃었다.
"너 방금 저 여자 인생에 평생 갈 미스터리 하나 심었어. 청담동에 손 움직이는 마네킹이 있다고. 아무도 안 믿어줄 거야."
서준도 그제야 코트에 얼굴을 묻고 웃었다. 안도와 흥분이 뒤섞여 몸이 떨렸다. "저 진짜… 심장 터지는 줄 알았어요."
"왜 여몄어? 그냥 있지."
"그건…" 서준이 눈을 들었다. 그 눈에 뭔가 새로운 게 있었다. "진짜로 찍히는 건 싫었어요. 진짜로 남는 건. 그건 상상이 아니라 증거잖아요. 증거는… 재미없어요."
혜림은 웃음을 멈췄다. 이 남자가 방금 스스로 게임의 심장을 말로 정리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원한 건 관객이 아니었다. 관객의 가능성이었다. 실제로 찍히고, 실제로 들키고, 실제로 증거가 남는 순간, 그 아슬아슬한 상상의 세계 전체가 그냥 값싼 현실로 추락한다.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강했다.
"이리 와." 혜림이 코트째로 그를 끌어당겼다. 조명을 끄고, 어둠 속에서, 진짜 아무도 없는 것이 확실해진 그 매장 안에서 그녀는 그를 안았다. 여전히 웃으면서. "진짜 관객은 위험해. 알았지? 우린 없는 관객으로만 논다."
"네." 서준이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없는 관객으로만."
그러나 혜림은 알았다. 방금의 아슬아슬함이 서준의 안에 무언가를 켜버렸다는 걸. 다음에 그가 그 선을 스스로 시험하려 들 거라는 걸.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녀도 조금은 그 시험이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