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른 것만 입어
규칙은 세 개였다. 혜림은 마감을 마친 매장의 계산대에 걸터앉아 하나씩 짚어주었다. 손가락을 접어가며.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마네킹은 움직이지 않으니까."
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췄다. 끄덕이는 것도 움직이는 것이므로. 혜림이 그 자제를 알아채고 입꼬리를 올렸다. 이 남자는 규칙을 사랑하는 종류였다. 규칙이 있어야 그 안에서 마음껏 무너질 수 있는.
"둘. 내가 고른 옷만 입는다. 네 취향은 오늘 매장 밖에 두고 왔어."
"셋은요?"
"셋." 그녀가 계산대에서 내려와 그에게 다가갔다. "저 유리 밖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 너는 절대 확인하지 않는다. 궁금해하는 건 허락할게. 확인은 안 돼."
그게 핵심이었다. 혜림은 알고 있었다. 확인하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아무도 없다는 걸 두 눈으로 보면, 상상은 증거 앞에서 죽는다. 서준에게 필요한 건 영원히 결론 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누가 봤을까. 봤다면 무엇을 봤을까. 그 미결의 상태 속에서만 그의 피부는 팽팽해졌다.
오늘 그녀가 고른 건 얇은 셔츠 하나였다. 소재가 좋은 흰 셔츠. 단추를 목까지 채우면 단정한 신사복이지만, 조명 아래서는 몸의 윤곽이 그림자처럼 비쳤다. 그리고 아래는 아무것도. 셔츠는 허벅지 중간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이걸요?"
"이걸." 혜림이 그의 손에 셔츠를 쥐여줬다. "마네킹은 부끄러워하지 않아. 마네킹은 그냥 입혀진 대로 있는 거야."
서준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혜림은 조명을 조정했다. 쇼윈도 정면의 스포트라이트만 남기고 나머지를 껐다. 이제 매장 안은 무대였다. 도로 쪽 어둠에서 보면, 저 환한 유리 상자 안에 선 사람은 스스로 빛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실제로 보는 사람이 있든 없든.
서준이 쇼윈도 안, 마네킹이 서던 그 자리에 섰다. 흰 셔츠, 맨다리, 시선은 정면 어둠. 혜림은 몇 발짝 떨어져 그를 감상했다. 감독이자 유일한 확실한 관객으로서.
"손을 조금 내려." 그녀가 지시했다. "그래. 다리는 어깨너비. 마네킹은 무릎을 붙이지 않아, 그건 부끄러운 사람이 하는 짓이야."
서준이 자세를 잡았다. 셔츠 자락이 미묘하게 들리며 안쪽이 어둠에 잠겼다. 혜림은 그가 이미 반쯤 반응하고 있는 걸 보았다. 아무도 만지지 않았는데. 오직 보여지고 있다는 감각만으로.
"밖에 누가 있어?" 그녀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확인하고 싶어?"
"…네."
"안 돼." 혜림은 천천히 그의 뒤로 돌아갔다. 유리에서는 그녀가 보이지 않도록, 어둠 쪽에 몸을 숨긴 채. 그리고 뒤에서 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의 배, 그리고 아래로. 서준의 몸이 팽팽하게 굳었지만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다. 규칙 하나를 지키느라, 그는 다른 모든 감각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움직이면 안 돼." 그녀가 귓가에 속삭였다. 손은 이미 그를 감싸고 있었다. 느리게, 놀리듯이. "지금 저 유리 밖에서 누가 널 보고 있다고 생각해봐. 걸음을 멈추고, 이 환한 상자 안에 선 남자를 보고 있어. 근데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는 몰라. 앞에서는 그냥 서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 표정 하나 안 바뀌는 마네킹."
서준의 숨이 얕고 빠르게 끊겼다. 그러나 얼굴은, 정면 유리에 비친 그의 얼굴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그게 그를 미치게 하는 지점이었다. 밖에서 보는 사람은 이 고요밖에 못 본다. 이 고요 아래에서 그가 얼마나 무너지고 있는지는, 오직 혜림과 그 자신만 안다. 비밀은 두 사람의 것이고, 시선은 상상 속 누군가의 것이었다.
혜림의 손이 리듬을 붙였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 서두르는 건 관객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짓이니까. 그녀는 그를 벼랑 끝까지 데려갔다가, 손을 멈추고, 다시 데려갔다. 서준의 허벅지가 떨렸다. 무릎을 붙이고 싶은 본능과 규칙 사이에서.
"마네킹은 떨지 않아." 혜림이 나무랐다. 그러나 목소리엔 웃음이 배어 있었다.
"못… 참겠어요."
"참아. 저 밖의 사람이 아직 안 갔어."
물론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혜림도 알고 서준도 알았다. 그런데 그 없는 사람이, 있는 어떤 사람보다 더 강하게 그를 붙들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손에 힘을 주었을 때, 서준은 결국 무너졌다. 흰 셔츠 아래에서, 환한 유리 상자 안에서, 밖에서 보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서 있는 채로.
그는 자세를 끝까지 지켰다. 그게 그의 자부심이었다.
혜림이 뒤에서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잘했어." 진심이었다. "이제 움직여도 돼."
서준이 그제야 무릎을 꺾으며 유리에 손을 짚었다. 환한 유리에 손자국이 남았다. 어둠 밖에서 누군가 봤다면, 그건 마네킹이 갑자기 살아 움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혜림은 조명을 켜고 셔터를 내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일은 옷을 하나 더 줄여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