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가 내려간 뒤에
혜림의 매장은 청담동 골목 안쪽,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에 있었다. 그게 전략이었다. 아무나 못 찾는 곳에 있어야 찾아온 사람이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느낀다. 마흔다섯 해를 살면서 그녀가 배운 몇 안 되는 확실한 진실 중 하나였다. 사람은 보이는 것보다 상상하는 것에 더 약하다.
서준을 처음 본 것도 그 매장에서였다. 스물아홉, 광고 촬영 스타일링을 맡긴 대행사에서 소품을 가지러 온 청년이었다. 그는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만졌는데, 만지는 게 아니라 읽는 것 같았다. 소재의 결을, 재봉선의 방향을, 안감이 몸에 닿을 때의 온도까지. 혜림은 그 손을 오래 봤다.
"입어볼래요?"
그녀가 물었을 때 서준은 잠깐 놀란 얼굴을 했다. 손님도 아니고, 살 것도 아닌데. 하지만 그는 재킷을 걸쳤고, 거울 앞에 섰고, 그리고 거울이 아니라 혜림을 봤다. 자기가 어떻게 보이는지가 아니라, 그녀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그 순간 혜림은 알았다. 이 사람은 보여지기 위해 태어난 종류의 인간이라는 걸.
그날 이후 서준은 소품을 가지러 오지 않는 날에도 왔다. 마감 시간에 맞춰서. 셔터가 반쯤 내려가고, 매장 안 조명만 남아 도로 쪽 쇼윈도가 어둠을 등지고 환해지는 그 시간에.
두 사람이 연인이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려운 건 그 다음이었다. 서준은 침대에서 자꾸 딴 데를 봤다. 천장을, 창문을, 커튼 틈으로 새어드는 가로등을. 혜림은 처음엔 그가 집중을 못 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야 그게 반대라는 걸 이해했다. 그는 두 사람만 있는 방을 견디지 못하는 게 아니라, 두 사람만 있다는 사실이 아까운 사람이었다. 이렇게 좋은 걸 아무도 안 본다는 게.
농담은 어느 밤 마감 후에 나왔다.
쇼윈도 마네킹의 팔이 헐거워져서 서준이 고쳐주겠다고 나섰던 날이었다. 그는 마네킹 옆에 서서 관절을 만지다가, 문득 같은 포즈로 굳어 보였다. 한 손을 허리에, 시선은 도로 쪽으로, 표정 없이.
"어때요, 나 마네킹 같아요?"
혜림은 웃었다. 그런데 웃음이 목 안에서 이상하게 멈췄다. 어두운 거리, 환한 유리, 그 안에 미동도 없이 선 남자. 만약 지금 누가 이 골목을 지나간다면. 그를 마네킹으로 볼까, 사람으로 볼까. 그리고 서준은 — 저 눈은, 지금 누가 봐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그녀가 말했다. 농담처럼 시작한 문장이 입 밖에 나오는 순간 더 이상 농담이 아니었다.
서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혜림이 다가가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 풀 때에도, 옷깃을 바로잡는 척 목덜미를 손끝으로 쓸 때에도. 그의 숨이 조금씩 빨라지는 게 손끝에 전해졌지만 몸은 정말 돌처럼 서 있었다. 유리창 밖은 텅 빈 거리였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서준의 관자놀이에 땀이 맺혔다.
"밖에 아무도 없어." 혜림이 낮게 말했다. "알지?"
"알아요."
"그런데 왜 이래?"
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만 유리 쪽으로, 아무도 없는 어둠 쪽으로 고정한 채 침을 삼켰다. 혜림은 그 순간 이해했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건 실제 관객이 아니었다. 관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저 어둠 어딘가에서 누군가 걸음을 멈추고 이 유리 안을 들여다볼지도 모른다는, 확인할 수 없는 가능성. 그게 실제 시선보다 강했다.
혜림은 매장 안쪽으로 물러나 팔짱을 꼈다. 감독처럼. 그리고 그를 봤다. 그가 그녀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온몸으로 알도록.
"오늘은 여기까지." 그녀가 말했다. "다음엔 내가 옷을 고를 거야."
서준이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뱉었다. 마네킹이 살아난 것처럼. 혜림은 셔터를 마저 내렸다. 철컹, 하고 세상이 닫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닫히는 소리가, 무언가 이제 막 열리는 소리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