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뒤에서만 할 수 있는 말
삼십 분은 길다. 묶여 있으면 더 길다. 아라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삼십 분은 다른 종류로 길었다.
준은 뒤에 앉아 있었다. 등이 닿지는 않았다. 삼십 센티쯤. 아라는 뒤에 있는 사람의 온도를 등으로 느낄 수 있는 거리였다. 준의 숨소리가 났다. 아라의 숨소리도 났다. 아랫줄이 갈비뼈를 잡고 있어서 아라의 숨은 느리고 낮았다.
그리고 몸이 시작했다.
아라는 그게 싫었다. 어깨가 뒤로 열리고, 팔이 등 뒤에 고정되고, 가슴 위아래로 두 줄이 감기면 몸이 아는 게 있었다. 이 자세는 안전하다. 이 자세에서 나는 뭘 해도 된다. 이 자세에서 뒤에 있는 사람은 나를 삼십 초마다 확인한다. 이 년 동안 그 몸에 그렇게 가르쳐놨다. 그러니까 지금 화가 났는데도 몸은 뒤에 있는 사람 쪽으로 기울어지려고 했다. 목이 늘어지려고 했다. 손끝이 따뜻해졌다. 아랫배가 무거워졌다.
"들어가지 마."
준이 말했다. 아라의 목이 늘어지는 걸 본 거였다.
"지금은 들어가면 안 돼. 이야기해야 돼."
"나도 알아. 몸이 알아서 하는 거야. 네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
"이 년 동안. 이 자세면 다 괜찮다고. 네가 그렇게 만들었어. 그러니까 지금 몸은 괜찮다고 하는데 나는 안 괜찮아. 그게 얼마나 이상한지 알아?"
"알아. 나도 지금 그래. 손은 다 괜찮다고 하는데."
아라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벽의 사진을 봤다. 작년 가을. 준이 찍은 아라의 등. 로프 자국이 남은 등. 그날 준은 자국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면서 이름을 붙여줬다. 이건 윗줄. 이건 아랫줄. 이건 기둥.
"너는 나한테 계속 시험을 내."
준의 목소리가 뒤에서 왔다. 아라의 뒤통수에.
"달력에 써놓고. 세 번 말해놓고. 그리고 그날 아침엔 아무 말도 안 해. 기억하나 안 하나. 잘 다녀와, 그러고. 나는 그날 아침에 네가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왜 이상한지 모르겠어서 그냥 나갔어. 그리고 두 시에 알람이 울리고 알았어. 아, 이거였구나. 그 이상한 게."
"시험 아니야."
"시험이야, 아라."
"한 번은—"
아라는 배로 숨을 쉬었다. 아랫줄이 허락하는 만큼.
"한 번은 네가 먼저 오길 바란 거야. 내가 끌어당기지 않아도. 내가 달력 가리키지 않아도. 그게 시험이야?"
"그게 시험이지."
"그럼 그래. 시험이야. 그래서? 그 시험이 그렇게 어려워? 옆에서 자는 사람이 두 주 동안 무서워하는 걸 알아채는 게?"
준이 대답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어려워. 나한테는 어려워. 넌 안 무서운 척을 너무 잘 하니까."
"……."
"두 주 동안 네가 뭘 했는지 말해줄까.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고, 커피를 두 잔씩 마셨고, 마감이라고 했고, 밤에 내 쪽으로 돌아누웠어. 그거야. 그게 무서운 사람인지 마감인 사람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로프는 알아. 로프는 네 손 색을 보면 알아. 숨소리 들으면 알아. 네가 노란불이라고 하면 알아. 밖에서 넌 노란불을 안 해. 그냥 갑자기 빨간불이야. 사흘 동안."
"문 닫은 건 너야."
"네가 먼저 나를 닫았어. 몸만이라고."
아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맞았다. 그 말이 맞는 게 싫었다.
"대기실에."
아라는 벽을 보면서 말했다.
"간호사가 보호자분은요, 그랬을 때. 없어요, 그러고 앉았는데. 옆에 여자가 있었어. 나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엄마랑 왔어. 엄마가 그 사람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울기 시작했어. 아직 결과도 안 나왔는데. 엄마가 손을 더 꽉 잡았어. 나는 그걸 보고 있었어. 그 사람은 결과 나오기 전에 울 사람이 있는데 나는 결과 나온 뒤에도 없구나. 그 생각을 했어. 그리고—"
숨이 막혔다. 아랫줄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너를 미워했어. 진료실 들어가기 전에. 그때 처음으로. 그냥 화난 게 아니고. 미워했어."
눈물이 났다. 아라는 손을 들어 닦으려고 했다. 손이 안 올라왔다. 로프가 손목을 잡고 있었다. 팔이 등 뒤에 있었다. 눈물이 턱까지 내려왔다.
"손 없어."
아라가 말했다.
"네가 해."
준의 손이 앞으로 돌아왔다. 아라의 어깨 너머로. 손가락이 뺨에 닿았다. 눈물을 닦았다. 한 번. 두 번. 턱 밑에 고인 걸 손등으로 받았다. 손이 뺨에 조금 더 머물렀다. 삼십 초쯤. 그러고 돌아갔다.
"나는."
준이 말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가까웠다. 준이 앞으로 당겨 앉은 거였다.
"밖에서는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진짜 모르겠어. 네가 뭘 원하는지, 내가 그걸 하고 있는지, 안 하고 있으면 뭘 안 하고 있는 건지. 로프는 알아. 로프는 규칙이 있어. 손 색이 바뀌면 풀어. 숨이 얕아지면 물어. 네가 노란불이면 천천히. 빨간불이면 다 풀어. 나 그거 다 할 수 있어. 눈 감고도 해. 그런데 밖에서는 규칙이 없어. 네가 아픈지 내가 어떻게 알아."
"물어보면 되잖아."
"물어보면 넌 됐어, 그러잖아."
"……."
"괜찮아, 아니야, 됐어. 그 세 개. 밖에서 네가 나한테 제일 많이 하는 말 세 개야. 로프에서는 네가 안 그러잖아. 로프에서는 네가 저려, 라고 하잖아. 아파, 라고 하잖아. 더, 라고 하잖아."
아라는 대답할 말을 찾았다. 없었다. 그 말이 맞았다. 로프에서 아라는 정직했다. 로프에서 아라는 몸이 말하는 걸 그대로 말했다. 그러라고 배웠고, 그러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밖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밖에서 아라는 됐어, 라고 했다. 그러고 상대가 알아채길 기다렸다.
"그럼 밖에서도 저려, 라고 하면."
아라가 말했다.
"그럼 넌 풀어줄 거야?"
"풀어줄 거야."
"진짜?"
"삼십 초 안에."
아라는 웃었다. 울면서 웃어서 콧물이 났다. 준이 다시 손을 앞으로 가져와서 닦았다. 이번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손이 아라의 뺨에서 목으로 내려갔고, 쇄골로, 윗줄 바로 위에 펼쳐졌다. 손바닥이 가슴뼈 위에 있었다. 리거가 숨을 확인하는 자리. 준은 거기 손을 두고 아라의 숨이 오르고 내리는 걸 느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아라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이번엔 막지 않았다. 등이 준의 가슴에 닿았다. 준이 받았다. 사흘 만이었다. 준의 셔츠 단추가 등에 닿는 게 느껴졌다. 준의 심장이 아라의 등 뒤에서 뛰었다. 빨랐다.
그리고 아라의 몸은 계속 하고 있었다. 아까 시작한 것을. 아랫배가 무겁고, 허벅지 안쪽이 뜨겁고, 레깅스 안이 젖어 있었다. 준의 손바닥이 가슴뼈 위에 있는데, 그 손이 십 센티만 내려오면 어떻게 될지 몸이 알았다. 몸이 그걸 원했다. 아라는 그게 창피했다. 아직 다 안 끝났는데. 아직 다 안 말했는데.
"나 지금 너 미워하는 중인데."
아라가 말했다.
"알아."
"그런데 왜 이래. 몸이."
"로프니까."
"그것 때문만은 아니잖아."
준이 한참 대답 안 했다.
"……아니지."
준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않았다. 가슴뼈 위에 그대로 있었다. 아라는 그 손이 얼마나 참고 있는지 손바닥의 열로 알았다.
"지금은 안 해."
준이 말했다.
"화난 채로는 안 해. 그것도 규칙이야."
"묶는 건 했잖아."
"묶는 건 네가 부탁했어. 이건 안 부탁했어."
"부탁하면?"
"……."
"부탁하면 할 거야?"
"아니."
준의 손이 아라의 가슴뼈에서 조금 더 힘을 줬다. 밀어내는 게 아니었다. 눌러서 잡는 거였다.
"아직 다 안 말했어. 너도 나도. 다 말하고 나서."
"다 말하는 게 언제야."
"몰라.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아라는 준의 가슴에 뒤통수를 기댔다. 천장을 봤다. 손끝이 조금 따끔거렸다. 저리기 전 단계. 아라는 그걸 알았고 말할지 말지 잠깐 생각했다. 예전이라면 안 했다.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났으니까. 됐어, 하고 넘겼다.
"손."
아라가 말했다.
"조금 저려. 손가락 끝."
준이 바로 일어났다. 아라를 앞으로 세우고 뒤로 갔다. 기둥에 감아둔 여분을 풀고, 마찰을 당기고, 아랫줄을 풀었다. 윗줄을 풀었다. 로프가 아라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소리. 스르륵. 손목의 싱글 컬럼은 마지막에 풀었다. 삼십 초도 안 걸렸다. 준의 손이 아라의 팔을 잡고 앞으로 가져왔다. 팔이 등 뒤에서 앞으로 오면서 어깨가 소리를 냈다. 준이 아라의 손목을 문질렀다. 팔뚝을. 위팔을. 피가 돌아오면서 손끝이 바늘처럼 따끔거렸다. 아라가 숨을 들이켰다.
"괜찮아?"
"응. 진짜 응."
준이 손목을 봤다. 두 바퀴 자국이 빨갛게 남아 있었다. 준이 손가락으로 그 자국 위를 눌렀다. 색이 돌아오는 걸 봤다.
"앞으로 다시 묶을게."
"응."
"손목만. 앞에서. 그리고 돌아 앉아. 이제 앞에서 해."
준이 로프를 다시 들었다. 아라는 손목을 앞으로 모아 내밀었다. 두 바퀴. 손가락 두 개. 매듭. 이번엔 남은 로프를 준이 자기 손에 쥐고 있었다. 리드처럼.
"돌아."
아라가 돌아앉았다. 준이 있었다.
사흘 만에 처음으로 준의 얼굴을 봤다. 안경을 안 써서 눈이 더 보였다. 준도 울고 있었다. 아라는 그걸 몰랐다. 등 뒤에 있어서.
"뒤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어."
준이 말했다.
"이제 앞에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