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쓰기
여섯 번째 주 수요일 오후, 연출 강 선생이 7장을 고쳤다.
"우체부가 마지막으로 오는 날. 편지는 없어. 그런데 이번엔 그냥 안 가. 정연 손을 잡아. 끌어당겨. 키스해. 그리고 가. 다시는 안 와."
지훈이 물었다. "이마요, 입이요?"
"입."
"길이는요?"
"관객이 불편해질 때까지. 그리고 두 박자 더."
무대 바닥에 새 형광 테이프가 붙었다. 무대 중앙에서 왼쪽으로 한 걸음, 지훈이 서야 하는 자리. 테이프 위에 매직으로 'JH'. 소희가 서는 자리는 원래 우체통 앞이었다. 지훈이 거기서 소희를 끌어당기면 두 사람은 정확히 'JH' 위에서 만나게 됐다.
리허설에서 세 번 했다. 첫 번째는 어색했고 두 번째는 기술이 됐고 세 번째는 연기가 됐다. 지훈의 입술은 마른 편이었고 담배 냄새가 났고, 소희는 그 냄새를 정연이 맡는 냄새로 바꿨다. 그게 배우가 하는 일이었다.
"남자친구 괜찮겠어?" 지훈이 물을 닦으면서 물었다. "매일 오는 그분."
"배우 남친이면 익숙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다. 그런데 소희는 오늘 현우에게 이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오후 리허설이 급하게 잡혔고, 문자를 보낼 시간이 있었는데 보내지 않았다. 왜 보내지 않았는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날 밤 7장에서 지훈이 소희의 손을 잡았다.
끌어당겼다. 'JH' 위에서 만났다. 지훈의 입술이 닿았고 소희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로 소희는 H열 12번의 어둠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감각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어둠에는 밀도가 있었고, 그 밀도가 바뀌었다. 관객이 불편해질 때까지, 그리고 두 박자 더. 소희는 그 두 박자를 셀 수 없었다.
지훈이 떠났다. 정연은 혼자 남았다. 마지막 장면. 소희는 우체통에 이마를 댔다.
"이제 그만 기다려도 된다고, 누가 나한테 말해줬으면 좋겠어."
목소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처음으로.
객석에 불이 들어왔을 때 H열 12번은 비어 있었다. 소희는 무대 인사를 하면서 그 자리를 봤다. 아흔아홉 명이 박수를 쳤고, 한 사람은 없었다.
현우는 로비에 있었다. 코트를 입고. 소희가 분장실에서 나올 때까지 벽에 기대 서 있었고, 소희가 나오자 열쇠를 대신 받아 로비 문을 잠갔다. 미란이 두 사람을 한 번 보고 아무 말 없이 계단을 올랐다.
"오늘은 집에 가자."
"현우."
"집에 가자."
택시를 타지 않았다. 대학로에서 혜화동까지 걸었다. 십오 분. 현우는 소희의 손을 잡지 않았고 소희도 잡지 않았다. 골목의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마다 소희는 그의 얼굴을 봤다.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그게 더 어려웠다. 뭔가를 삼키고 있는 얼굴.
집에 들어가서 소희는 코트를 벗지 않고 현우를 봤다.
"말해."
"뭘."
"7장. 말했어야 했어. 오후에 정해진 거야. 문자 보낼 시간 있었는데 안 보냈어. 미안해. 그런데 그건 연기야. 알잖아."
"알아."
"그럼."
현우는 소파에 앉았다. 소희는 서 있었다. 그 구도가 낯설었다. 그가 앉아 있고 소희가 서서 내려다보는 것. 무대와 객석이 뒤집힌 것 같았다.
"지훈 씨가 너한테 키스한 거. 그거 아니야." 현우가 말했다. "연기잖아. 네 입술에 다른 사람 입술이 닿는 거, 그건 배우가 하는 일이고, 나는 그거 알고 너를 만났어."
"그럼 뭐야."
"지훈 씨가 빛 안에 있었어."
소희는 말을 멈췼다.
"너랑 같이. 백 명이 봤어. 지훈 씨가 네 손을 잡고 끌어당기고, 네가 눈을 감고, 두 사람이 무대 한가운데 빛 안에 같이 서 있는 걸. 백 명이 그걸 봤어. 그 백 명은 내가 누군지 몰라. 나는 여덟 줄 뒤 어둠에 있는 사람이고, 지훈 씨는 너랑 같이 빛에 있는 사람이야."
"현우, 그건……."
"알아. 내가 골랐어. 뒷줄. 내가 고른 거야. 앞줄은 내 자리가 아니라고 내가 말했어.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어둠이 내가 고른 자리가 아니라 나한테 주어진 자리 같았어. 편지 쓰는 사람. 멀리서 보고, 가지 않고, 계속 보고 싶어서 가지 않는 사람. 그 편지 내가 좋아했어. 그게 나 같아서. 그런데 오늘 편지 쓴 사람이 마침내 정연을 만졌는데, 그 사람이 지훈 씨였어."
소희는 코트를 벗었다. 그의 옆에 앉지 않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이 자기 얼굴보다 조금 위에 있었다.
"무대 위에서 나는 지훈 눈을 안 봐."
"……."
"이마를 봐. 미간. 콧대. 그게 기술이야. 상대 배우 눈을 진짜로 보면 그건 연기가 아니라 진짜가 되니까. 아무도 모르게 삼 센티 위를 봐. 오늘 키스할 때도 그랬어. 눈 감기 전까지 지훈 미간을 봤어."
현우가 소희를 봤다.
"그런데 너는." 소희가 말했다. "너는 얼굴이 안 보여. 어둠이야. 그런데 나는 그 어둠을 볼 때 눈을 봐. 안 보이는 눈을.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백 명 앞에서 나는 아무 눈도 안 봐. 그게 내 기술이야. 그런데 너한테는 그 기술이 안 돼. 너는 내가 눈을 보는 유일한 사람이야."
현우는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소희의 뺨을 감쌌다.
"내일."
"응."
"내일 앙코르, 처음부터 커튼콜로 시작해."
"뭐?"
"내가 무대에 올라가는 걸로 시작해. 하고 싶은 게 있어."
"뭘."
"7장."
목요일 밤. 마지막 관객이 계단을 올라갔다. 문이 잠겼다. 알람이 맞춰졌다. 소희는 원피스 그대로 무대에 나갔고, 고스트라이트 아래 서서, H열 12번을 향해 첫마디를 했다.
"커튼콜."
현우가 내려왔다. 무대에 올라왔다. 소희는 그의 손을 잡고 'JH' 테이프 위에 세웠다.
"여기 서. 우체부 자리야. 대사 하나야. '정연 씨.' 그리고 내 손 잡고 끌어당겨."
"연기 못 해."
"잘하면 안 돼. 우체부는 연기 못 하는 사람이야. 삼 년 동안 편지 없이 온 사람이야."
소희는 우체통 앞으로 갔다. 이마를 대지 않고 등을 보이고 섰다. 그리고 기다렸다.
"……정연 씨."
너무 작았다. 소희는 웃음을 참았다. "다시."
"정연 씨."
돌아봤다. 현우가 'JH' 위에 서 있었다. 얼굴이 다 보였다. 소희는 그의 눈을 봤다. 미간이 아니라. 그가 손을 내밀었고 소희는 그 손을 잡았다. 그가 끌어당겼다. 힘이 지훈보다 셌다. 소희는 그의 가슴에 부딪혔고 그의 입술이 내려왔다.
관객이 불편해질 때까지, 그리고 두 박자 더.
두 박자가 지났는데 끝나지 않았다. 소희가 끝내지 않았다. 그의 아랫입술을 물었고 그의 셔츠를 잡았고 그를 'JH' 위에 무릎 꿇게 했다. 그리고 그 위에 눕혔다. 무대 한가운데, 형광 테이프 위에.
"규칙 일곱." 현우가 등을 대고 누운 채 말했다. "무대 위에선 내 말대로."
"커튼콜 전까지." 소희가 그의 위에 올라앉아 벨트를 풀었다. "커튼콜 다음엔 규칙 없어. 네가 무대에 올라온 순간부터 너도 배우야. 배우는 연출 말을 들어."
"연출이 너야?"
"오늘은."
소희는 그의 바지를 내렸다. 이미 서 있는 그를 손으로 한 번 훑었다. 그리고 자기 원피스는 벗지 않고, 아니, 벗지 않고 속옷만 옆으로 밀어내고, 원피스 자락을 걷어 올린 채 그의 위에 앉았다. 젖어 있었다. 7장 리허설을 하는 동안 내내. 끝까지 앉았을 때 현우의 손이 소희의 허벅지를 잡았다.
"객석 봐." 소희가 말했다. 이번엔 소희가 말했다.
현우가 고개를 돌려 텅 빈 백 개의 좌석을 봤다. 소희는 그 위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피스 자락이 두 사람 사이에서 구겨졌다. 단추 열두 개는 그대로 잠긴 채였다. 정연이 우체부 위에 앉아 있었다. 정연이 아니라 소희였다. 소희가 아니라 정연이었다.
"어제 백 명이 여기서 뭘 봤는지 알아?"
"……."
"지훈이 내 손 잡는 거. 끌어당기는 거. 키스하는 거. 여기서. 이 테이프 위에서." 소희는 허리를 내리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제 이 테이프 위에서 일어난 일은 이거야. 내 몸은 이제 이걸 기억해. 내일 7장 할 때 지훈이 여기 서면, 내 몸은 어제가 아니라 오늘을 기억할 거야. 그게 덧쓰기야."
현우가 일어나 앉았다. 소희를 안은 채. 그러자 두 사람은 마주 앉은 자세가 됐고, 소희의 다리가 그의 허리를 감았고, 그가 더 깊이 들어왔다. 소희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얼굴이 십 센티였다.
"눈." 현우가 말했다.
소희는 그의 눈을 봤다.
"미간 아니고."
"미간 아니고."
그가 아래에서 밀어 올렸다. 소희는 눈을 감으려다가 감지 않았다. 그의 눈 속에 고스트라이트가 두 개 작게 비쳤다. 그 두 개의 빛을 보면서 소희는 움직였다. 빠르게. 그가 소희의 등 뒤로 손을 넣어 단추 열두 개를 위에서부터 풀기 시작했다. 다 풀지 못했다. 여섯 개쯤에서 소희가 갔다. 그의 눈을 보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정연이 아닌 이름으로. 현우는 소희를 꽉 안고 그 안에서 같이 갔다. 형광 테이프가 그의 등 아래에서 구겨졌다.
한참 뒤, 소희는 무대 옆 무대감독 상자에서 형광 테이프를 꺼내 왔다. 극단 물건. 손바닥만큼 잘라 'JH' 옆에 붙였다. 매직으로 썼다. 'HW'.
"뭐 하는 거야."
"네 자리. 무대 위에도. 아무도 모르지만 내일부터 나는 7장에서 지훈 옆에 있는 이 테이프를 볼 거야. 그러면 지훈 미간을 안 봐도 돼."
현우는 무대 바닥의 두 개의 테이프를 봤다. 하나는 연출이 붙였고 하나는 배우가 붙였다.
"그래도 나는 H열에 있을 거야."
"알아. 거기도 네 자리야." 소희가 매직 뚜껑을 닫았다. "이제 두 개야. 어둠에 하나, 빛에 하나."
알람이 울리기 십 분 전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시간이 남은 채 옷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