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뒷줄, 열두 번째 자리
객석에 불이 꺼지는 순간, 소희는 세는 버릇이 있었다.
하나. 어둠이 앞줄을 먼저 삼킨다. 둘. 중간 줄에서 누군가 마지막으로 기침을 한다. 셋. 맨 뒷줄. 백 개의 객석 중 무대에서 가장 먼 H열, 그 열의 열두 번째 자리.
그 자리에는 언제나 현우가 있었다.
대학로 소극장 '뒷문'은 이름값을 했다. 좁은 골목 끝, 지하로 내려가는 열일곱 개의 계단 아래에 백 석짜리 객석과 가로 여덟 미터짜리 무대가 있었다. 소희가 여기서 연기를 시작한 지 다섯 해째였고, 그동안 이 무대 위에서 울고 죽고 사랑하고 미친 횟수는 셀 수 없었다. 백 명의 눈은 익숙했다. 백 명의 눈은 하나의 큰 짐승처럼 숨을 쉬었고, 그 짐승을 다루는 법을 소희는 알았다. 웃길 때 웃기고, 멈출 때 멈추고, 침묵을 세 박자 더 끌어서 짐승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게 만드는 법.
그런데 현우가 오기 시작한 뒤로, 짐승은 두 마리가 되었다.
아흔아홉 명의 짐승과, 한 사람.
「여름이 끝나는 방식」은 2인극이었다. 소희가 맡은 정연은 편지를 기다리는 여자였다. 오지 않는 편지, 오지 않을 편지, 그러나 우체통 앞에서 여름 내내 서 있는 여자. 상대역 지훈이 연기하는 우체부는 매일 빈손으로 왔고, 매일 정연은 그를 향해 웃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정연은 혼자 남아 우체통에 이마를 대고 말한다. "이제 그만 기다려도 된다고, 누가 나한테 말해줬으면 좋겠어. 그 사람이 아니어도 돼. 그냥, 누구든."
그 대사를 할 때 소희의 시선은 늘 객석 너머 어딘가, 조명이 닿지 않는 허공을 향했다. 연출의 지시였다. 정연은 아무도 보지 않는다. 정연은 기다림 그 자체를 본다.
하지만 소희는 알았다. 자기 눈이 허공이 아니라 H열 12번을 향해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어둠 속에서, 현우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이상한 일이었다. 아흔아홉 명 앞에서는 떨리지 않는 목소리가 그 한 사람을 의식하면 떨렸다. 아니, 떨리는 게 아니라 낮아졌다. 목소리가 몸 아래로 내려갔다. 가슴에서 나오던 소리가 배에서 나왔고, 배에서 나오던 소리가 그보다 더 아래에서 나왔다. 무대 위의 정연은 기다리는 여자인데 무대 위의 소희는 보여지는 여자였고, 어느 순간부터 소희는 그 두 개를 구분할 수 없었다.
현우는 번역가였다. 희곡을 번역했다. 집에서 일했고, 말이 적었고, 여덟 달 전 극장 뒷골목 술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가 첫 공연을 보러 왔던 날 소희는 그에게 앞줄 초대권을 줬다. 그는 그 표로 H열 12번에 앉았다. "앞줄은 배우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무대가 안 보여." 그가 말했다. "뒤에서는 다 보여. 너 전체가."
그 뒤로 매 공연이었다.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여덟 주 공연에 벌써 다섯 주. 소희는 세지 않으려 했지만 세고 있었다. 스물다섯 번.
스물다섯 번째 밤이었다.
무대 인사가 끝나고 객석에 불이 들어왔다. 아흔아홉 명이 짐승에서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 코트를 챙기고 계단을 올랐다. 지훈이 소희의 어깨를 두드렸다. "회식, 늘 가는 데. 먼저 갈게." 조명 오퍼레이터 미란이 부스에서 내려와 열쇠를 건넸다. "언니, 고스트라이트 켜놨어요. 열한 시 반까지 문 잠그면 돼요. 박 대표님 오늘 안 오신대요."
열쇠가 손바닥에서 차가웠다.
소희는 분장실에서 얼굴의 반만 지웠다. 정연의 창백한 입술을 닦고, 정연의 검은 눈매는 남겼다. 왜 그랬는지 자기도 몰랐다. 거울 속의 여자는 반은 소희고 반은 정연이었고, 그 여자가 다시 무대로 걸어 나갔을 때 객석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고스트라이트 하나. 무대 한가운데 세워 둔 스탠드에 매달린 알전구 하나가 텅 빈 객석을 향해 노란 빛을 던지고 있었다. 극장의 오래된 미신. 무대를 완전히 어둡게 두면 유령이 들어와 산다고 해서 밤새 켜 두는 불.
그 빛의 가장자리 너머에, H열 12번에, 현우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안 갔어?"
"앙코르."
현우의 목소리는 객석 뒤에서 무대까지 정확하게 도착했다. 낮고, 서두르지 않고, 농담이 아닌 목소리.
소희는 웃었다. "뭘. 나 지금 반쯤 지웠어."
"마지막 장면. 정연 혼자 남는 데서부터."
"현우."
"한 번만."
소희는 우체통 세트 앞으로 걸어갔다. 붉은 페인트가 벗겨진 합판 우체통. 아흔아홉 명 앞에서 스물다섯 번 이마를 댄 곳. 이마를 댔다. 합판은 차가웠고, 객석은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 기다려도 된다고, 누가 나한테 말해줬으면 좋겠어."
목소리가 몸 아래로 내려갔다.
"그 사람이 아니어도 돼. 그냥, 누구든."
허공을 보지 않았다. H열 12번을 봤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고스트라이트는 앞 두 줄까지만 닿았고, 그 너머는 검은 벨벳 같은 어둠이었다. 어둠이 소희를 보고 있었다. 어둠이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 어둠이 말했다. "이제 옷."
소희는 대꾸하지 않았다. 심장이 목까지 올라왔는데 그게 무서움인지 다른 것인지 분간할 시간을 자기에게 주지 않았다. 정연의 원피스는 등에 단추가 열두 개 달린 낡은 면 원피스였다. 소희는 손을 뒤로 돌려 하나씩 풀었다. 매일 밤 미란이 분장실에서 풀어주던 단추를 혼자 풀자니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어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두 번째 단추. 원피스가 어깨에서 미끄러져 팔꿈치에 걸렸고, 소희는 팔을 빼서 옷을 무대 바닥에 떨어뜨렸다. 속옷은 무대용 누드 톤이었다. 그것도 벗었다. 브래지어를, 그리고 팬티를. 발끝으로 밀어냈다.
고스트라이트 아래 알몸으로 서 있었다.
전구 하나가 이렇게 뜨거운 줄 몰랐다. 아니, 뜨거운 건 전구가 아니었다. 유두가 서 있었다. 극장 지하는 늘 서늘했고 소희는 그 탓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허벅지 안쪽으로 미끄러지는 감각까지 서늘함 탓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젖어 있었다. 손끝 하나 닿지 않았는데. 아흔아홉 명 앞에서 스물다섯 번 죽고 스물다섯 번 울면서도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텅 빈 객석의 어둠 하나가 자기를 이렇게 만들었다.
"돌아봐."
돌았다. 등을 보였다. 어둠이 등을, 허리를, 엉덩이를 훑는 게 느껴졌다. 시선은 손이 아닌데 손보다 무거웠다.
"다시."
다시 정면. 소희는 팔을 내리고 있었다. 가리지 않았다. 가리려는 손이 올라오려는 걸 힘으로 눌렀다. 이건 공연이었고 공연 중에 배우는 자기 몸을 가리지 않는다.
"다리."
소희는 발을 어깨너비로 벌렸다. 고스트라이트가 위에서 떨어지는 빛이라 사타구니 사이로 그림자가 졌지만, 젖은 것이 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것까지 숨겨주지는 않았다. 알고 있었다. 저 어둠 속에서 그가 그걸 보고 있다는 걸.
오래 침묵이 있었다. 소희는 열을 셌고, 스물을 셌고, 세는 걸 잊었다.
그리고 H열에서 의자가 삐걱하는 소리가 났다.
발소리가 객석 통로를 내려왔다. 어둠에서 빛으로. 현우가 고스트라이트 가장자리에 들어섰을 때 소희는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봤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입술이 조금 벌어져 있었고, 눈은 소희의 눈을 보다가 아래로 내려가다가 다시 눈으로 돌아왔다. 그는 무대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무대 턱 바로 아래, 객석 맨 앞줄 앞에 서서 무대 위의 소희를 올려다봤다. 소희의 발이 그의 가슴 높이에 있었다.
"이리 와. 앉아."
소희는 무대 끝에 앉았다. 다리가 객석 쪽으로 내려왔다. 현우가 그 다리 사이에 섰고, 손을 올려, 손 하나만, 오른손을, 소희의 허벅지 안쪽을 따라 올려서, 젖은 곳에 손가락 두 개를 댔다. 누르지 않았다. 대기만 했다.
"이거."
"……응."
"내가 봐서."
"응."
"백 명이 봤을 땐 안 이랬어?"
"안 이랬어."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클리토리스 위를 한 번, 아래를 한 번. 소희의 허리가 무대 바닥에서 들렸다. 현우는 손가락을 뺐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자기 입에 넣었다.
"집에 가자."
"뭐?"
"열한 시 반까지 문 잠그라고 했잖아. 여긴 우리 극장이 아니야." 현우는 무대 위에 떨어진 원피스를 주워 소희에게 건넸다. "오늘은 봤어. 그것만."
집까지 택시로 열두 분이었다. 택시 안에서 현우는 소희의 손을 잡았고,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게 더 나빴다. 소희는 원피스 아래 속옷을 입지 않은 채였고, 벗은 걸 다시 입을 시간이 없어서 가방에 쑤셔 넣었다, 시트에 닿는 허벅지 사이가 계속 미끄러웠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현우가 소희를 벽에 세웠다. 밀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소희의 쇄골을 눌러 벽에 붙이고 그대로 봤다. 현관 센서등이 두 사람 위에서 켜졌다.
"봤어." 현우가 말했다. "네가 단추 푸는 데 삼 분 걸리는 걸 봤고, 옷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고, 다리 벌리라고 했을 때 네 손이 올라오다가 멈추는 걸 봤어."
"……."
"거기가 반짝이는 걸 봤어. 여덟 줄 뒤에서."
소희는 그 말에 소리를 냈다. 말이 아닌 소리.
현우가 원피스를 벗기는 데는 삼 분이 걸리지 않았다. 단추 세 개를 풀고 나머지는 머리 위로 벗겨냈다. 침대까지 가지 못했다. 거실 바닥의 러그 위였다. 현우가 옷을 벗는 동안 소희는 누워서 그를 봤고, 그의 성기가 이미 딱딱하게 서서 배를 향해 있는 걸 봤다. 극장에서부터, 어둠 속에서부터 그랬을 것이다. 여덟 줄 뒤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동안.
"위로 와."
소희는 그의 위에 올라앉았다. 손으로 그를 잡고, 자기 입구에 맞추고, 천천히 앉았다. 젖어 있어서 저항이 없었다. 끝까지 앉았을 때 두 사람 다 숨을 참았다.
"움직이지 말고." 현우가 말했다. "손."
"뭐?"
"무대에서 못 시킨 거. 지금 해. 네 손으로."
소희는 그를 안에 넣은 채 자기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가 들어와 있어서 부풀어 오른 클리토리스에 손가락을 댔다. 현우는 두 손을 소희의 허벅지에 얹고 움직이지 않았다. 보기만 했다. 고스트라이트가 아니라 거실 천장 등이었지만 소희는 그 시선을 알아봤다. 여덟 줄 뒤의 시선. 그 시선이 지금은 삼십 센티미터 앞에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원을 그렸다. 그를 안에 넣은 채 자기를 만지는 건 처음이었고, 그가 보고 있다는 사실이 손가락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안쪽이 그를 조이는 게 느껴졌다. 현우가 이를 물었다.
"소희."
"보고 있어?"
"보고 있어."
"계속 봐."
허리가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아래로, 짧게.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현우의 손이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소희는 눈을 감으려다가, 감지 않았다. 그를 봤다. 그가 보는 걸 봤다. 무대 위의 자기를 봤던 그 눈을, 지금 자기 안에서 딱딱하게 뛰고 있는 그를, 그 얼굴에서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먼저 간 건 소희였다. 손가락 아래에서 시작해서 그를 조이는 안쪽으로 번졌고, 허리가 꺾였고, 목에서 무대에서는 절대 내지 않을 소리가 나왔다. 현우는 그 소리에 자기를 놓았다. 소희의 허벅지를 잡아당겨 자기 위로 끝까지 내리누르면서, 안에서, 뜨겁게, 여러 번.
한참 뒤에 소희가 그의 가슴 위에 엎드렸다. 땀. 러그의 섬유. 그의 심장.
"다음 주 수요일." 현우가 천장을 보며 말했다.
"H열 12번?"
"응."
"그럼 그다음엔?"
현우가 소희의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다음엔 규칙을 정하자. 무대는 네 거니까. 나는 보는 사람이니까. 보는 사람이 어디까지 볼 수 있는지, 네가 정해."
소희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웃었다. 정연의 검은 눈매가 그의 피부에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