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목소리
세 번째 주가 되자 두 사람은 앙코르가 끝까지 가지 않는 밤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떤 밤 현우는 H열 12번에서 소희가 옷을 벗는 것까지만 보고 "집에 가자"고 말했다. 어떤 밤은 소파에 앉으라고만 했다. 어떤 밤은 손을 내리라고 했고, 소희가 가기 직전에 멈추라고 했고, 그대로 옷을 입혔다. 소희는 그런 밤에 택시 안에서 그의 허벅지를 꼬집었고 집에 가서 그를 침대에 눕히고 위에서 자기 마음대로 했다. 무대 위에선 그의 말대로. 무대 아래에선 아니었다. 그것도 규칙에 없는 규칙이었다.
그래도 매일 밤, 그는 H열 12번에 있었다.
그날 소희가 무대로 나갔을 때, H열 12번은 비어 있었다.
고스트라이트 아래 서서 객석을 봤다. 앞 두 줄은 노란 빛에 잠겨 있고 그 뒤는 어둠.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의자가 삐걱하지 않았다. 숨소리가 없었다.
"현우?"
"여기."
목소리가 위에서 왔다.
천장에서. 아니,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무대 양쪽 벽 위에 걸린 검은 스피커 두 개가 동시에 그의 목소리를 냈고, 그 목소리는 극장 전체를 채웠다. 객석 뒤 벽, 무대 위 조명 배튼 사이, 소희의 발밑 바닥까지.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는 목소리. 어디에나 있는 목소리.
"부스야."
소희는 고개를 들었다. 객석 뒤쪽 위, 벽에 난 작은 유리창. 조명과 음향 콘솔이 있는 부스. 미란이 매일 밤 큐를 치는 곳. 그 유리창은 안에서는 무대가 훤히 보이지만 밖에서는 검은 거울처럼 보였다.
"거기 어떻게 들어갔어?"
"미란 씨가 지난주에 보여줬어. 극장 구조를 알아야 한다고 했어. 번역하는 희곡에 부스 장면이 있어서."
"거짓말."
"반은 진짜야."
소희는 유리창을 봤다. 자기 모습이 비쳤을 뿐이었다. 원피스를 입은 정연이 고스트라이트 아래 서서 위를 올려다보는 모습.
"그거 갓 마이크지."
"연출용 인터컴. 미란 씨가 그렇게 불렀어. 신의 목소리."
"미란이 너한테 그것까지 가르쳐줬어?"
"버튼이 하나야. 어렵지 않았어."
소희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여덟 줄 뒤의 어둠은 얼굴이 없어도 방향이 있었다. H열 12번. 소희는 거기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목소리는 방향이 없었다. 볼 곳이 없었다. 어디를 보든 그는 거기 있었고, 어디를 보든 그는 거기 없었다.
"오늘은 조명도 내가 할 거야."
"극장 물건은 안 된다고 했잖아."
"몸 대는 건 안 된다고 했지. 켜는 건."
"현우."
"하우스 라이트?"
소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심장은 빨랐지만 그건 두려움이 아니었고, 두려움이라 해도 자기가 원하는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아니."
고스트라이트가 꺼졌다.
완전한 어둠. 극장은 지하였고 비상등은 로비 쪽에만 있었다. 소희는 자기 손도 보지 못했다. 발밑의 바닥도. 어둠이 피부에 닿았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자기 숨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돌아왔다. 아니, 그건 그의 숨소리였다. 마이크 가까이에서.
빛이 켜졌다.
하나. 위에서 곧게 떨어지는, 지름 일 미터쯤 되는 흰 원. 무대 정중앙. 소희가 서 있는 곳에서 두 걸음 앞.
"거기로."
소희는 걸어가 빛 안에 섰다. 발끝까지 빛이 들어왔고 그 바깥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객석도, 우체통도, 소파도. 세상에 이 원 하나만 있었다.
"이제 네가 보이는 건 여기뿐이야. 여기서 나가면 나는 너를 못 봐."
"……."
"잘라낸 장면 있잖아. 연출이 뺐다는 거. 정연이 편지 받는 장면."
소희는 놀랐다. 그 장면은 대본 초고에만 있었다. 리딩 때 한 번 읽고 잘렸다. 정연이 상상 속에서 편지를 받는 장면. 우체부가 편지를 건네고, 정연이 뜯어 읽고, 그 편지가 연애편지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혼자 웃다가 우는 장면. 연출은 너무 직접적이라고 했다. 관객이 정연이 기다리는 게 뭔지 알면 안 된다고.
"그거 어떻게 알아."
"네 방 책상 위에 초고 있었어. 세 번 읽었어."
"……."
"해봐. 편지는 없으니까 손으로."
소희는 빛 안에서 편지를 받았다. 없는 우체부의 없는 손에서 없는 봉투를. 뜯었다. 읽었다. 초고의 편지 내용을 소희는 기억했다. 잘린 대사는 배우 머릿속에서 제일 오래 남는다.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정연에게 온 편지. 당신을 매일 밤 생각한다고, 당신이 우체통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멀리서 봤다고,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당신에게 가지 못하는 자기가 미웠다고, 그런데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싶어서 가지 않았다고.
읽다가 소희는 이 편지가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알았다.
목소리가 떨렸다. 정연의 떨림이었다가 소희의 떨림이 되었다.
"정연은 그 편지 읽고 뭘 했을 것 같아. 혼자. 밤에."
소희는 편지 아닌 손을 내려다봤다.
"……옷을 벗었을 거야."
"그리고."
"누웠을 거야. 바닥에."
"그리고."
"편지 쓴 사람을 생각했을 거야. 어디서 보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이 지금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해."
소희는 빛 안에서 옷을 벗었다. 원피스를, 속옷을. 벗은 것들을 빛의 원 밖으로 던졌다. 어둠이 삼켰다. 그리고 소희는 무대 바닥에 누웠다. 검은 무대 바닥은 차가웠고 위에서 떨어지는 빛은 뜨거웠고, 소희의 몸이 그 둘 사이에 있었다.
빛이 움직였다.
원이 조금 좁아졌다. 소희의 어깨에서 무릎까지. 얼굴이 빛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소희는 자기 몸만 보였다. 얼굴 없는 몸. 가슴, 배, 벌어지기 시작하는 허벅지.
"다리 세워. 무릎 벌리고. 발은 바닥에."
했다. 그러자 자기 다리 사이가 빛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거기가 제일 밝아."
"……알아."
"만져."
만졌다. 이번엔 말하라고 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소희의 소리를 대신 들었다. 손가락이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소희의 숨이, 그리고 소희가 손가락을 안에 넣었을 때 젖은 것이 내는 작은 소리가, 텅 빈 극장에서는 들렸다. 스피커에서 그의 숨소리가 그것에 맞춰 무거워지는 게 들렸다.
"두 개."
두 개를 넣었다.
"천장 봐. 빛 나오는 데."
소희는 눈을 떠 조명기를 봤다. 눈이 부셨다. 그 빛 너머 어디에 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부스의 유리창은 어둠 속에 있었다. 소희는 조명기를 봤다. 조명기가 그의 눈이었다.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났고 눈물이 났는데도 감지 않았다.
"소희."
"응."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지 말해줄게."
소희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무대 한가운데에 흰 원이 있고 그 안에 여자가 누워 있어. 얼굴은 안 보여. 목부터 무릎까지만. 가슴이 숨 쉴 때마다 올라오고 유두가 딱딱하게 서 있어. 배가 떨려. 다리가 벌어져 있고 그 사이에 손이 있어. 손가락 두 개가 안에 들어가 있고 손바닥이 위를 누르고 있어. 거기가 젖어서 빛을 받아 반짝여. 손가락이 나올 때마다 실처럼 뭐가 따라 나와. 이 부스 유리창은 무대에서 십오 미터야. 그런데 다 보여. 다."
소희는 갔다.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갓 마이크의 목소리가 자기 몸을 하나하나 읊는 동안, 그 목소리가 자기 안에 있는 손가락보다 더 깊이 들어와서, 소희는 무대 바닥에서 허리를 꺾고 눈물이 흐르는 눈을 뜬 채로 조명기를 보면서 갔다. 소리가 극장을 채웠다. 그의 목소리가 채웠던 만큼.
한참 뒤. 빛의 원이 다시 넓어져 소희의 얼굴을 덮었다.
"……커튼콜."
목소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불이 켜졌다. 전부. 무대 위 배튼에 걸린 조명기 스무 개가 한꺼번에. 워시, 사이드, 백라이트. 공연 중에는 한 번도 동시에 켜지지 않는 것들. 무대가 낮처럼 밝았다. 우체통, 소파, 병풍, 무대 바닥의 긁힌 자국, 그리고 그 한가운데 알몸으로 누워 있는 소희의 모든 것.
부스 문이 열리는 소리. 계단. 객석 통로.
현우가 무대 위로 올라왔을 때 소희는 아직 누워 있었다. 그는 소희를 내려다봤다. 이번엔 그의 얼굴이 다 보였다. 붉어진 얼굴. 젖은 입술. 그가 무릎을 꿇고 소희를 일으켜 무대 끝으로 데려갔다. 앉혔다. 소희의 다리를 객석 쪽으로. 자기는 무대 아래, 객석 맨 앞에 서서. 그의 얼굴이 소희의 얼굴과 같은 높이에 왔다.
그가 벨트를 풀었다.
"이번엔 다 켜고." 그가 말했다. "네가 다 보이게. 나도 다 보이게."
소희는 무대 끝에 앉아 다리를 벌렸고, 현우는 소희의 허벅지를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들어갔다. 무대 턱 높이가 정확했다. 소희는 뒤로 손을 짚었고 현우는 앞에서 밀었다. 스무 개의 조명 아래에서. 소희는 그의 얼굴을 봤다. 자기 안에 들어올 때 그의 눈썹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를 어떻게 무는지, 자기를 볼 때 눈이 어디로 가는지. 가슴, 연결된 곳, 다시 눈. 다 보였다. 그가 십오 미터 뒤에서 자기를 봤던 것처럼 소희는 삼십 센티 앞에서 그를 봤다. 보는 사람을 봤다.
"네 얼굴." 소희가 말했다. 목소리가 뚝뚝 끊어졌다. "네 얼굴 이렇구나. 볼 때."
"어떤데."
"……무서워. 좋아서."
현우가 소희의 허리를 잡아 세게 당겼다. 무대 턱에 그의 허벅지가 부딪혔다. 소희는 그의 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날 두 번째로 갔다. 이번엔 그의 눈을 보면서. 현우는 소희의 안에서 조이는 걸 견디지 못하고 소희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안에서 쏟았다. 조명 스무 개가 그 둘을 비췼다. 감출 그림자가 없었다.
한참 뒤, 현우가 부스로 다시 올라가 조명을 하나씩 내렸다. 워시, 사이드, 백라이트. 마지막에 고스트라이트 하나만 남았다. 소희는 그 아래 원피스를 입고 앉아 있었다.
현우가 무대 앞으로 돌아왔다.
"어디 있는지 몰라서." 소희가 말했다.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어디에나 있는 것 같았어. 그게 제일 무서웠고, 그게 제일……."
"응."
"미란이 알면 어떡해."
"미란 씨는 내가 번역가라고만 알아."
"극장 부스에서 갓 마이크 잡는 번역가."
"희곡 번역가."
소희는 웃었다. 그리고 웃음 끝에 조금 남은 것이 있었다. 미란은 눈치가 빨랐다. 박 대표는 열한 시 반에 가끔 왔다. 부스는 원래 잠겨 있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날 밤, 열일곱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소희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고스트라이트가 텅 빈 무대를 비추고 있었다. 유령을 위해서. 아니면, 무대가 낮처럼 밝았던 몇 분을 잊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