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의 규칙
극장이 쉬는 화요일 오후, 대학로 뒷골목의 낡은 다방에서 두 사람은 규칙을 정했다.
메뉴판 뒷면에. 현우가 볼펜을 꺼냈고, 소희가 다방 주인에게 미안한 얼굴로 웃었고, 주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학로에서 배우들이 메뉴판에 뭘 쓰는 건 흔한 일이었다. 대사, 큐, 동선. 이번엔 다른 것이었지만 겉으로는 구분되지 않았다.
"먼저 네가 말해." 현우가 볼펜을 소희 쪽으로 밀었다.
"내가 왜."
"무대는 네 거니까."
소희는 볼펜을 받아 들고 한동안 커피만 마셨다. 지난 수요일 밤 이후로 두 사람은 그 일에 대해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목요일 공연, 금요일 공연, 주말 공연. 매번 H열 12번에 그가 있었고, 매번 마지막 대사에서 소희의 목소리는 몸 아래로 내려갔고, 매번 공연이 끝나면 그는 로비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집으로 갔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하는 게 아무 일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
"하나." 소희가 썼다. "마지막 관객이 열일곱 번째 계단을 올라간 다음. 내가 로비 문을 안에서 잠근 다음. 그 전엔 아무것도 없어."
"둘. 열한 시 이십 분에 내 폰 알람. 울리면 끝. 어떤 상태든."
"어떤 상태든?" 현우가 물었다.
"어떤 상태든. 박 대표님이 열한 시 반에 온 적이 두 번 있어."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셋. 극장 물건은 안 돼. 피아노, 조명기, 고스트라이트 스탠드. 우리 극단 거는 돼. 소파, 우체통, 의자, 병풍."
"소파가 극단 거야?"
"내가 을지로에서 사 왔어. 삼만 원."
"넷. 자국." 소희는 여기서 잠깐 볼펜을 멈췄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지만 계속 썼다. "정연 원피스는 쇄골이 보여. 팔도. 무릎 아래도. 거긴 안 돼."
"거기 말고는."
"거기 말고는."
현우의 눈이 다방의 흐린 조명 아래에서 조금 어두워졌다. 소희는 그걸 보고 다섯 번째를 썼다.
"다섯. 너는 무대에 안 올라와. 내가 '커튼콜'이라고 말하기 전까진. 그 말 안 하면 너는 끝까지 보는 사람이야."
"……좋아."
"여섯. 멈추는 말. '하우스 라이트.' 그 말 나오면 뭐든 끝. 공연이 끝나면 하우스 라이트가 들어오잖아. 그거랑 같아. 묻지도 말고, 설명도 안 해. 그냥 끝."
현우는 메뉴판을 자기 쪽으로 돌려 여섯 줄을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볼펜을 받아 일곱 번째 줄을 썼다.
"일곱. 무대 위에서는, 내가 말하는 대로."
소희는 그 글자를 봤다.
"커튼콜 전까지." 현우가 덧붙였다. "네가 나를 올라오게 하기 전까지는, 너는 무대 위에 있고 나는 객석에 있어. 그 사이엔 내 말만 있어. 무슨 말을 할지는 나도 모르겠어. 그때 보고 알 거야. 그 말을 네가 따라. 하우스 라이트가 아니면."
"내가 배우라서?"
"네가 배우라서. 그리고 내가 보는 사람이라서." 현우가 잠깐 웃었다. "봤잖아. 나 원래 뒷줄에 앉는 사람이야. 앞줄은 내 자리가 아니야. 그런데 너는 내가 뒷줄에 있으면 목소리가 바뀌어. 나는 그걸 그 자리에서 계속 듣고 싶어. 그거 하나야."
소희는 메뉴판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수요일에 봐."
수요일. 마지막 관객이 열일곱 번째 계단을 올라갔다. 미란이 열쇠를 넘기고 올라갔다. 지훈이 회식 장소를 문자로 보내고 올라갔다. 소희는 로비로 나가 철문을 안에서 잠갔다. 잠기는 소리가 지하 복도에 길게 울렸다.
폰 알람을 열한 시 이십 분에 맞췼다. 열 시 사 분이었다.
분장실에서 이번엔 얼굴을 지우지 않았다. 정연 그대로. 원피스 그대로. 신발만 벗었다.
무대로 나갔을 때 고스트라이트가 켜져 있었고, H열 12번에 어둠이 앉아 있었다.
"어디부터?" 소희가 물었다.
"2장. 정연이 자기 전에 옷 갈아입는 장면."
"그건 병풍 뒤에서 하는데."
"병풍은 극단 거야?"
"……응."
"치워."
소희는 병풍을 접어 무대 옆으로 세웠다. 병풍이 서 있던 자리, 아흔아홉 명이 실루엣만 봤던 자리에 그대로 섰다. 2장의 정연은 우체부가 다녀간 뒤 혼자 흥얼거리며 원피스를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그 장면의 노래를 소희는 불렀다. 정연의 노래. 음정이 조금 나간 자장가 같은 것. 부르면서 등 뒤로 손을 돌려 단추를 풀었다.
이번엔 삼 분이 걸리지 않았다. 몸이 기억했다.
원피스가 떨어졌다. 정연은 그다음에 잠옷을 입어야 했지만 잠옷은 병풍 뒤에 두고 왔고, 어둠은 그걸 가지러 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소희는 속옷 차림으로 노래를 마쳤다. 마지막 음이 무대 위 공기에 남았다.
"속옷도."
벗었다.
"소파."
소파는 우체통 옆에 있었다. 을지로에서 삼만 원. 정연이 편지를 기다리며 앉아 있던 곳. 소희는 그 소파에 앉았다. 객석을 향해. 알몸으로. 고스트라이트가 소파까지는 충분히 닿아서 소희는 자기 허벅지 위의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볼 수 있었다.
"다리."
벌렸다. 소파 위에서 한쪽 발을 쿠션 위로 올렸다. 그러자 완전히 열렸다. 지하의 서늘한 공기가 거기에 닿았다. 젖어 있는 곳에 공기가 닿는 감각은 손이 닿는 것과 달랐다. 더 정확했다. 자기가 얼마나 열려 있는지를 공기가 알려줬다.
"손."
소희는 손을 내렸다.
"아니. 먼저 보여줘. 손가락으로 벌려서."
숨이 멎었다가 다시 시작됐다. 소희는 두 손을 내려 손가락으로 자기를 벌렸다. 안쪽이 빛을 받았다. 여덟 줄 뒤에서 그게 보일까. 보일 것이다. 지난주에 그는 반짝이는 걸 봤다고 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열려 있고 더 젖어 있고, 그리고 소희는 자기 손으로 그걸 벌려서 보여주고 있었다.
"H열 12번 봐. 딴 데 보지 말고."
봤다. 어둠. 얼굴이 없는 어둠. 그 어둠이 자기의 가장 안쪽을 보고 있었다.
"이제 만져. 천천히. 그리고 말로 해. 뭐가 느껴지는지."
손가락 하나가 클리토리스에 닿았다. "……뜨거워." 원을 그렸다. "손가락이 미끄러워. 내 거 때문에." 아래로 내려 입구를 따라 훑었다. "여기가…… 열려 있어. 계속 열리려고 해." 손가락 하나를 안에 넣었다. "안이…… 조여. 내 손가락을. 근데 손가락은 부족해."
"뭐가 부족해."
"너."
"아직."
소희는 신음을 냈다. 손가락을 넣은 채 다른 손으로 클리토리스를 문질렀다. 허리가 소파 위에서 들렸다. 눈은 H열 12번에서 떼지 않았다. 떼면 안 됐다. 그가 말했으니까. 그의 말대로.
"멈춰."
멈췄다. 손가락이 안에 있는 채로. 온몸이 그 손가락 하나에 매달려 떨렸다.
"지금 가고 싶어?"
"응."
"내가 보는 앞에서? 여덟 줄 뒤에서, 얼굴도 안 보이는데?"
"응. 제발."
"그럼 가. 그런데 눈 감지 마."
소희는 손가락을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빠르게. 감지 않았다. 어둠을 봤다. 어둠을 보면서, 어둠이 자기를 보는 걸 보면서, 그 시선이 자기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소파 위에서 무릎이 안으로 오다가 다시 벌어지고, 목이 뒤로 꺾이고, 눈은 뜨고, 갔다. 텅 빈 객석을 향해 소리를 내면서. 백 개의 빈자리가 그 소리를 받아냈다.
한참 동안 소파 위에서 숨만 쉬었다.
"……커튼콜."
의자가 삐걱했다. 발소리가 통로를 내려왔다. 이번엔 현우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소파 앞에 무릎을 꿇고 소희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얼굴을 넣었다. 혀가 방금 손가락이 있던 곳을 훑었다. 소희는 비명을 삼켰다. 아직 예민한 곳을 혀가 넓게, 천천히 핥았다. 그는 맛을 보고 있었다. 여덟 줄 뒤에서 본 것을.
"돌아." 현우가 얼굴을 들고 말했다. 입술이 젖어 있었다. "등받이 잡고. 객석 보고."
소희는 소파 위에서 몸을 돌려 무릎을 세우고 등받이를 잡았다. 그러자 등이 그를 향하고 얼굴이 텅 빈 백 개의 좌석을 향했다. 뒤에서 옷 벗는 소리. 벨트. 지퍼. 그리고 그의 손이 소희의 허리를 잡고, 성기의 끝이 입구에 닿았다.
"봐. 객석."
봤다.
그가 들어왔다. 한 번에, 끝까지. 소희는 소파 등받이를 움켜잡았고 목에서 소리가 튀어나와 객석으로 날아갔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잠깐 있었다. 소희의 안이 그를 조이며 적응하는 시간. 그리고 빼서, 다시 넣고, 빼서, 다시 넣고. 느리게 시작해서 빠르게. 소파가 무대 바닥을 긁었다. 을지로 삼만 원짜리 소파가.
"A열." 현우가 소희의 귀에 말했다. "B열. C열. 다 봐. 네가 매일 밤 보는 자리들. 거기 사람들이 있었으면. 지금 이거."
"……하지 마."
"뭘."
"그 말. 하지 마. 갈 것 같아."
"가."
그가 손을 앞으로 돌려 클리토리스를 눌렀다. 뒤에서 밀어 넣으면서. 소희는 A열을 보면서 두 번째로 갔고, 이번엔 소리를 삼키지 못했다. 그 소리에 현우가 소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끝까지 박고 멈췄다. 안에서 뛰는 게 느껴졌다. 뜨거운 게 안에서 퍼지는 게. 그의 이마가 소희의 등에 닿았다.
그리고 알람이 울렸다.
열한 시 이십 분. 소희의 가방 속에서. 무대 옆 병풍 뒤에서.
두 사람은 소파 위에서 얽힌 채로 웃기 시작했다. 현우가 아직 안에 있는 채로. 소희의 허벅지 사이로 그의 것이 흘러내리는 채로.
"어떤 상태든." 현우가 말했다.
"어떤 상태든." 소희가 말했다.
옷을 입는 데는 팔 분이 걸렸다. 병풍을 원래 자리에 세우고, 소파를 밀어 원래 위치에 맞추고, 소희가 소파 시트에 남은 얼룩을 분장실 물티슈로 닦았다. 현우는 무대 아래에서 그걸 보고 있었다. 무대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커튼콜은 끝났으니까.
"소희."
"응."
"'커튼콜'. 내가 정확히 그 말을 원했던 순간에 했어."
소희는 물티슈를 접었다.
"네가 원하는 순간을 아는 거. 그게 배우야."
고스트라이트를 그대로 두고, 두 사람은 열일곱 개의 계단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