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펜, 파란 펜

토요일 오후, 연우는 센터 창고에서 버릴 물건을 정리하다가 코팅이 벗겨진 근육 해부도 두 장을 발견했다. 전면과 후면. 대기실 벽에 오 년쯤 붙어 있다가 새 포스터에 밀려 창고로 온 것들이었다. 왼쪽 위 모서리가 노랗게 변색됐고 비복근 근처에 누가 볼펜으로 낙서를 해 놨지만, 근육 이름은 다 읽을 수 있었다.

연우는 그걸 둘둘 말아 겨드랑이에 끼고 퇴근했다. 오는 길에 다이소에서 유성펜 세 개를 샀다. 빨강, 노랑, 파랑.

"지도 그리자."

성재는 식탁 위에 펼쳐진 두 장의 벌거벗은 사람을 내려다봤다. 근육이 다 드러난, 피부가 없는 사람. 연우가 컵을 네 귀퉁이에 올려 종이를 눌렀다.

"이게 뭐야."

"너."

"난 이것보단 살이 좀 있는데."

"살은 상관없어. 누르는 건 이 밑이니까."

연우가 펜 세 개를 나란히 놓았다.

"빨강은 절대 안 되는 데. 노랑은 조심. 파랑은—"

"마음껏."

"내가 판단하는 만큼."

"그게 그 말이야."

"아니야."

와인은 한 잔까지였다. 연우가 정했다. 펜 잡기 전엔 한 잔, 그 뒤로는 물. 성재가 뭐 이런 걸 다 정하냐고 하자 연우는 손님 시술 동의서 받을 때 술 마시고 받는 거 봤냐고 했다. 성재는 봤을 리가 없었다.

빨강부터였다. 연우가 펜을 들었다.

"목 앞. 경동맥, 기도. 논의 안 해."

"논의 안 하는데 왜 말해."

"네가 알아야 되니까."

연우는 흉쇄유돌근 안쪽으로 굵은 빨간 선을 그렸다. 그다음 척추 정중선. 극돌기 위를 직접 치는 건 안 된다. 뼈 위에 근육이 없다. 무릎 뒤 슬와. 신경과 혈관이 얕게 지나간다. 그다음 연우의 펜이 등 아래쪽, 열두 번째 갈비뼈 밑에 멈췄다.

"여기. 요방형근."

"그건 근육 아니야?"

"근육이야. 그런데 바로 밑에 신장이 있어. 세게 치면 소변에 피가 나. 노랑도 아니고 빨강."

성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그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참았다. 그는 지금 굉장히 진지했다. 시험 범위를 듣는 사람 같았다.

"얼굴."

"얼굴은 왜."

"빨강. 내가 안 해."

"내 얼굴이잖아."

"내가 누르는 손이잖아."

성재는 그 말에 뭔가 대꾸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연우는 얼굴 전체에 빨간 빗금을 쳤다. 그리는 손이 자기도 모르게 조금 빨랐다는 걸 연우는 알았다. 성재도 알았을 것이다. 둘 다 말하지 않았다.

노랑은 협상이었다.

"갈비뼈 위."

"거긴 왜."

"갈비뼈는 금 가는 소리가 안 예뻐. 손바닥은 되는데 팔꿈치는 안 돼. 노랑."

"복부."

"노랑. 복직근은 두껍지만 그 밑은 전부 장기야. 다섯까지."

"다섯이 뭐야."

"이따 설명해. 발바닥."

"발바닥은 안 아파. 간지러워."

"간지러움은 통증이 아니야. 근육 이름도 없어. 노랑."

"근육 이름 없는 데는 다 노랑이야?"

연우는 잠깐 생각했다.

"이름 없는 데는 지도에 없는 거야. 지도에 없는 건 안 해."

성재가 손을 뻗어 전면 해부도의 사타구니, 근육이 끊어지고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자리를 가리켰다. 해부도는 점잖았다. 그 부위에는 그냥 빈 곳이 있었다.

"여긴 지도에 없는데."

"고환은 알아서 정해. 네 거니까."

"...빨강. 아직은."

"아직은."

연우는 빈 자리 아래쪽에 작은 빨간 점을 찍었다. 성재는 파란 펜을 집어 들고, 그 위에, 해부도에는 원래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꽤 사실적인 크기로 그려 넣었다. 그리고 파랗게 칠했다.

"이건 지도에 있어야 되니까."

"그건 근육이 아니야."

"근육은 아닌데 굳긴 하잖아."

연우는 펜을 내려놓고 오 초쯤 웃었다. 성재가 그녀가 그렇게 웃는 걸 보는 건 한 달에 한 번쯤이었다. 그는 그걸 세고 있었다.

파랑은 빨랐다. 연우가 그리고 성재가 보기만 했다.

"대둔근. 인체에서 가장 두꺼운 근육. 여기가 파랑의 수도야."

"수도."

"햄스트링 세 개. 대퇴이두근, 반건양근, 반막양근. 다 파랑. 대퇴사두근 파랑. 광배근 파랑. 승모근 상부, 중부 파랑. 하부는 노랑, 갈비뼈 얇아지니까. 비복근 파랑."

"종아리? 종아리가 아파?"

"종아리를 제대로 눌린 적이 없구나."

성재는 그 말에 뭔가 기대하는 표정이 됐다. 연우는 못 본 척했다.

그다음은 글자였다. 연우가 후면 해부도의 오른쪽 여백에 파란 펜으로 썼다.

승모근 = 정지. 손 뗌.

광배근 = 천천히. 강도 내림.

숫자 = 0~10. 파랑은 8까지. 노랑은 5까지. 빨강은 0.

"9는?"

"9는 없어. 9가 나오면 내가 실수한 거야. 8은 내가 유지하는 숫자야. 넘기는 숫자가 아니라."

"10은?"

"10은 병원."

성재는 그 문장들을 한 번 읽고, 한 번 더 읽었다. 그러고 나서 연우를 봤다.

"이거 되게 잘 짠 계약서 같아."

"계약서야."

"근데 나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안 눌러 봤잖아. 검증을 해야 되지 않나."

연우는 남은 와인 잔을 비웠다. 한 잔이었으니 규정 위반은 아니었다.

"테이블 펴."

* * *

작은 방 벽에 세워 둔 접이식 마사지 테이블은 연우가 학원 다닐 때 중고로 산 것이었다. 알루미늄 프레임, 검은 인조가죽, 헤드레스트 탈착식, 하중 이백오십 킬로. 연우는 그걸 거실 한가운데에 펴고 시트를 깔았다. 성재는 그 옆에 서서 옷을 벗었다.

"넌 안 벗어?"

"일할 땐 안 벗어."

"지금 일이야?"

"지금은 검증이야."

"검증 끝나면?"

"끝나면 알려 줄게. 엎드려."

성재는 헤드레스트에 얼굴을 넣고 엎드렸다. 연우는 오일을 손바닥에 덥히고 그의 등 전체를 세 번 쓸었다. 경찰법. 그다음 유념법, 양손으로 광배근을 쥐어서 밀고 당겼다. 성재가 뭐라고 말하려 하자 연우가 먼저 말했다.

"예열 없이 누르는 건 압박이 아니라 폭력이야. 참아."

"참는 게 아니라 좋은데."

"그럼 그냥 있어."

십 분을 그렇게 썼다. 연우의 손바닥 아래에서 성재의 등이 천천히 붉어졌다. 혈류. 준비된 근육은 색이 다르다. 연우는 그 색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른쪽 햄스트링으로 내려갔다. 팔뚝을 세워 반건양근과 반막양근 사이의 골을 따라 밀어 올렸다.

"몇이야."

"...다섯."

체중을 더 실었다.

"여섯. 여섯 반."

"반은 없어."

"일곱."

연우는 거기서 멈추고 유지했다. 성재의 허리가 테이블에서 떴다. 골반이 밀리는 것을 연우는 봤다. 앞이 인조가죽에 눌리고 있을 것이다. 연우는 팔뚝을 그대로 두고 왼손을 그의 대둔근 위에 얹었다. 힘은 주지 않았다. 얹어 두기만 했다. 대둔근이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서 규칙적으로 수축했다. 성재가 테이블에 자기를 문지르고 있었다.

"가만히."

"가만히 안 있어지는데."

"그럼 가만히 있게 해 줄게."

연우는 팔꿈치를 대둔근 깊은 곳, 이상근이 지나가는 자리에 꽂았다. 성재가 소리를 냈다. 이번엔 진짜 소리였다. 대둔근이 돌처럼 굳었고 그 굳은 근육을 연우는 팔꿈치로 그대로 눌러 들어갔다.

"몇이야."

"여덟—여덟."

연우는 그 자리에서 정확히 멈췄다. 더 들어가지 않았다. 빠지지도 않았다. 팔꿈치를 그 깊이에 고정하고 숨을 세었다. 성재의 몸은 이제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덟에서 몸은 스스로 얼어붙는다. 연우는 그 상태를 삼십 초 유지했다. 그의 등에 땀이 돋는 것을 봤다. 척추기립근 양쪽으로 얇은 골이 생기고 그 골에 빛이 고였다.

팔꿈치를 뺐다.

성재가 숨을 몰아쉬었다. 시트가 젖어 있었다. 땀인지 다른 것인지 연우는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돌아누워."

성재는 느리게 몸을 뒤집었다. 그의 것이 배 위로 서 있었다. 끝에서 투명한 것이 실처럼 늘어져 배꼽 밑에 닿았다. 연우는 그걸 잠깐 보고, 그의 얼굴을 봤다.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동공이 컸다.

"검증 잘 되고 있네."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니야. 기록하는 거야."

연우는 그의 다리 사이에 섰다. 오른손 엄지를 왼쪽 허벅지 안쪽, 내전근이 골반에 붙는 자리 바로 아래에 댔다. 사타구니에서 이 센티. 그 근육에도 결절이 있었다. 앉아서 일하는 사람은 다 있다. 연우는 그걸 찾아 지그시 눌렀고, 동시에 왼손으로 그의 것을 감쌌다.

성재의 골반이 튀어 올랐다.

"몇이야."

"그건—그건 통증이 아닌데."

"그럼 엄지만 말해."

"...여섯."

"손은?"

"그건 숫자가 없어."

연우는 엄지로 누르며 손을 움직였다. 천천히. 오일이 묻은 손이 미끄러졌다. 귀두 아래를 지날 때마다 성재의 복직근이 튀었다. 연우는 그걸 보고 있었다. 근육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는 것은 그녀의 일이었고, 이 근육들은 지금 아주 정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내전근을 더 누르면 그의 것이 더 단단해졌다. 엄지를 풀면 그의 허리가 손을 쫓아왔다.

"연우. 연우, 갈 거 같아—"

연우는 손을 멈췄다. 감싸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왜—"

"검증 안 끝났어."

성재가 신음하며 헤드레스트를 붙잡았다. 연우는 그의 것이 손 안에서 뛰는 것을 셌다. 다섯 번. 여섯 번. 뛰는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을 때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빠르게. 그리고 다시 멈췄다. 성재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단어가 아니었다.

"이게 무슨 검증이야."

"참는 거."

"참는 건 지도에 없었잖아."

"지도에 있는 건 안 되는 것들이야. 되는 건 다 되는 거고."

세 번째로 멈췄을 때 성재의 온몸이 떨렸다. 대퇴사두근이 시트 위에서 경련했고 발가락이 안으로 말렸다. 연우는 그때 손을 뗐다. 완전히. 한 걸음 물러섰다.

"검증 끝."

"...뭐?"

"이제부터는 일 아니야."

연우는 티셔츠를 벗었다. 그다음 바지. 성재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봤다. 연우는 그의 옆에 손을 대고 테이블에 올라갔다. 프레임이 삐걱했다.

"이거 하중 이백오십이야. 우리 둘이 합쳐서 백삼십. 여유 있어."

"그걸 지금 계산해?"

"항상 계산해."

연우는 그의 허리 위에 걸터앉았다. 그의 것을 잡고 자기 자리에 맞췄다. 그리고 내려갔다. 천천히, 자기 몸이 열리는 속도대로. 성재의 두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잡았다. 연우는 그 손을 떼어 자기 엉덩이로 옮겼다.

"여기 잡아. 대둔근. 세게."

성재가 세게 잡았다. 연우는 끝까지 내려앉았다. 그가 안에서 뛰는 게 느껴졌다. 아직 가지 않은 몸, 세 번 멈춘 몸이 얼마나 팽팽한지가. 연우는 허리를 움직였다. 앞뒤로, 자기 클리토리스가 그의 치골에 닿는 각도를 찾아서. 손님에게 골반 기울기를 가르칠 때와 같은 각도였다. 전방 경사. 연우는 그걸 찾았고, 찾은 다음엔 놓지 않았다.

성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연우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더 세게 쥐었고 연우는 그것이 좋았다. 자기 근육이 누군가의 손에 쥐어져 아픈 것이. 이것은 지도에 없는 것이었지만 지도는 그를 위한 것이었다.

연우는 한 손을 자기 다리 사이로 내려 손가락 두 개를 클리토리스 위에 얹었다. 누르지 않고 얹었다. 움직이는 것은 허리였다. 성재가 그녀를 올려다봤다. 연우는 눈을 감지 않았다. 손님을 볼 때처럼 그를 봤다. 그의 목이 어떻게 젖혀지는지, 흉쇄유돌근이 어떻게 튀어나오는지, 그의 입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연우가 먼저 갔다.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이번엔 짧게 냈다. 안쪽이 그를 조이는 게 자기도 느껴졌다. 성재가 신음하며 허리를 들었다.

"연우—제발—"

연우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오른손을 그의 왼쪽 허벅지 안쪽, 아까 그 자리에 댔다. 그리고 엄지를 꽂았다.

성재가 갔다. 테이블이 삐걱거렸고, 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에 자국이 남을 만큼 세게 파고들었고, 그의 것이 그녀 안에서 여러 번 뛰었다. 연우는 엄지를 유지했다. 그가 끝날 때까지. 그다음 뗐다.

둘은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연우는 그의 가슴에 엎드렸다. 대흉근 위에 귀를 대고 심박을 들었다. 백사십쯤. 내려가는 중.

"이완에서 갔어?"

성재가 웃느라 숨이 끊겼다.

"...모르겠어. 다 이완이었어."

연우는 테이블에서 내려와 식탁으로 갔다. 벌거벗은 채로 파란 펜을 들고 후면 해부도의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 날짜를 적었다. 그 밑에 썼다. 1차 검사.

"재검사는?"

성재가 테이블 위에서 물었다.

"매주."

"보험 되나."

"안 돼. 실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