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농담이었다

밤 11시 27분. 을지로3가역 4번 출구.

수빈의 엄지가 화면 위에서 멈췄다.

앱 이름은 '발소리'. 아이콘은 재우가 그림판으로 그린 엉성한 발자국 하나. 앱스토어에는 없는 앱이다. 세상에 딱 두 대의 폰에만 깔려 있고, 딱 두 사람만 쓴다.

화면 한가운데 커다란 버튼. [시작].

그 아래로 오늘의 설정.

사냥꾼 — 수빈
사냥감 — 재우
구역 — 을지로3가 ~ 을지로4가
제한시간 — 30:00
선출발 — 03:00
위치 갱신 — 90초

"준비됐어?"

재우가 출구 계단 끝에 서서 물었다. 회색 후드, 검정 트레이닝 팬츠, 새로 산 러닝화. 도망치기 좋은 옷. 잡기도 좋은 옷이라는 건 저 남자가 모른다.

"넌?"

"난 언제나 준비돼 있지."

"지난달에 12분 만에 잡힌 사람이 할 소린 아닌데."

"그건 신발 탓이라고 몇 번을 말해."

수빈은 웃었다. 엄지는 여전히 버튼 위에.

* * *

시작은 농담이었다.

1년 반 전, 종각역. 재우가 40분을 늦었다. 그때 막 깔았던 커플 앱을 열어 보니 위치 공유를 켜 둔 재우의 점이 청계천 쪽에서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걷는 속도였다. 뛰지도 않는다.

수빈은 메시지를 보냈다.

[움직이지 마. 내가 잡으러 간다.]

30초 뒤에 답장이 왔다.

[잡히면 뭐 해줄 건데]

그리고 점이 방향을 틀었다. 종각 반대쪽으로. 장난이었을 거다. 재우는 그런 놈이니까.

수빈은 뛰었다.

힐을 신은 채로 청계천 계단을 뛰어 내려갔고, 광통교 아래서 히죽거리며 뒤돌아 서 있던 재우의 후드를 뒤에서 잡아챘다. 그리고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 전에 입술을 물었다. 진짜로. 이빨로.

"잡았다."

그날 밤은 좋았다. 둘 다 알았다.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알았다. 한 달쯤 지나 술자리에서 재우가 캔을 만지작거리며 툭 던졌다.

"그거 또 하면 안 돼?"

"뭐."

"쫓기는 거."

두 달 뒤 재우는 앱을 만들어 왔다. 개발자 남자친구를 두면 이런 게 좋다. 규칙은 그날 밤 편의점 파라솔 아래서 캔맥주 두 개로 정했고, 그 뒤로 조금씩 손봤다.

하나. 역할은 가위바위보 3판 2선승.
둘. 사냥감은 3분 먼저 출발한다. 제한시간은 30분.
셋. 사냥감의 위치는 90초마다 사냥꾼에게 전송된다. 사냥꾼의 위치는 사냥감에게 보이지 않는다.
넷. 구역을 벗어나면 폰이 울리고 실격.
다섯. 붙잡기는 살에 손이 닿은 채로 "잡았다"라고 말하는 것. 옷은 안 된다. 살이어야 한다.
여섯. 붙잡히면 그날 밤의 주도권은 사냥꾼의 것. 30분을 버티면 사냥감의 것.
일곱. 채팅은 자유. 도발도 자유.

그리고 마지막 규칙. 재우가 화면 맨 아래에 빨간 버튼으로 박아 넣은 것.

[정지]

누구든 누르면 두 사람의 폰이 동시에 울리고, 화면이 빨갛게 변하고, 타이머가 멈추고, 양쪽의 위치가 즉시 공개된다. 사유는 묻지 않는다. 진짜 무서운 순간엔 즉시 멈춘다. 그게 전부고, 그게 이 게임을 게임으로 남겨 두는 유일한 조항이다.

스물여섯 번의 라운드에서 정지 버튼은 세 번 눌렸다. 한 번은 수빈이 계단에서 발목을 접질렸을 때. 한 번은 재우가 오토바이에 치일 뻔했을 때. 나머지 한 번은 서로 이유를 묻지 않았다.

* * *

"가위바위보."

주먹. 보. 가위. 수빈이 2대 1.

"아, 진짜."

"오늘 사냥감은 너."

재우는 후드를 눌러쓰고 목을 좌우로 꺾었다. 을지로 골목이 그의 등 뒤로 뻗어 있었다. 셔터 내린 인쇄소들, 간판 불 꺼진 조명 가게들, 그리고 저 멀리 아직 웅성거리는 노가리 골목의 불빛.

"이번엔 30분 다 채운다."

"채워 봐."

수빈은 [시작]을 눌렀다.

두 폰이 동시에 짧게 떨렸다. 화면 상단의 숫자가 03:00에서 02:59로 넘어갔다.

재우는 뒷걸음질로 세 걸음 물러나더니 손가락 두 개를 이마에 붙여 경례를 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골목으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수빈은 뒤쫓지 않았다. 3분은 그의 시간이다.

대신 구역 지도를 봤다. 을지로3가에서 4가까지. 남쪽은 을지로 큰길, 북쪽은 청계천. 그 사이에 격자처럼 얽힌 골목들. 인쇄소 골목은 밤이면 완전히 죽는다. 노가리 골목은 금요일 밤 열두 시까지는 살아 있다. 세운상가 뒤편은 공사 펜스와 파레트가 가득해서 숨기엔 좋고 도망치기엔 나쁘다.

재우는 사람 속으로 파고드는 걸 좋아한다. 지난 여섯 번 중 네 번을 그렇게 시작했다. 그러니 노가리 골목이다.

02:00.

수빈은 스트레칭을 했다. 종아리, 허벅지. 러닝 타이츠 위에 얇은 바람막이. 머리는 높게 묶었다. 밤공기가 목덜미에 닿았다.

01:00.

심장이 이미 빨라지고 있었다. 뛰기 전인데. 매번 이렇다. 이 1분이 제일 좋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고, 저 골목 어딘가에 그가 있고, 곧 자신이 그를 찾아낼 거라는 걸 아는 이 1분.

00:03. 00:02. 00:01.

타이머가 30:00으로 바뀌면서 지도에 점이 하나 찍혔다.

수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을지로 12길. 인쇄소 골목 한복판. 노가리 골목의 정반대 방향, 가장 컴컴한 쪽.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수빈은 폰을 바람막이 앞주머니에 밀어 넣고 뛰기 시작했다.